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5)
휴 커를 의사(1871. 2. 8 – 1943. 3. 10)
한국명: 거열휴(巨烈烋) 의사(부산 1902-5; 진주 1905-15)
휴 커를(사진 우 하)은 아일랜드 안드림(Atrim) 칸라우(Carnlough)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벨파스트에 있는 로얄 대학(the Royal University)에 입학하여 퀸즈 칼리지(Queen’s College)의 학생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커를에게 목회자가 될 것을 소망했기 때문에 그는 2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목회의 소명이 없는 것을 확신하고, 의학을 공부하여 1897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1년 반 동안 개업의사로 지냈고, 1899년에 호주 빅토리아로 와서 키아브람(Kyabram)에서 15개월간, 루더글랜(Rutherglen)에서 2년간 의사 활동을 하였다. 그의 첫 번째 아내 앤 재스빗(Anne Nesbitt)은 그곳에서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902년 해외선교위원회 모임은 커를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선교사로 안수를 받은 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루더글랜의 감리교회에 출석하던 에셀 앤스티(Ethel Anstey)와 결혼하였다.
1902년 5월 19일 커를 부부는 부산에 도착하였다. 커를은 1905년까지 초량과 부산진에서 진료활동을 하였다. 커를은 1904년 4월에 동래와 수영에 있는 교회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나 그는 마땅히 진주로 가서 그곳에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 당시 진주가 경상남도의 수도였고, 부산에는 이미 미국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4월 18일 해외선교위원회는 커를이 진주로 이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해 9월 초, 커를은 진주에 가서 선교지부를 세울 땅과 임시 거처를 위한 한국 집을 구입하였다. 커를과 그 가족 그리고 그의 조사는 1905년 10월 20일 밤 9시 30분에 춥고 지친 상태로 진주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초기부터 어린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일에 세 번 예배를 드렸는데 평균 20명의 남자와 7명의 여자가 출석했다. 그는 거리에서 설교를 했고 집에서는 신앙서적들을 팔았다. 박성애 조사와 그의 부인은 유능하게 그를 도왔는데, 그 부인은 커를 부인과 함께 한국인 여성들을 위해 일했다. 커를은 초기에 의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나 몇 달이 지나 그의 집에 마련한 시약소에서 오후를 보내며 의료활동을 하였다.
커를 의사는 1905년부터 부인의 질병으로 진주를 떠나야 하는 1915년까지 진주 선교지부의 계획자이며, 건설자이며, 격려자였다. 그는 선교사 주택들, 학교들, 병원 그리고 초기 교회의 건축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감독했다. 그는 교육 프로그램을 감독과 학교들의 설립을 책임졌다.
커를은 진주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다음 10년 동안 전 지역에서 교회들의 성장을 지도하고 보살폈다. 커를은 후에 도착한 라이얼 목사와 다른 목사들의 한국어 능력이 향상 되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면서 책임을 분담하였다. 커를은 진주에서 열리는 연례 사경회에서 가르쳤고 부산과 대구의 사경회에서도 가르쳤다. 그는 장로교 독노회(1907)와 총회(1912)의 총대로서 한국장로교회 형성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커를의 의료선교는 처음에 자기 집에서 시작되었고, 1914년 11월 새 병원이 완공되기 이전까지는 그 건물의 입구에 세운 임시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는 오랜 기간 힘들게 수고하여 세운 배돈병원(倍敦病院: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에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마지막 3년의 기간 동안 그는 매년 3개월씩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다. 그가 다룬 과목은 산과(産科), 안과, 그 외에 이비인후 관련 질병에 관한 것들이었다.
휴 커를은 멜번으로 돌아간 후 20년 동안 해외선교위원회의 위원으로 봉사하였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