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성서는 신앙인가? 신화인가? 주술인가?
사실 현대 성서신학은 이 질문을 중심으로
지난 200년 동안 씨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트만의 비신화화(Demythologisierung)를 넘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서는 신화를 제거해야 할 책이 아니라,
신화를 통하여 인간 실존과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책이다.
1. 신화(Myth)란 무엇인가?
현대인은 신화를 “거짓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인에게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였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의 뱀은 단순한 파충류가 아니다.
뱀은 유혹, 욕망, 인간 내면의 분열,
악의 신비를 상징한다.
또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신이 되려는
교만의 신화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과학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상징으로 표현한 언어이다.

2. 그렇다면 주술(Magic)은 무엇인가?
주술은 인간이 초월적 힘을
자기 욕망에 이용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신앙과 주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술은 “내가 주문을 외우면
신이 움직여야 한다”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이다.
예를 들어,
기도도 주술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내가 금식했으니
반드시 응답하십시오.”
이것은 거래이다.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신앙이다.
3. 성경에는 왜 신화적 요소와 주술적 요소가 많은가?
이것은 고대인의 세계관 때문이다.
고대인은 세계를 자연과 초자연으로
엄격히 나누지 않았다.
천둥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바다는 혼돈의 상징이었으며,
악령은 인간을 파괴하는 악의 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울증을
뇌의 신경전달물질로 설명한다.
그러나 고대인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이해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인간이 경험한 절망, 불안, 악의 현실은 동일하다.
따라서 성경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상징과 신화의 언어로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다.
4.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무엇인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트만을 오해했다.
불트만은 신화를 제거하자고 말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한 것은
“신화적 세계관 속에 담긴
실존적 의미를 발견하자.”였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
불트만은 부활을
단순한 시체의 생물학적 부활로만 이해하면
현대인은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묻습니다.
“부활이 오늘 나에게
어떤 실존적 의미를 갖는가?”
부활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역사적 사실 이전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가능하며,
죄책감 속에서도 새 삶이 가능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실존적 선언이다.
불트만은
신화를 제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신화 속에서 오늘 인간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찾으려 했던 사람이다.

5. 그러나 불트만도 한계가 있다
불트만은 너무 인간 실존에 집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역사적 사건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이 오직
제자들의 실존적 경험이라면,
과연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하시는 분인가?
구약의 출애굽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도, 모두 인간 내면의 상징이라면
기독교는 역사를 초월한 철학이 되어 버린다.
이 점에서 불트만은 너무 실존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불트만을 넘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화는 제거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며 해석해야 한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다.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상징으로 노래한 것이다.
과학은 빅뱅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이 우주의 광막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은 뇌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이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밤새 울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시인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의 눈물을 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詩)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 생성의 물리학이 아니라,
이 세계는 우연이 아니라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는 노래이며,
노아의 방주는
배의 크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희망의 노래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생물학적 기적의 보고서가 아니라,
죽음보다 사랑이 더 강하다는
영원한 선언이다.
7. 21세기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신화를 문자적으로만 믿는 사람도,
신화를 단순한 허구로 버리는 사람도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진실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주술적 신앙을 버려야 한다.
기도를 거래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살아내야 한다.
성경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깊이를 말한다.
성경은 왜 인간이 사랑하는지,
왜 인간이 눈물을 흘리는지,
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왜 인간이 끝내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지를 말해 준다.
그래서 성경은 신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거짓말이 아니며, 상징으로 가득하지만
허구가 아니며, 과학책은 아니지만
인간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책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과학의 언어보다
신화와 시와 비유를 더 사랑하셨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보다
먼저 우리의 영혼과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영혼을 향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속삭이는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시(詩)이며, 동시에
인간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것이다.
*P/S
이 글을 시드니 인문학모임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담론을
필자는 반론으로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