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
조셉 헨리(해리) 데이비스 목사 (1856. 8.22-1890. 4. 5)
한국명: 덕배시(德倍時) 목사, 한국 1889-90
조셉 헨리(해리) 데이비스는 1856년 3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레이(Whangerei)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족은 1860년 멜번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해리가 12살 때에 세상을 떠났고 해리는 13명의 자녀를 둔 한 가족의 기둥이 되었다. 그는 낮에는 가족을 위해 일을 해야 했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15세에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해리의 가족은 플리머스 형제단의 일원으로 깊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엄격한 가정교육은 데이비스가 아주 내성적인 성격을 갖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적 훈련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고 많은 시간을 성경공부에 몰두 하였다.
해리는 인도에서 1년 이상을 선교사로 봉사하고 돌아 온 후에 멜번 대학을 졸업했고 1883년에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1881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립학교인 코필드 그래머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했고, 처음에는 남동생 두 사람을 교사로, 여동생 메리(Marry)를 기숙사 사감으로 채용하였다.
1887년에 그는 부산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읽게 되었다. 그후, 신학을 공부한 후에 데이비스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던 누이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에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에 부산에 도착했고, 당일 제물포로 출발했으며 10월 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약 20명의 선교사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대다수가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그와 메리는 즉시 그들과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그후 5개월 동안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그리고 메리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또한 전도자 서상륜와 함께 열심히 근처의 마을들을 방문하였다.
그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장로회선교공의회’가 만들어졌고 의사 헤론(J.W. Heron)이 회장으로 데이비스가 서기로 임명되었다. 1890년 3월 데이비스는 선교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한 답사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는 제임스 게일(J.S. Gale)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게일은 토론토 YMCA가 파송한 독립선교사였고 부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다. 1890년 3월 14일 데이비스는 한국어 선생과 함께 도보로 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데이비스는 여행 중에 전도하면서 쪽 복음서들을 팔았다. 그가 3주간의 도보여행으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천연두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는 게일 선교사와 일본인 의사의 간호와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 4월 5일 부활절에 사망하였다.
1890년 언더우드(Rev H.G. Underwood) 선교사는 데이비스를 “열정적이고 아주 탁월하고 경건한 사람,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평가하였다.
예상치 못했던 데이비스 목사의 사망 소식으로 빅토리아 장로교회 안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교회는 데이비스를 대신하여 그가 어렵게 시작한 사역을 이어갈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