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우는 자들과 함께 울 때
‘2014년 4월 16일’은 우리 모두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불의 사고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하며 운명을 달리한 수 많은 생명들 앞에 미안함과 무력함으로 멈춰버린 절망의 순간에 죄인처럼 머리를 숙일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소위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대책이나 희망을 전달하기 이전에 돈과 성공을 지향하며 경쟁과 탐욕에 눈이 먼 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소중한 생명보다는 성장을, 평화보다는 승리만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필자는 고난주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을 안고 부활주간에 교단행사와 개인적인 일로 한국을 다녀왔다. 분위기는 말 그대로 한국은 초상집 그 자체였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가 침몰한 것처럼 보였다. 이유 없는 우울이 아닌, 이유가 너무나 분명한 우울이 필자가 열심히 배운 초보적인 신학(神學)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감내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보통 어려움을 당하는 신앙인들은 대게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믿을 때 대응책은 세 가지뿐이 아니던가?. 첫 번째로 고난의 원인은 내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두 번째로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고상한 신앙고백으로는 스스로에게 위로와 자신을 뒤돌아보는 자성(自省)의 시간은 되겠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악과 불행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죄가 있다한들 엄연히 나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멀쩡히 잘 먹고 잘 사는데 내 죄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전생의 죄까지 헤아려 봐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때가 문제다. 더 큰 선을 위해, 내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니, 사랑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긴 마찮가지가 아니던가?.
성경은 원인에 집착하는 생각들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불행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필경 네게 있으니 네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면 그가 다시 복을 주시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했던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했다’(욥 42:7)고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빌라도가 자신의 제물에 그 피를 섞은 갈릴리 사람들과 사고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정하셨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눅 13:1-5). 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 왜,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하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요 9:3) 말씀하시며 그 장애를 고쳐주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요 9:4) 고 정리해 주셨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개신교 내에서 크게 두 부류(部類)의 대응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바라며 금식하거나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이 시점에서 정부에 저항하고 바르게 되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예의에 벗어난 비판은 상대를 죽이고 관계를 파괴하지만 건강한 비판은 유효하고, 또 필요하다. 다윗 왕을 따끔하게 지적했던 나단 선지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불을 토했던 예언자들, 그리고 바리세인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했던 예수님에게서 보는 것처럼 건강한 비판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 비판해야 할 때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바르게 비판하는 용기와 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요청된다.
일찍이 독일의 저명한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오늘 우리가 직면한 최대 위기를 ‘관계의 위기’라 진단했다. 그의 지적처럼 오늘 우리는 ‘나와 너’(Ich und Du)의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와 그것’(Ich und Es)의 사물적 관계로 타인을 대하고 있다. 상대를 인격적이고 존귀한 존재로 대하기보다 단지 사물적인 그것으로 이용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작금의 시대를 한 과학자는 이렇게 진단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떼죽음 당하는 참사가 반복되는 것은 위기를 예상하지 못하고 또한 위기를 관리할 능력도 없는 어른들의 생명경시풍조와 비합리성 때문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든다며 기업의 하수인이 된 정치인들을 선택한 유권자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입니다.” (김준우 박사의 페북에서…)
울리히 벡(Ulrich Beck)이라고 독일의 사회학자가 1986년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썼다. 5년 만에 이 책은 6만권이 팔렸다. 노벨상을 받은 소설책도 아닌 사회과학서적이 이렇게 많이 팔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 책은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근대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꽤 무거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팔리게 되었는가. 그것은그것은 무엇보다 같은 해에 있었던 당시 구소련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사태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원전은 사고로 폭발했고 이후 수습과정이 원활하지 않아 그 후폭풍이 컸었다. 구소련 측에서는 원전이 폭발한 이후에도 제대로 보도를 하지도 않았고, 그 위험성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첫 위험신호는 스웨덴에서 발견했다. 체르노빌과는 1500 Km나 떨어져 있는 그곳에서 방사능 수치가 높게 나타나면서 구소련에 경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럽은 핵공포에 휩싸였다. 방사능 먼지가 유럽전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그 위험은 단순한 물리적 위험만은 아니었다. 언제든 핵위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올 수 있다는 공포가 더 심했다. 그 결과는 사고의 전환이었다. 핵에 대한 경각심, 에너지원에 대한 질문들, 환경과 먹거리에 대한 고민 등이 사회와 개인의 삶에 중요한 기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향 가운데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리해 주면서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 결과는 6만권이라는, 사회과학서적으로는 경이로운 판매로 이어진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3년 전 후쿠시마를 통해 경험했다. 역시 원전이 폭발한 것이다. 후쿠시마는 한국과 불과 900 Km 떨어져 있다. 그 수습은 결코 체르노빌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낫지 못했다. 25년의 시간 간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은 오히려 부족해 보였다. 오히려 체르노빌은 구소련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해결을 했지만, 일본의 경우는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이 서로 책임을 나누며 좀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건이후 한국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원전에 대한 경각심은,생겼는지 모르지만 그 위험에 대한 대응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의 사고가 변화되는 것도 없었고, 사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핵발전소나 핵문제에 대한 위험감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불안이 정치권과 사회의 모든 부분을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이러한 위험에 대한 감수성의 부족은 결국 이 나라에서 끝없는 사고와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비슷한 사건들이 이어지는데도 고쳐지지 않고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도 그 때뿐이다. 이것이 결국 세월호 사건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정책입안자나 정치인들을 향해서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강력히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위험사회를 사는 기독교인들의 정의이어야 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기까지 원인을 제공한 많은 사람들과 시스템, 그리고 사고 후에도 눈앞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잃고 실종자 중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한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 속에서 우리는 애써 외면해왔던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았다.
1986년 개봉한 <미션>에서 멘도자 신부는 남미의 원주민들을 위해 총과 칼을 들고 불의에 저항했다. 정반대로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는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과 함께 총탄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과연 어떤 길이 옳을까? 유감스럽고도 위험하게 이 질문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선택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리라. 정반대의 선택을 했음에도 <미션>의 두 신부는 둘 다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며, 둘 다 원주민들을 위해 죽었다. 하나님은 불의 앞에서 내가 어떤 행동의 결정을 내렸는가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 불의가 자행되는 자리에 과연 내가 있었는가로 나를 질책하시지 않을까? 여기가 하늘나라가 아닌 이상 불의는 언제나, 내 곁에서 자행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집 없는 이들의 대부 아베 피에르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 하나를 남겼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때'(로마서12:15)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있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