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15)
유대인의 호주 이민 역사
호주에는 약 13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주로 시드니와 멜번을 중심으로 이민자로 살고 있는데, 숫자적인 면에서는 한인 이민자와 비슷 하지만 그들이 차지 하는 호주 내 위상은 사뭇 우리의 수준과는 확연히 다른 듯하다. 우리의 이민 역사가 50여년 남짓 하다면, 유대인의 호주 이민 역사는 영국인들이 처음 호주에 NSW주에 발을 들여 놓은 싯점과 같이 하고 있다. 연대로 보면 1788년 처음 영국으로 부터 죄인을 실은 배가 호주에 도착 하면서 부터이다. 이 때 유대인 죄수가 적어도 8명에서 많게는 14명 정도 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 죄수 유대인들은 나중에 형기를 마치고 영국이나 유럽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착한 사람들은 신대륙 호주의 역사를 써나게 된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대륙의 유대인들이 유럽과 구 소련 지역에서 변두리 소수민족으로 수 없는 편견과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때로 심한 억압과 학대와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역사에 비일 비재하게 쓰여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신대륙의 주인의식이 유대인에게 심겨지게 되었다.
역사학자 W.D 루빈스타인은 “비로소 호주에서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평가 한다. 유대인들은 그로부터 228년의 세월을 지나며, 사회의 곳곳에 진출해 있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 뿐 아니라, 사회 일원으로 더 나아가 각 분야에서 그들의 우수성을 국가 발전에 보태는 책임을 다하는 국민으로 살고 있다. NSW주에 사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19세기 말에 이르기 까지 영어를 구사하는 영국 출신의 죄인들이거나 이민자, 또는 호주 출신 후손들이다. 이런 상황은 그들의 종교와 상관없이 다른 인종들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뤄가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각 주의 유대인 정착
1820년도까지 수 백명 정도의 남성 유대인들이 NSW주에서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그들이 유대인들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은 1817년 ‘시드니 유대인 매장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부터 라고 추정한다. 1855년에 처음으로 시내의 York Street에 ‘목적 건축 회당(purpose-built synagogue in Australia)’이 설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1840년대에 이르러 타스마니아의 수도 Hobart, Launceston, 또 빅토리아 주의 멜번과 아델레이드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금맥을 찿는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1848년에 약200여명이던 유대인 인구는 1861년에는 3000명으로 늘어나는 급속적인 성장을 이뤘다. 그 후 퀸스랜드가 독립적인 주가 되면서 시드니로부터 브리스번으로 간 유대인들은 1886년에 그곳에 회당을 설립하게 되었다. 서부 호주는 1887년 Fremantle에 건설되고, 1897년에 퍼스에 회당이 건립되었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도심보다는 주변 시골에 더 많은 인구가 살았는데, Goulburn, Maitland, Grafton 등지와 나중에 Broken Hill지역에도 살게 되었다. 현재는 그들의 공동묘지나 사용하지 않는 회당의 잔재만 남아 있는 정도이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유형으로 인해 회당이나 유대인 식품등을 구할 수 있는 시설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초기 정착자들의 사회 참여와 공헌
초기 정착자들은 앵글로-유대인들로 중산층의 이민자의 삶의 패턴을 호주 사회에 뿌리내리는 계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 성공회의 양식을 따라 회당을 세웠고, 추후, The Great Synagogue는 1878년 시드니의 역사적인 지형을 따라 지어져 봉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NSW주의 사회, 경제, 시민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사울 사무엘경은 1860년대의 NSW 주 정부 서기였고, 나중에 런던의 특수 정보 기관 수장을 역임하였다. 1886년에 쥴리안 살로몬 경은 NSW의 대법관이 되었고, 나중에 의회에서 낙마하게되었다. 1917년에는 의회에서 양대 정당의 의회 연설자들이 유대인이어서 대속죄일과 겹치는 바람에 입법 의회가 문을 닫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의 유대인의 인구는 전체의 0.4% 밖에 되지 않는 소수였다.
