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9)
앤드류 아담슨 목사 (1860-1915. 8. 3)
한국명: 손안로(孫安路) 목사, 초량 1894-1911; 마산 1911-14
존 맥케이 목사가 한국을 떠난 후 장로교청년연합회(Presbyterian Fellowship Union)와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FMC)는 영국에서 아담슨 목사를 후임자로 선발하였다. 아담슨은 이전에 영국성서공회 직원으로 중국에서 5년 동안(1884-1889) 근무한 경험이 있었고, 부인이 천연두와 장티푸스에 걸리자 영국으로 돌아왔다. 아담슨 목사 부부와 두 딸은 1894년 5월 20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맥케이 목사가 초량에서 건축해 놓은 작은 집에서 살았고, 맥케이 목사가 구입해 놓은 벽돌로 큰 집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3개월이 지나 그는 초량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는 여선교연합회(PWMU)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을 감독할 권한을 부여 받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2월 경, 아담슨과 PWMU 선교사들 사이에는 그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된 징후들이 나타났고 있었다. 양자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지속되었고, 선교사들의 에너지는 흩어지고, 수 년 동안 선교 활동은 무능해졌다.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 여선교사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웠고, 그들이 교회와 교육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점을 인정하였다.
아담슨 부인 일라이저(Eliza)는 1895년 11월 27일 간 경변(cirrhosis)으로 사망했다. 아담슨은 이듬해 11월 19일 첫 번 부인의 가까운 친구였던 카밀라 파인 양(Miss Camilla Pain)과 상해에서 재혼했다.
1897년 초, 아담슨 목사는 교인들의 출석수가 증가했고, 초량에 예배당을 건축할 계획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두 명의 첫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같은 해 그는 남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1898년 2월 13일에 그는 3명의 여자와 1명의 남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후 15년 동안 아담슨과 그의 조사들은 울산, 양산, 함안, 의령, 고성, 칠함, 거제도, 진해에서 교회를 설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아담슨은 초량과 마산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초량의 남학교, 마산의 창신 학교를 시작하는데 개척자의 역할을 했다.
그는 1913년 말경 심각한 질병에 걸려 1914년 2월에 선교사직에서 은퇴하도록 강력하게 권고를 받았다. 그는 멜번으로 왔다가 다시 영국으로 가서 일 년 뒤에 사망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