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빛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설교의 부름/초대시)
빛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이미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아직 닿지 않은 미래가
지금 우리의 가슴을 조용히 당기듯,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둠 속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고
우리의 마음도 깊은 밤처럼 흔들리지만,
흔들림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
“나는 너를 붙든다.”(8절)
그 음성 하나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이 자리, 대림절의 문턱에 섭니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가 만든 돌기둥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쌓은 탑도 아니며,
우리가 오늘 숨 쉬는 것조차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려 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생명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립니다.
내일의 태양이 아직 뜨지 않았지만,
내일을 보내신 분이
우리 가운데 이미 와 계심을 믿으며
기다림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소리입니다.
은혜의 바람이 오늘도 우리 곁을 지나고,
보이지 않는 은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빛을 품고,
그리스도의 날은 먼 미래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걸어오고 있습니다.
밤보다 더 깊은 신실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호흡을 낮추며,
우리의 영혼을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 빈 마음으로,
그러나 은혜로 채워질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나아갑니다.
빛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빛의 주님을 향해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나아갑시다.
교회력의 시작, 대림절 첫주일 설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공동체 (고린도전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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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Advent)의 첫 주일은 교회력의 시작이며,
우리 신앙의 호흡이 새롭게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기다릴 대(待), 임할 임(臨), 마디 절(節)로 형성된 대림절은
말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 데
그 단어는 ‘오심,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대림절은 단지 과거의 ‘아기 예수’를 회상하는 절기가 아니며,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는 추상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 삶으로 침투해 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를 비추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전서 1장 4–9절은
바로 이 대림절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들입니다.
그 속에는 기다림(Advent), 부르심, 은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1.“은혜로 시작되는 새해”
— 바울의 감사(1: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감사하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4절)“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역사비평학자 루돌프 불트만 (R. Bultmann)은
이 구절을 분석하며
“바울에게 은혜는 시간 속에 끼어든 신적 사건이며,
인간이 아닌 하나님 쪽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개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는 사건입니다.
문학비평학자 한스 디터 벳츠(H. D. Betz)는
바울의 감사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편지 전체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프롤로그적 신학 선언”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기 전에
정체성의 뿌리를 먼저 회복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시작에서
바울이 선포하는 첫 문장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교회의 새해는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다.”
이 은혜가 대림절의 첫 빛입니다.
2.“모든 말과 지식에 풍성하다”
— 은사와 공동체의 구조(1:5–6)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5절)“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으므로…”
고린도는 웅변술과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역사비평학자 고든 피(Gordon Fee)는
고린도 교회가 당시 도시 문화의 특성
“능력 경쟁과 계층적 우월의식”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마저도 경쟁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를 ‘경쟁의 무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증언이 확증되는 통로로 재정의합니다.
문학비평학자 베버 (W. Wrede)는
바울이 “모든 말”, “모든 지식”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ἐν αὐτῷ)
바로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로 제한한 것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능력의 방향성을 인간에게서
하나님으로 재조정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철학자 파울 리쾨르 (Paul Ricœur)는 ‘은사 (gift)’라는 개념이
“나를 넘어서는 의미의 세계”를 열어 준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니며,
내 안에 있지만 내 안에서 기원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사는 곧 기다림의 자리를 형성합니다.
대림절은 바로 이러한 은사의 축제를 다시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많은 것을 주셨고,
그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선물입니다.
3.“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게 하심이라”
— 기다림의 신학(1:7)
대림절의 중심은 기다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심이라.”
독일 신약학자 울리히 루츠 (Ulrich Luz)와 W. Schrage는 이 구절을 두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미래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고 해석합니다.
현재의 능력은 미래의 소망을 향한 발판입니다.
종교사회학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은 미래를 바라보는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미래가 공동체를 묶고, 공동의 목표가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능력보다 기다림의 방향성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본회퍼 (D. Bonhoeffer)는
감옥에서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다림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형태이다.
기다리는 자는 이미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대림절은 바로 그 “다른 세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으로 밀려오는 세계
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4.“그가 너희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흔들리는 시대 속의 안정(1:8)
바울은 약속합니다.
(8절)“그가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역사비평학자 제임스 던 (J. D. G. Dunn)은
이 문장을 “신자의 확신의 근거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바울 신학의 핵심 요약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는 흔들렸습니다.