새로운 유입과 증가
이 기간에 구 소련과 폴란드의 포그롬으로 부터 유대인들이 방면되면서 호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다른 언어인 이디쉬를 말했고, 그들의 복장과 삶의 모양이 영국이나 유럽의 관습과는 무척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기존의 유대 사회는 새로 유입된 유대이민자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속히 그들의 삶의 패턴과 동일시 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실제 그들의 삶은 빠르게 호주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18년 동안 전체 인구의 9.2% 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들은 13%에 달하는 유대인 인구가 군대에 지원하였고, 57명의 유대인 병사들이 ANZACS 전쟁의 Gallipoli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죤 모나쉬 경은 유럽에 파견된 최고 군사령관이었고, 전쟁 후에, 호주 시온주의자 Federation의 수장이 되었다. 폴란드의 포르롬으로 부터 방면된 유대인들이 1920년대에 도착 하게 되었고, 1933년까지, NSW주의 유대인 숫자가 10,309명으로 증가 했지만, 국제결혼과 사회속의 혼성 됨으로, 오히려 0.36% 감소하는 추세가 되었다. 1933년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바뀌게 되었는데, 1938년 이래 몇 차례의 대형 이민으로 인구가 4배나 증가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전 호주는 나치를 피한 피난민으로 오스트리아로 부터 7-8000명을 수용하게 되었다. 1939년 이후에 약 5000명정도가 호주에 유입되었고, 이들은 ‘39년사람들’이라는 별칭의 유대인들이 되었다. 1940년에, 2000여명이 영국정부의 유명한 Dunera호를 타고 독일 나치의 피난민으로 영국으로 도망한 유대인들이 호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1946년 부터 1961년 사이의 유대인 유입
가장 큰 유대인 유입은 1946년 전쟁 후로 부터 1961년에 이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이민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 1946년과 1954년 사이에 17000명이 유럽과 샹하이로부터 유입되었다. 그 후 10000여명이 헝가리의 난민과 이집트, 수에즈운하 위기등의 국제적 사건들로 1933년의 23000명의 숫자에서 61년에 이르기 까지 60000명으로 급속도로 증가 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구 소련의 붕괴로 인해 소련과 남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부터 1961과 1981년 사이에 유입된 인구가 2007년 통계로 12만명에 이르고 2016년 현재 13만명이 넘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호주의 유명 유대인
초기 정착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유명한 이름들이 있는데, 죤 해리스는 1789년에 첫 호주 경찰관이 되었고, 에스터 아브라함은 총독인 죠지 죤스톤과 결혼 하였고 첫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에드워드 데이비스는 Maitland의 ‘유대소년-Bushranger’로 불리는 악동으로 1840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버넷 레비는 초기 호주 정착자로 후에 호주 최초의 극장인 ‘Theatre Royal를 지은 사람이다.
Isaac Issacs 경은 호주 태생 첫 총독(1931-36)을 지냈고, 젤만 코웬도 총독(1977-82)을 지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죤 모나쉬경은 유럽에 1차 세계대전에 파견된 호주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라 멜번에 모나쉬 대학이 설립 되었다. 그리고 고든 사무엘 이 총독을 지냈고, 현재의 대법관인 제임스 스피젤맨 역시 유대인 이다.
유대인들은 정치, 경제, 의료, 상공, , 문화, 법조계등 다양한 사회 전반의 영역에 참여하고 예술과 과학, 학문과 스포츠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 경제적 사회망에서 모든 분야에서 동등하게 그들의 권리와 책임을 행사 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데, 수 천년의 역사 안에 그들에게는 사회적 불 평등과 종교적 편견이 지속적으로 행사 되었다.
유일한 호주의 유대인 상황
특별히 호주는 영국으로 부터 유입된 초기 정착자들안에 유대인 죄수들이 포함됨으로 그들의 새로운 삶의 패턴이 세계 다른 지역과 다른 특별한 역사가 쓰여 지게 되었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기반을 공동체적인 구조 안에 살게 되었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와 유대주의는 지금 이 사회 안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제공하고 있다. 종교적인 역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 정치적인 역할을 정부 대신 감당하는 Jewish Board of Deputies 는 유대인들의 네트워크와 교육, 또한 호주 정부와 정치 외교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성장 하게 되었다. 우리 한인 기독교인 들도 유대인들이 호주에서 정착하며 보여준 대외적 역할과 모범을 배우며, 또한 기독인들로서의 좋은 삶의 향기를 사회 속에 나타내야 하겠다. 어려움 가운데에도 자신들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사회 속에서 인정 받는 우리와 다음 세대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원일 목사 (Christians for Israel – National Director. Korea)
베다니 사역 본부 대표, 키비 호주 대표(문화 교류학 박사 과정 중)
0410-430-677, wijung@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