목회단상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우리는 ‘마음상함‘을 자주 경험한다. 마음 상함은 개개인을 직접 아프게 건드리는 상처다. 마음 상함은 존중받지 못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받지도 못한다고 느껴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내면이 심하게 불안정해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수를 꿈꾸게 된다.
누구나 상대방의 의미 없는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내 부주의하고 무의미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되어 가슴 속 깊은 곳에 생채기를 낸다. 말한 사람은 그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데, 정작 상처받은 사람은 그에게 이미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과 상처는 무시당한 인격에 대한 억울함에서 오는 하소연이고 자기 정당성에 대한 변호이다. 이런 사건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본문이 누가복음 18:1-8의 내용을 들 수 있다.
누가복음의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찬찬히 읽어보면 생각보다 해석이 어렵고 오해하기 쉽다. 우리는 왜 과부는 재판관에게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는가,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면 바로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하실 것이다.
보통 이 말씀을 비유로, 재판관과 하나님의 위상을 비슷하게 이해하면서 “고약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자비하신 하나님이야” 하고 이른바 “황차(況且)용법, 하물며 용법”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런데 “재판관 말고 하나님에게”라고 해석한다면 신앙적인 차원에서 신선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바로 앞부분에 누가 17:20절 이하에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니 오늘 본문의 중심문장은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바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 떠오르게 한다.
즉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끈기있게 매달리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기도에 관한 교훈” 말씀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나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성도의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말씀인 것이다.
‘종말론’은 세상이 언제 끝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부딪혀 이 ‘세상 나라’가 멸망된다는 소망을 뜻한다. 이 세상의 성공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이다.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일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이다.
이렇게 촛점을 “종말론적 삶의 태도”로 바꾸어 읽으면, “기도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임”을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왜 고약한 재판관을 비유로 드셨는가가 분명해진다. 이 과부는 “저에게 억울한 일 한 사람이 있는” 것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구하지만 고약한 재판관은 도통 관심이 없다. “고약한 재판관”은 단순히 비유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듣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현실에서 나온 캐릭터다. 오늘의 우리도 고약한 재판관 같은 인간이나 제도 때문에 치떨리게 억울한 적이 많을 것이다? 생각하면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약한 재판관”은 바로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를 섬기며 기득권(旣得權)을 고수하는 “이 세상” 자체다.
이는 비유를 위한 설정이기 이전에,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를 풀려다가 고약한 재판관같은 인간이나 제도에 당해본 경험이 많을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고 그 억울한 일을 풀려다가 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저 과부가 겪는 이중의 억울한 처지를 공감하는 사람만이 오늘의 비유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가 뭐냐?” 라는 중요한 물음 앞에 이 대목에서 “억울한 일이 없는 세상”라는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이 세상살이의 고통의 본질은 “내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만 있고 “그 억울함을 풀어줄 권세가 전혀 내 편이 아니라”는 경험 말이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은 군사력을 통하여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되는 유대 왕국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는” 세상, “억울함이 없는 세상” “억울함이 풀리는 세상” 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사실 “억울함”이란 세상살이의 본질적 문제다. 세상의 죄와 고통은 바로 억울함의 원인과 결과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억울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무런 억울함도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억울함 없는 인생살이는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일은 사실 억울할 일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일을 아무런 반성없이 그저 좋은 결과로 만들어달라는 기도는 이상하다. 내가 잘못을 고치고 잘 수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맞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다
공평한 룰을 통해 얻은 결과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 아니다. 가령 운동경기에서 우리 편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는 넌센스다. 공정한 경기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신앙적이 아닐까?.
문제가 되는 억울함은 부당하게 어떤 이가 내게 행한 억울함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 억울함을 무시하는 기득권이 주는 이중의 억울함이다. 그 부당한 억울함을 가하는 세력이 바로 ‘죄’요 ‘사탄’이다. 죄는 용서되어야 하고, 사탄은 물리쳐야 하고, 인간은 회복되어야 한다. 이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힘을 얻는다. 시편의 탄원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억울함을 못견디는 마음, 그 억울함을 풀려는 마음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아뢰는 마음,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 믿음이다.
기도란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바라는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다. 안락한 교회 의자에 앉아서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기도는 우리의 삶, 우리의 이웃과 세상에 “억울함(원한)”이 사라지도록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일이어야 한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믿는, 이 세상에 집착 없이 의연한 믿음 말이다!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신다. “과연 인자가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필자는 종종 자문해 본다 . 나의 믿음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진실로 원하고 있는가?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가? 죽은 후에 또는 부귀영화를 기대하는 하나님나라는 아닌가? 누가복음의“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품에서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다.
우리는 과연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 다른 이의 눈물을 보며 간절히 하나님의 나라를 기원하는가? 그저 대충 사는 일에 만족하지는 않는가? 우리 주위에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저 팔자가 기구하거나, 재수가 없거나, 사는 게 그저 그런거지 하며 무관심하지는 않는가?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동기에서가 아니라. 바로 억울한 이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어지는 세상, 그래서 억울함을 당한 이와 억울한 일을 행한 이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더불어 상생(相生)하며 사는 것 말이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