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개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젊은 웨르테르의 번민’, ‘젊은 베르터의 고뇌’,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간체 소설이다. 1774년 출판되었다.
이 책은 괴테의 첫 성공작으로서, 무명작가였던 괴테를 유명인 반열에 올려 놓은 작품이다.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가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이 작품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하여 자살한 사람도 2,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슈투름 운트 드랑 시기의 대표작으로, 작품의 저술 배경으로는 괴테 자신의 세 가지 개인적 체험을 들 수가 있다. 즉 샤를로테 부프와의 연애, 친구 카를 예루잘렘의 실연과 자살, 막시밀리아네 브렌타노와의 교섭이다.

괴테는 1772년 5월 법률의 실무 견습차 베츨라어에 소재한 고등법원에서 일하면서, 알베르트의 원형이 된 요한 케스트너와 그 약혼녀인 샤를로테 부프, 그리고 유부녀인 헤르트 (Elisabeth Herd) 부인을 사랑하는 카를 예루잘렘을 알게 되었다. 샤를로테 부프를 향한 사랑을 고민하던 괴테는 1772년 9월에 베츨라어를 떠나 귀향하는 도중 코블렌츠에서 막시밀리아네를 알게 되었다. 괴테의 귀향 후 1772년 10월 말에는 베츨라어에서 예루잘렘이 자살했다.
이런 외적 사건들을 연결하여 괴테는 베르테르의 비극을 창조했다. 이것은 단순히 실연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 일체를 배척해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살리고 해방된 심정의 발양 권리를 주장하려는 적극적 정열이 넘치는 저작이다. 이 작품은 젊은 괴테의 내면생활을 유감없이 토로했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저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국가: 독일 독일
.언어: 독일어
.장르: 연애 소설
.발행일 1774년
– 저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 (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 (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 (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 (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 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1829)와『파우스트 2부』 (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 (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 주요 등장인물

.베르테르: 주인공. 젊은 남자.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로, 아직 미혼이고 샤를로테 부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샤를로테에게 편지 82통을 썼다.
.샤를로테(로테):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하고 베르테르를 사랑하지만, 알베르트와 혼인하게 되는 여성. 베르테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괴로워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빌헬름: 베르테르의 친구. 작품 속의 편지들은 거의 다 빌헬름에게 보내졌다.
.알베르트: 베르테르, 로테와는 달리 감성보다 이성이 풍부하고, 샤를로테 부프와 혼인하는 남성.
– 줄거리
발하임으로 이주한 지식인 베르테르는 무도회에서 알게 된 로테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접근하여 친교를 맺고 집을 왕래할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진다. 로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커질즈음 갑작스레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발하임으로 돌아오면서 베르테르는 크게 실망한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베르테르는 점차 로테에 대한 치정이 깊어지면서 알베르트와도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가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로테를 잊고자 발하임을 떠나기도 하지만 귀족 사회의 폐해만을 경험한 채 좌절하여 다시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의 주위를 맴돌며 베르테르는 고통스러워하고,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친밀감과 호감을 느끼면서도 남편을 위해 베르테르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구애하며 키스를 시도하고, 당황한 로테는 베르테르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절망에 빠진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쏘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비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취지는 당대의 인습과 귀족사회의 통념에 반대하는 젊은 지식인의 우울과 열정을 그리는 것이었지만, 이 작품은 뜻하지 않게 우울증을 전염시키고 자살을 전파한다는 오명을 얻었다.

– 영향
.베르테르 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될 당시 소위 “베르테르 열병” (독: Werther-Fieber)이라 불리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유럽의 많은 청년들이 소설에 묘사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을 따라하였고, 심지어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에 착안해 1974년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 (David Philips)는 유명인이 자살하고 나서 그것을 모방한 자살이 확산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 명명했다.
– 기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애독자였으며, 이 소설을 유럽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지고 다니며 읽기도 하였다.
롯데그룹의 명칭은 여주인공인 ‘로테’에서 유래되었으며 해당 소설을 모티브로 한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국어 번역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원제인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는 일반적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번역하지만, ‘베르테르’가 아닌 ‘베르터’가 원어에 가까운 발음이며 ‘Leiden’은 슬픔보다는 ‘고통’, ‘괴로움’, ‘고뇌’라는 의미에 가깝기에, 제목을 ‘젊은 베르터의 고통’ 혹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로 언역하려는 동향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