분열, 도덕적 혼란, 신학적 혼동—
그러나 그 모든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드신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의 고백과 깊이 닿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붙들림 (habitus fidei)”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신앙은 내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드는 경험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를 먼저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하나님은 신실하시다”
— 대림절의 근거, 존재의 신뢰(1:9)
마침내 바울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πιστὸς ὁ θεός).”
독일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 von Rad)는
“신실함”을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실함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구성요소입니다.
신약학자 슈나켄부르크 (R. Schnackenburg)는
바울이 이 선언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모든 문제보다
더 깊은 근거—“하나님의 부르심”—을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삼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 (K. Jaspers)는 말했습니다.
“신뢰 없이는 인간 존재는 붕괴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뢰는 인간에게 둘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서 단 하나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대림절의 촛불이 어둠을 이기듯,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혼란을 이깁니다.
대림절은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말하는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하신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6.결론 — 대림절을 사는 세 가지 삶의 태도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 첫 주일에 우리는 다시 이 세 가지를 마음에 새깁니다.
1) 은혜로 시작하는 삶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첫 문장을 “은혜”로 시작했듯
우리 믿음의 해도 은혜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받아들여졌고 이미 사랑받고 있습니다.
2) 기다림의 공동체
은사보다 기다림이 더 중요합니다.
기다림은 공동체를 하나로 만듭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하나님 미래의 빛 아래 두게 합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우리의 신앙의 안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신앙의 중심을 다시 붙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대림절의 새 아침에 우리의 마음을 깨우소서.
은혜로 시작되게 하시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당신의 미래가 우리에게 말을 걸게 하옵소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확고한 반석이 되게 하옵소서.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우리를 세우시어
그리스도의 날을 향해 함께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대림절 첫 주일 설교 (20251130)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공동체
“길을 닦는 이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설교의 부름 초대시)
1
새벽을 깨우는 작은 불빛 하나,
대림의 둘째 초가 타오를 때
우리의 마음도
조용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2
주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어디에서 길을 닦고 있느냐?”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고요히 숨을 고릅니다.
3
광야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낯선 바람의 소리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오래된 사랑의 음성입니다.
4
길을 닦는 자들아,
평화의 촛불을 들고 나아오시라.
어두운 골짜기를 메우고
거친 언덕을 낮추며
주님의 길을 함께 이룹시다.
5
우리의 작은 손길 하나가
세상의 어둠을 푸는 열쇠가 되고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가
상한 마음을 다시 세웁니다.
6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의 존재를 다시 깨워
길을 닦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7
길을 닦는 자들아,
평화의 촛불을 들고 나아오라.
사랑으로 길을 만들고
빛으로 골짜기를 채우며
주님의 오심을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합시다.
251207 교회력 2 번째 주일
대림절 둘째 주일설교 길을 닦는 사람들 (누가복음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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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둘째 주일에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 각자의 마음과 가정에 깊이 스며들기를 기도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첫째 주일이 “깨어 있음의 초”라면,
둘째 주일은 “평화의 초”, “준비의 초”입니다.
우리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
길을 닦는 기다림으로 주님을 맞이 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17은 바로
그 준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를 전합니다.
이 본문은 대림절의 영적·사회적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장면을 단순히
‘성탄의 시작’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길을 닦으라 하시는지 함께 묻고자 합니다.
Ⅰ. 중심의 공간에 스며든 균열 —
대림절의 첫 울림
본문은 성전 한가운데에서 시작됩니다.
제사장 사카랴가 ‘그의 반열’에 따라 분향하는 장면은
유대 종교제도의 질서와 규율, 반복되는 일상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상의 중심에 침투하여
전혀 새로운 말씀을 터뜨리십니다.
대림절은 그처럼 일상의 중심을 흔드는 계절입니다.
우리가 익숙함 속에서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은 뜻밖의 균열을 열어 우리의 시간을 깨우십니다.
사카랴는 제사장—말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말을 잃게’ 됩니다.
말을 잃은 제사장. 이 표징은 곧 제도 중심의 침묵,
‘말은 많으나 진실이 사라진 종교’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의 초가 비추는 빛은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에 침묵하고 있는가?”
“너희의 말은 여전히 진실을 담고 있는가?”
대림절은 우리의 ‘말’을 다시 살피게 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안의 공허한 말들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Ⅱ. 길을 닦는 사람의 탄생 —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회심으로
천사는 사카랴에게 말합니다.(15/16/17절)
“그 아들 (요한)은 주 앞에 큰 자가 되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 앞서 가며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준비한다 (ἑτοιμάσει)”는 표현은
단지 마음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광야의 길을 곧게 하는 일
삶의 구조를 새롭게 하는 공동체적 사명입니다.
