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37)
프란시스 윌리엄 커닝햄 목사 (1887. 12.19-1981. 8.18)
한국명: 권임함(權任咸) 목사, 진주 1913-41; 거창 1923-41; 부산 1947-50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커닝햄은 킬모어(Kilmore)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육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오몬드 칼리지에 들어왔고, 1908년에 석사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와 알렌은 함께 신학교에 입학해서 월등하게 공부했고 졸업시험에서 함께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1912년 11월 7일에 말번(Malvern)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같은 달, 선교협의회(The Mission Council)는 커닝햄을 진주로 임명했다. 그와 알렌은 1913년 2월 26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 이듬해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보냈고 진주의 주변 지역들과 선배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선교 방법에 친숙해지려고 노력했다. 1917년 11월 16일 그는 일본에서 일했던 미국인 선교사 캐서린 트리쉬만(Catherine Trieschmann)과 결혼했다.
1914년부터 그는 점점 더 많은 수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1923년까지 의령, 삼가, 산청 그리고 진주 서부 지역들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다. 1923년 이후부터는 그는 이런 교회들 뿐만이 아니라 비록 진주에 거처를 두고 있었지만, 거창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피는 책임도 맡게 되었다. 이 기간의 후반기에는 양쪽 지역에서 순회 전도하는 한국인 목사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참고로 진주에서 커닝햄이 감독하던 한국인 권서들의 명단과 그 기간은 다음과 같다. 문충원(1919~20), 박규석(1913~21), 박기윤(1914~20), 박학선(1924~26), 오형선(1923~24?), 이만균(1923~25, 28~29, 32, 34~37), 이봉은(1921~25), 황성욱(1932, 34~35), 황원석( 1924~25, 29~32)>.
항상 탁월한 학생인 커닝햄은 한국어에 대해 비상하게 능숙하였다. 그래서 그는 1928년에서 1937년까지 성서개정과 다른 문필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학자로서 또한 선생으로서 남자성경학원의 원장으로 섬겼고, 엥겔 박사가 은퇴한 이후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을 가르쳤다(1938년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문제로 문을 닫게 된다).
그는 1941년에 대부분의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을 당하게 된다.
프랭크 커닝행은 일본 전쟁이 끝나고 1947년 6월 18일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선교회 의장으로서 그 이후 좌절의 3년간을 섬겼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좌절했다. 그는 호주의 아내와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수 년을 살아야 했다. 그는 서점에 넘치는 사회주의 서적들에 대처하기 위해 기독교문서의 출판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선교회는 인력과 재정이 매우 부족했다.
선교사들이 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경남노회는 근본주의자들과 판결하는 지지자들, 고려신학교의 직원들, 다른 한편 친일행동으로 비난 받는 사람들 사이에 파벌로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다수는 양쪽의 중간에 있었다.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거듭 커닝햄을 교수로 초빙하였다<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1898~1950)는 1936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사임했을 때 커닝햄의 초청으로 부산에서 빈민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세웠고, 호주선교회의 지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 선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부담이 그를 초빙에 응할 수 없게 했다. 커닝햄은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한 노인이 소유한 좁고 불편한 2층 방에서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1950년 9월에 한국에서 철수 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