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다” (고린도전서 12: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평생 어딘가로 올라가려 합니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더 깨끗한 존재로 살려고 합니다.
더 영적인 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더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증명하려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보다 뛰어난가?”
“너는 특별한가?”
“너는 선택받은 사람인가?”
그리고 인간은 그 질문 앞에서 평생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신앙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조차 경쟁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더 신령한가?,
누가 더 거룩한가?,
누가 더 놀라운 은사를 가졌는가?.
방언하는 사람이 더 높은 사람처럼 보였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사람이 더 하나님 가까운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그 교회 앞에 서서
아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성령은 너를 높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성령은 너를 서로 연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1. 인간은 왜 끊임없이 우월해지려 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은 죽음보다도
“나는 의미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은가?
나는 인정받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가?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을수록 비교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마저
자기 우월성의 도구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방언한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나는 치유의 은사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은 자랑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성령 충만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낮아지게 합니다.
진짜 성령 충만은
“내가 특별하다”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를 고백하게 합니다.
성령강림 주일 예배에 선포될 고린도전서 12장은?
“몸을 떠난 영인가?” 아니면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숨”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인간을 세계로부터
탈출시키는 힘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은 찢어진 공동체를 다시 몸으로 엮는 숨결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속에서 성령은 때때로
“육체를 떠나는 영혼의 상승”으로 이해 되었습니다
즉 “영은 높고 육은 낮다”라는 이원론적인 긴장이 기독교 역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기독교의 역사와
바울의 성령론을 비교하여
고린도 전서 12장을 설명하겠습니다
2. 플라톤의 하늘과 바울의 몸
인류는 오래전부터 몸을 의심했습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참된 본질은 영혼이었습니다
육체는 변하고 늙고 욕망하며 죽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이데아를 향합니다.
플라톤의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육체의 소음을 잠재우고
순수한 정신의 세계로 상승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처럼 보았습니다.
영혼은 순수한 세계를 향하고,
몸은 인간을 아래로 끌어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몸을 벗어나
더 높은 영적 세계로 올라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어느 순간
이 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점점 몸을 경계했습니다.
눈물보다 이성을 사랑했습니다,
삶보다 교리를 사랑했습니다,
상처보다 순결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입니다. 영혼만이 아닙니다.
상처 입는 몸입니다.
늙어가는 몸입니다.
병드는 몸입니다.
눈물 흘리는 몸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몸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가장 혁명적인 선언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다”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경멸하는 영성은
결국 성육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영성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몸 밖으로 탈출시키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굶주리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병든 사람 곁에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 곁에 있습니다.
차별받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종교는 몸을 경계했습니다
욕망을 죄로 만들었습니다
감정을 불순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삶의 구체성을 낮은 차원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몸이 되셨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가장 혁명적인 선언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몸으로 내려오셨다”는 사건입니다
플라톤의 영혼은 하늘을 오르려 하지만
바울의 성령은 땅으로 내려옵니다
성령은 상처 없는 천국의 빛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 곁에 머무는 하나님의 숨입니다.
3. 어거스틴의 내면과 바울의 공동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의 깊이를
누구보다 아름답게 탐구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분이십니다”
어거스틴의 이 고백은 너무나 아름답니다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성은 위험해졌고
육체는 타락의 흔적이 되었으며
욕망은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이후 서구 기독교는 점점
“내 영혼의 구원”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보다 개인 구원입니다
역사보다 내면이 중요합니다
공동체보다 한 영혼이 중요합니다
몸보다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프로이드는 억압된 욕망이
병리로 돌아온다고 했지만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몸을 지나치게 억압한 영성은
종종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낳았습니다
몸을 사랑하지 못하는 신앙은
결국 타인의 몸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은
눈물 흘리는 사람보다
교리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면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지나치게 내면으로만 들어가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잃어버립니다.
기도는 깊어지는데
이웃의 눈물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교리는 정교해지는데
상처 입은 사람의 떨림은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령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유익”은 개인 성공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생명입니다.
성령은 나 혼자 거룩해지는 체험이 아닙니다.
성령은
함께 살아가는 힘입니다.
함께 울게 합니다.
함께 견디게 합니다.
함께 숨 쉬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에게 성령은
몸을 부정하는 금욕의 냉기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는 생명의 흐름입니다
4. 칼빈의 질서와 성령의 바람
칼빈은 질서를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회가 혼란과 광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충분이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질서와 말씀 안에서
좁게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살아 있는 하나님을 체계 속에 가두려 합니다.
우리는 설명 가능한 하나님을 원합니다.
통제 가능한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2장 성령은 바람 같습니다.