대림절은 단지 ‘예수님을 기다리는 감정의 절기’가 아니라,
삶과 사회의 질서를 주님의 나라에 맞게 정돈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사명은 이렇게 재해석됩니다.
1) 개인적 회개를 넘어 개인의 죄책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2) 관계의 회복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킨다”는 말은
가정의 상처, 세대 간 단절, 왜곡된 권위를 바로잡는 의미입니다.
3) 사회적 회심
비틀어진 길—불평등, 억압, 소외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
대림절의 촛불은 평화로 가는 사회적 길들을 밝혀야 합니다.
이처럼 ‘길을 닦는 일’은 기도하는 마음과 더불어
손과 발, 시간과 재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조적 회심입니다.
Ⅲ.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 —
비제도적 공간의 신학
사카랴는 성전 안에서 천사의 소식을 듣지만,
요한의 사역은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광야는 제도가 닿지 못하는 장소,
권위가 약한 곳,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크게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도시의 후미진 노숙자들의 골목
.이주노동자 숙소
.병원 침대 고통의 자리
.하루 한 끼 먹기 어려운 가난의 현장
.마음이 황폐해진 한 청년의 방
.차별과 혐오의 상처 안에 있는 이들의 삶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
대림절의 길은 늘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그 광야로 나아갈 때
그곳에서 들리는 메아리는
어떤 교훈보다 깊은 복음이 됩니다.
대림절의 촛불은
성전의 황금 부속품이 아니라
광야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더 밝게 빛납니다.
Ⅳ. 말의 회복과 침묵의 책임
사카랴는 ‘침묵’을 표징으로 받습니다.
대림절은 침묵을 배우는 절기이지만,
그 침묵이 언제나 미덕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의 침묵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침묵
.진실이 왜곡될 때 귀를 닫는 침묵
이것은 대림절의 침묵이 아닙니다.
대림절의 침묵은
자기 성찰의 침묵이며
말씀을 기다리는 침묵이며
말해야 할 것을 말하게 하는 침묵입니다.
사카랴의 침묵은 결국 ‘말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린 순간, 그는 찬양합니다.
“주는 복되시며 주의 백성을 돌아보셨나이다.”
대림절 둘째 주일은
우리의 ‘입술의 회심’을 요청합니다.
거짓을 멈추고
비난을 멈추고
두려움의 말을 멈추고
희망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회복을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이 대림절의 사명입니다.
Ⅴ. 대림절의 길 닦기 —
오늘의 실천
요한이 예수의 길을 닦았듯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길을 닦는 공동체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에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길 닦기는 무엇일까요?
1) 듣는 공동체
상처 입은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는 일.
2) 공동체 내부의 정의
교회의 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을 점검하고
침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공간을 마련하는 일.
3) 변방으로 나아가는 운동
광야—가난, 고통, 외로운 이들의 자리로 나가는 일.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일.
4) 언어의 회복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배 중에
우리의 말이 복음이 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일.
5) 평화의 작은 실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화해의 길을 한 걸음 내딛는 일.
이 모든 것이 대림절의 길을 닦는 행위입니다.
Ⅵ.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기다림은 존재의 방식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기다리는 존재” (Gewärtigsein)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가올 것’을 존재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도래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절기”,
“존재를 다시 세우는 절기”입니다.
그 존재의 회복이 사회적 회심과 연결될 때,
대림절은 우리의 삶에서 현실적 힘이 됩니다.
Ⅶ. 결론 —
대림절의 부름, 우리를 길 닦는 사람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 둘째 주일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디에서 길을 닦고 있는가?”
“너희의 광야는 어디에 있는가?”
“너희의 침묵은 무엇을 가리고 있으며,
너희의 말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길을 닦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 친절, 진실한 말, 값진 경청,
분노 대신 긍휼을 선택하는 일,
이웃의 무너진 길 하나를 일으키는 일
이 모든 것이 요한의 길 닦음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길은 예수님의 능력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된 백성으로 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준비된 백성은
·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
· 공동체 내에서 화해를 이루는 자
·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사가랴의 성전 봉사는
그가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를 신실하게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카랴의 침묵 속에서 새 말을 준비하시고,
광야의 메마른 바람 속에서 새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에도
그 길은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닦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옵니다.
우리의 팔과 다리, 귀와 입술,
우리의 시간과 열망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 가운데 길을 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대림절의 촛불을 들고
평화의 길을 밝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시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