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자들
저는 지난 달 ‘르네상스 이야기’의 말미에서 7명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추려서 그들의 사상과 역할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성을 억압해 왔던 폭력적 정치와 종교로 부터 인간의 본성을 찾아 인간을 회복시켜 보려고 노력했던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군주론’을 통하여 중세를 극복해 내려는 저항정신과 정치사상을 펼친 마키아벨리, 자신의 생명 까지도 버리면서 정치와 종교의 유착관계를 끊어버리려고 노력했던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하면서 ‘신기관’을 통하여 지난날 인간들이 지녀왔던 4가지 편견의 우상들을 타파하자고 외친 프랜시스 베이컨,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민주적 사회계약론을 주창했던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마스 홉스, 관용과 포용, 다양성과 너그러움을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찬양했던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 그리고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가운데 포함해서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인문주의자가 못되는 것도 아니고, 인문주의자라고해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이었던 사람들을 흔히 Christian Humanist라고 부릅니다.
이 시간은 루터의 95개조 논박문이 나오기 이전에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인문주의자들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토마스 모어는 앞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기에 중복이 됩니다만 다른 두 인물은 처음 소개하는 인문주의자들입니다.
1)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15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아주 짧게 살다간 인문주의자로써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다같이 능통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 철학과 유대교 사상을 하나로 묶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로써는 드물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흔히 피코는 한 시대의 반항아로써 중세시대와의 단절을 부르짖으면서 자유사상가로서 기독교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불리웁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간의 존엄’(De hominis dignitate)이 있는데 이 책은 1486년 로마에서 열렸던 ‘세계철학회의’에서 발표했던 주제 강연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Oratio de huminis dignitate)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이 모임은 피코 자신이 자비를 들여 당시 자신이 알고 있는 유럽 지역의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루어진 회의였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피코의 이 연설문을 ‘르네상스 인본주의 선언서’라고 높이 평가하며 동시에 이후에 나온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Discours de la method)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과 더불어 이 연설을 초기 르네상스 사상사의 방향을 결정한 문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연설은 16세기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그 후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의 연설문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학과 신학 사이를 조화시켜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보수주의적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보주의적 철학 사상을 하나로 묶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지닌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열린 마음과 긍정적 자세와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피코는 종교재판으로 학문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대 속에서도 편협된 진리관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진리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리한 ‘명제집’(Conclusiones)은 종교와 철학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지닌 모든 지성들이 균형잡히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어떤 통일성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연설에서 기독교 신학과 다른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신학들 사이에서 평화를 모색하려고 했던 피코의 이런 자세를 ‘신학적 평화’(pax theologica)를 향한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또한 일반 철학과 기독교신학 사이에서의 긴장관계 또한 넘어서 해석의 차이를 극복해 내려는 노력을 ‘철학적 평화’(pax philosophic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24살 밖에 않되었던 젊은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입니다.
