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3-2)
Gelson Engel(1868.10.10.-1939), 부산진 1900-1919; 평양 1919-37
호주장로교선교부의 대부(大父) 왕길지 선교사
4. 교수로서의 왕길지 선교사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연합신학교(Union Seminary)였기 때문에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목사를 교수로 파송했다. 1906년 그는 정식강사가 되었다. 그 당시 신학생들은 1년에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만 수업을 했고 나머지는 목회와 실습으로 대치했다. 대신 5년의 긴 학제를 운영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6년 3월 8일부터 평양신학교의 정식교수가 되었고 전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 해에 그는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했고 5월 한 달은 44명의 목사들이 참가한 학급에서 〈어거스틴의 생애와 교리〉를 특별 강의했다.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는 평양신학교에서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은 왕길지 목사에게 넘어왔다. 그는 평양신학교 최초로 영어강독과 성서언어를 가프친 분이다. 훗날에는 주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당시 성서언어 교재는 영어로 되어 있었고 오직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대학졸업자들이 성서언어 수업에 참가했고 한 학급은 5~6명에 불과했다. 같은 총회에서 왕길지 목사는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7년 그는 평양신학교 이사겸 정교수로 선정되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는 학술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을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왕길지 목사는 그 첫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18~1921년까지 총13권을 발간하는 동안 편집책임을 맡았고 총 27회의 글을 기고했다. 신학지남은 수업시간이 짧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목회현장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공급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원칙에 철저하기로 소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솔직하고 마음이 여린 분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양신학교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목사될 사람들이 무슨 시위냐?”하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때 학생들은 민족정의를 무시하는 왕길지 목사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교내 시위를 일으켰다. 이 노교수는 학생들에게 “내가 잘못하였지요. 용서하여주세요”하고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5. 언어학자로서의 왕길지
왕길지 목사는 평생을 언어공부를 즐겼다. 왕길지 목사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던 방지일 목사는 그가 “16개 국어를 통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고전헬라어와 신약성서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의 성서언어와 고전어, 모국어인 독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서방 현대 언어, 그가 인도선교사시절 획득한 마라티어, 흰디오, 우르드어 등 인도의 방언,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후일 일본어도 독학을 하여 불편 없이 사용하였다. 왕길지 목사는 한국의 풍속과 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영문잡지 《코리아 뷰》(The Korea View)에 소개했다. 예를 들면 “여인의 지혜”와 “한국의 장사” (1905.2), “영리한 도둑”과 “호랑이보다 무서운 곳감”(1905,7), “나무꾼과 호랑이와 토끼”(1905, 12)등이 있다. 또 한국의 수수께끼들도 소개를 하고 있다(1906. 2).
그의 언어사용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평양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냈는데, 하루는 채플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원래 서책은 무족(無足)이라 자래(自來)하거니와 자거(自去)하지 못하는데 책이 없어졌지요.”
6. 성경개역작업과 음악사랑
한국 내에서 성경번역작업은 주로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20년에 호주선교사로는 최초로 왕길지 목사를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마지못해 한 듯한 인상도 있다. 1919년에 번역의 주축멤버였던 게일과 레널즈가 휴가를 떠났고, 한국인 번역위원들도 3.1운동이후 투옥되었기 때문에 개역을 진행할 인물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와 성서언어 양쪽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왕길지는 가장 적임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22년 9월 왕길지는 옥스퍼드 히브리어 사전(the Oxford Hebrew Lexicon)과 긴스버그(Ginsberg) 히브리어 구약성경 3부를 런던의 영국성서공회에 부탁했다. 그후 1923년부터 개역자회는 긴스버그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저본으로 사용했다. 1933-4년도에 왕길지는 아모스를 개정했다. 한편, 호주선교부의 프랭크 커닝햄(Frank Cunningham) 목사는 신약개정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신구약개정판은 1937년에 출판되었다.
왕길지 목사는 음악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서 반주 일을 돕기도 했고 평양신학교에서는 채플 때에 늘 본인이 풍금을 연주했다. 그는 루터의 음악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는 찬송가 편찬위원으로도 있었는데 그는 루터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내주는 강한 성이요”(찬송384장)를 번역했다.
7. 공교회조직의 지도자 왕길지
왕길지는 공교회 조직에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경남지역의 노회조직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왕길지 목사는 내한 이후에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할협력에 적극적인 역을 했다.
1911년 12월에 경상노회가 설비되었을 때 왕길지 목사는 초대회장이 되었고 그는 4차례 연속적으로 노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그는 노회 안에 혼재된 직제를 정비해서 목사, 장로, 영수, 집사로 통일시켰다. 1912년에는 한국장로교회가 총회를 구성하였고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다음 제 2차 총회에는 왕길지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 호주선교부는 4개의 장로교선교부 중에서 가장 연약한 조직이었지만 왕길지 목사가 노회장과 총회장으로 임명된 것은 아마도 미국 선교사들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14년 북장로교선교부가 경남에서 완전한 철수를 하는데도 왕길지 목사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또한 그는 1916년 6월에 경상노회를 남북노회로 나누자는 헌의 안을 발의해서 1916년 9월에 창립되는 경남노회의 초대회장이 되었고 1917년 12월까지 연속 3번의 노회장을 역임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2년부터 1920년까지 경남노회 총대로 총회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평양노회소속 총대로 총회에 참석했고 1925년부터 1934년까지는 총회총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에 다시 평양노회 총대로 참석했다.
1938년 왕길지 목사는 70세가 되어 31년간 봉직했던 평양신학교와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아그네스 엥겔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왕길지 목사의 아들 프랭크 엥겔(Frank Engel)은 1911년 한국에서 태어났고 평양에서 성장했다. 그는 멜버른 대학을 졸업하고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호주와 아시아의 유명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1950년대 초반에 호주 기독학생운동(SCM)의 상임총무를 역임했고, 1959-61년까지 세계기독학생연맹의(WSCF) 동아시아총무를 역임했다. 그리고 호주교회협의회의 총무와 의장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멜본신학대학(MCD)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