붙잡을 수 없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나타납니다
예언/방언/치유/눈물/지혜/통찰
이렇게 성령은 하나의 체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칼빈의 전통 속에서 교회는 때로
질서를 얻었지만 떨림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해졌지만
놀람은 사라졌습니다.
교리는 정교해졌지만
상처 입은 사람 곁에
함께 우는 신비는 줄어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성령은 언제나 인간 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역사하십니다.
교회가 버린 사람 곁에서 있습니다.
세상이 지운 이름들 곁에서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있습니다.
성령은
때때로 우리의 신학보다 더 넓고,
우리의 교리보다 더 깊고,
우리의 질서보다 더 자유롭습니다.
사도바울은 영과 육을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월론적으로
“몸 자체”와 “영혼 자체”의 대립이 아니라
이분법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냐” 아니면
“성령 안에서 타자를 향하는 인간이냐”의 차이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성령은
인간을 더욱 인간 되게 합니다
더 울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하고
더 함께 아파하게 합니다
5. “각 사람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어쩌면 이것입니다.“각 사람에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각 사람에게”.
많이 배운 사람도.
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각 사람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실패한 사람에게도,
외로운 사람에게도.
성령은 차별 없이 임하십니다.
세상은 늘 말합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손이 아니니까.
나는 눈이 아니니까.
나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오히려 가장 귀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몸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6. 성령은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이다
오늘날 교회도 여전히 경쟁합니다.
누가 더 큰 교회인가?.
누가 더 은혜로운가?.
누가 더 영적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경쟁의 불이 아닙니다.
성령은 함께 숨 쉬게 하는 바람입니다.
폐는 혼자 숨 쉴 수 없습니다.
몸 전체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 부릅니다.
눈은 손을 무시할 수 없고,
손은 발을 버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결코 아닙니다.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의 공동체입니다.
7. 성령은 몸을 떠나는 빛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영성을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삶을 떠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아이를 잃고 우는 부모 곁으로 옵니다,
병실의 긴 침묵 속으로 들어옵니다,
외로운 노인의 저녁 식탁으로 함께합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심장 속으로 들어옵니다.
성령은 고통 없는 세계의 빛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함께 머무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진짜 영적인 사람은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기 몸처럼 느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플라톤은 인간을 하늘로 올려보내려 했고,
어거스틴은 인간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갔으며,
칼빈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누군가는 방언으로 자신을 높였습니다.
누군가는 가난 때문에 식탁에서 밀려났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세상은 늘 갈라치기 하고 나눕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과 속된 사람입니다
깨끗한 사람과 속된 사람입니다.
중심의 사람과 주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이런 경게선 위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버려진 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성령은
상처 입은 공동체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한 몸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한 몸입니다.
상처 입었지만 한 몸입니다.
울고 있지만 한 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정죄하게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의 눈물이 여러분 곁에 떨어질 때
외면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손을 붙드십시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성령은 오늘도 거대한 기적보다
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깊이 역사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고린도 전서의 12장의 성령은
육체를 떠난 순수한 빛이 아닙니다
그 성령은
울고 있는 공동체의 가슴으로 들어와
다시 함께 숨 쉬게 하는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아멘.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를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라 불러주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상처도 다르고,
지나온 시간도 다르고,
눈물의 깊이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를 경쟁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 숨 쉬게 하시려고 부르셨음을
오늘 다시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는 너무 자주
누군가보다 높아지려 했고,
더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했으며,
때로는 신앙마저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의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우리 안의 비교를 멈추게 하시며,
우리 안의 차가운 우월감을 녹여 주옵소서.
성령님,
우리를 몸을 떠나는 영으로 만들지 마시고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머무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눈물 흘리는 자와 함께 울게 하시고,
외로운 자 곁에 조용히 앉아 있을 줄 알게 하시며,
말없이 아픈 사람의 침묵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세상은 강한 사람만 기억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사오니,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끼는 영혼들에게
오늘 주님의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옵소서.
“너 없이는 몸이 완전하지 않다”
그 음성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심장 속에
다시 살아나게 하옵소서.
병든 몸 위에도,
지친 마음 위에도,
깊은 상실의 밤을 지나가는 영혼 위에도
성령의 바람이 조용히 불게 하옵소서.
주님,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리가 사랑을 잃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질서가 눈물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이 사람보다 커지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없이 아파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무너진 가정들을 붙드시며,
삶의 무게에 지친 영혼들을
주님의 품 안에 안아 주옵소서.
우리를 높이는 성령이 아니라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성령 안에서
끝까지 함께 걷게 하옵소서.
우리의 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