둘째로 그의 연설문에 나타난 기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입니다. 그는 중세시대의 일반적 인간관에 반대했습니다. 그 시대는 인간을 오직 죄인으로만 보고 인간의 타락, 범죄, 죄성, 무가치성, 상실된 존엄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인간의 비참함’(miseria hominis)에다만 시각을 맞추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코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인간’(ima go Dei)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그리스도의 화육:化肉 Incarnation)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인간 예수의 구속사를 덧붙입니다. 피코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써 죄인이라고 규정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이 만드신 또 하나의 우주적 신비를 지닌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피코는 인간이란 하느님이 만드신 하나의 작은 우주(小宇宙, microcosmos)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우주 만큼의 신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inis)을 주장한 근거는 이렇듯 성서를 다시 읽고 달리 해석해 보려는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다 한 가지만 보고 그 방향으로만 달려 갈 때도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창조적인 안목입니다. 결국 이런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접근 태도가 훗날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이 부분은 교황청 한국대사와 서강대학 교수를 지냈던 성염박사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학과 르네상스적 배경’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2)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에서 태어 낳지만 독일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며 저술 활동을 폭넓게 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였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로 서품은 받았지만 한 번도 교구신부로는 활동을 한 적이 없었으며 짧은 기간 수도원에서 산 적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걸쳐 교회의 부정과 부패, 수도원의 잘못된 제도와 수도사들의 그릇된 생활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성직자들의 권한남용을 비판하고 교황의 권능을 부정하면서 그들의 무능과 부패를 통렬하게 꾸짖었습니다. 어학에 남다른 천재성을 지녔던 그는 옥스포드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고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다시 중세 그리스어로 번역해 냈습니다. 루터가 95개조 논박문을 내기 전해인 1516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성경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성서가 전 세계의 말로 번역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든지, 시골의 농부들과 베짜는 아낙네들과 여행객들 까지도, 모두 자기들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이상규의 역사 이야기 33, 에라스무스2편) 오직 라틴어만이 교회의 성경이라고 여겼던 교황청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었습니다.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도 교회와 교황과 성직자들의 성서 독점권에 대해 저항하면서 누구든지 직접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해야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 해석 할 수 있는 권한도 지니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모르고, 모르는 사람은 이해 할 수가 없기에, 그 뜻을 풀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로써 불후의 명작 ‘우신예찬’(Stultitae Laus, 영어로는 In Praise of Folly)을 썼습니다. 당대의 친구 토마스 모어를 찾아 영국을 방문 중에 모어의 집에서 집필한 이 책은 풍자와 위트와 유머의 형식으로 쓰여 진 책입니다. 인간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어리석음, 특별히 교회와 성직자들의 바보 같은 짓거리들을 비꼬면서 ‘바보들은 그들의 바보됨을 행복한 것’이라고 여긴다고 비꼽니다. 그는 여기에서 오히려 공부 많이 한 사람들과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어리석게 보이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분별력이 있고 인생의 예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왕후귀족이나 학자와 성직자들 보다는 훨씬 더 나은 인생을 산다고 하면서 자신이 지닌 물질과 지식과 종교적 권한과 신앙심이 자기를 행복하게 한다고 여기는 그 시대의 현자들이야 말로 ‘진짜 바보들’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찮은 일을 가지고 심각한 일인 것 처럼 다루는 자들 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Ut enim nihil nugacius quam seria nugatorie trctare).
3)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잉글랜드의 법률가요, 정치가이며, 사상가였던 그는 대법관 까지 지낸 고위 공직자였으며 귀족이었으나 헨리 8세와의 신앙적 및 신학적 충돌과 대립으로 끝내 반역죄로 몰려 참수형을 당한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초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윌리암 틴데일의 성경 번역과 보급을 정죄하면서 그를 ‘모든 이단들의 우두머리’라고까지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수적이며 스콜라철학에 깊이 침잠된 가톨릭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하원 의원과 의장을 지냈고 외교관, 장관, 대법관을 고루 섭렵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터졌습니다. 모어는 아서왕이 죽은 후 동생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한 다음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내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고하자 이를 반대했습니다. 모어는 만약 헨리가 재혼을 하려면 반드시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재혼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 이혼과 재혼 문제가 불씨가 되어 마침내 헨리 8세는 ‘잉글래드의 국왕은 잉글랜드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선언하고 잉글랜드 교회, 곧 앵글리칸 쳐치(Anglican Church)를 만들게 됩니다.