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91)
제임스 스튜아트 (짐) 하젤딘 목사(1931. 6. 26)
한국명: 한성진 목사, 부산 1957-60; 진주 1960-68

짐 하젤딘은 1931년 6월 26일 빅토리아 루판엽(Rupanyup)에서 태어났다. 그는 질롱에서 고든(Gordon)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전기공학의 디플로마를 받았고, 1956년에 오몬드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는 그해 12원에 호바트 출신의 엘리자베스 브레들리(Bradley)와 결혼했다.
그들은 1954년에 선교사 후보로 선택되었고, 처음에 뉴헤브리데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긴급한 상황으로 인해 그 대신 한국에 가도록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1957년 4월 4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바로 서울의 사우어 박사의 언어학교(Dr Sauer’s Language School)에 가서 공부했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배리 콜빈이 호주로 귀국하자, 짐은 부산에서 비즈니스 매니저의 책임을 맡았고 그의 언어 공부는 중단되었다. 그 일은 경상남도의 교회 상황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의 기회를 제공했다. 부산에서는 고려파 교회가 부르스 헌트 목사(Rev. Bruce Hunt)와 미국의 독립성경장로교회의 강한 지원을 받으며 형성되어있었다. 짐 스터키 목사는 1958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진주에서 하젤딘 목사의 행정책임을 덜어줌으로써 그가 미래 사역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60년 12월 짐과 베스는 선교회를 재건할 목적으로 진주로 갔다. 병원과 모든 거주지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 곳을 제외하고 다 파괴된 상태였다. 그들은 진주의 중심부에 작은 한국인 집을 구입했고, (첫선교사 휴 커를이 1905년에 그랬던 것 처럼) 그들의 가옥이 봉래동에 건축되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과거의 진주 선교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크게 용기를 얻어 그에게 지원의 편지를 보냈다. 짐은 차고가 딸린 진료소 건물을 짓는 일을 감독했고, 나중에 두 번째 건물은 데스 닐 목사가 감독했다. 한 부대 막사를 진주로 이동해서 컨퍼런스 룸으로 개조했다. 다용도의 건물이 노회성경학교로 건축되었다.

짐은 시골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진주노회에서 그의 주된 일은 농촌교회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것이고 종종 원로 목사 김석진 혹은 박창근의 회합에 참여했고, 평신도 지도자들과 예비 지도자들, 청년과 전도사들의 지도력 훈련대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이창식 집사는 진주에 기독교서점을 설립했고, 정기적인 노회회보를 출판했다. 그는 항상 교회 분열들을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치권력이나 위원회의 이권을 위한 분쟁을 참지 못했다. 그는 보이 스카우트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역의 상급반 스카우트와 함께 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세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중 두 개는 교회가 전혀 없었던 마을들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충무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데 관계했다. 그는 진주 노회지역 전역에 개척 복음 전도활동을 발전시키면서 남장로교선교회와 협력했다.
짐은 다양한 교단의 목사와 장로들이 친교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던 아가패 그룹에 열심히 참석했고, 교단들 사이의 분열에도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연대를 유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활동 때문에 종종 집에서 멀리 떠나 있어야 했고, 베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세 아들을 기르는 일로 바빴다. 교인들은 그들에게 사랑의 정신으로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친절함은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짐과 베스로부터 항상 흘러나오는 인자함과 따뜻함에 대한 반영이기도 했을 것이다.
호주로 귀국한 후 짐은 호주연합교회의 형성을 준비하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와 베스는 에추카(Echuca), 푸츠크래이, 맨스필드(Mansfield), 그리고 캐슬매인(Castlemaine)에서 교회들을 섬겼다. 짐은 또한 멜번의 서쪽 근교 지역들의 공장들에서 에큐메니칼 체플린으로 일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