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토마스 모어는 도저히 이를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위 공직자인 그는 끝내 새로운 왕비로 등극하는 앤 볼린의 대관식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는 1535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런던 타워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토마스 모어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는 왕의 신하이기 전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세속적 지도자는 결코 영적 지도자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참수를 당하기 직전 자기 수염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수염이야 무슨 반역죄를 지었겠소? 그러니 정확하게 목만 쳐 주시오’라고 형 집행관에게 말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토마스 모어의 대표작으로는 ‘유토피아’(Utopia)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친구 에라스무스와 그가 쓴 ‘우신예찬’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일체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적 공상 세계를 그렸습니다. ‘Utopia’–‘이 세상 그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꿈의 나라’를 그려 본 것입니다. 그는 자연법 사상을 추구했고 자연적 명령에 따라 자연적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가장 아름답고 평등하고 자유스런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도 토마스 모어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Renaissance Humanist)로 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어떠한 정치적 압력이나 종교적 권위에도 부당하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의롭게 죽는 자세가 훗날 역사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크다는 점 때문이고, 둘째는 이상적 인류 공동체란 반드시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는 식의 종교적 교훈을 거부하고 이 세상 그 어디에선가 우리 인간들이 능히 만들 수 있고 또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실현 가능한 세계라고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교훈
이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살펴본 16세기 종교개혁에 앞선 인문주의자들과 시간상 넉넉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인문학적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부를수 있는 츠윙글리나 붓쳐 등등의 사람들이 그후 이어진 시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교훈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이들의 사상이 교회를 포함한 종교와 사상, 철학과 역사, 정치와 경제 등등 우리 앞에 놓여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개혁적 사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끊임없는 저항정신, 곧 protestant 정신입니다. protestantism입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루터교회니, 개혁교회(장로교회)니, 감리교회니, 메노나이트니, 아나뱁티스트니 등등 여러가지로 불리웁니다만 통일된 개념으로는 ‘개혁교회’ ‘개신교회’ 즉 Protestant Church입니다. 이는 저항하는 교회, 항의하고, 데모하면서, No라고 부르짖는 교회입니다. 반대하고 항의하지 않는 교회는 개신교회도 아니고 개혁교회도 아닙니다. Reformed Church, Protestant Church가 아닙니다. 개신교회는 날마다 개신되어야하고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회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학문세계를 포함한 모든 정신 세계와 현실 세계에 다 해당됩니다. 철학, 문학, 예술, 교육, 심리학은 물론이고 물리학이나 수학 등 일체의 자연과학적 이론과 의학, 농학, 경제학, 정치학 등 모든 응용과학 전반에 걸쳐 No라고 부르짖으면서 부정과 의심, 항거와 반대를 하는 것은 그들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뉴톤과 대립함으로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아인슈타인과 대립함으로 스티븐 호킹이 나옵니다. 고전 경제학이나 플라톤의 정치학 이론들은 오래전에 이미 넘어섰고, 의학도, 교육학도, 심리학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제일 변하지 않고 제일 느리게 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판정신이 없이는 아무 것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비판정신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비판정신은 지성의 상징입니다. 모든 비판정신의 저변에는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과 반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관용과 너그러움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맞는 것입니다’ 교파주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꼭 똑같아야만 마음이 놓이고 안정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전체주의적 사고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아름답게 보고 다른 것들 때문에 풍성하고 넉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꽃들과 나무와 짐승들, 또 제 각기 다른 얼굴색과 언어와 지방과 문화와 전통들이 있는 것 처럼, 정치도 경제도, 종교와 종파도 다 나름대로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전체주의나 공산체제 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군인들이 줄맞추어 행진을 하거나 김일성광장에 나와서 통일된 카드섹션을 하는 것을 아름답게 보아서는 않됩니다. 통일성 보다는 다양성이 아름답습니다. 관용과 너그러움과 똘레랑스에는 균형과 조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성과 영성, 이성과 감성, 종교와 과학, 거룩성과 세속성의 조화가 따라옵니다.
셋째는 평등주의입니다. 르네상스와 16세기 교회개혁은 일체의 차별과 구분을 넘어서자는 생각을 바탕으로하고 있습니다. 왕과 백성, 영주와 농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자와 여자,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 성직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던 모든 제도적, 사회적, 종교적 불의를 청산하려는 의도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길게 이야기를 하려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우리 교계는 여전히 만인 사제설을 이야기 하면서도 목사들의 강단 독점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목사들은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어느 날에나 신부가 되고 목사와 장로와 총회장이 될 수 있을지 요원하기 그지 없습니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아직 중세시대가 한창입니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은 꿈도 못 꾸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와 지난날의 종교개혁에서 돈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모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개혁이란 결국 자기반성이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들을 벗어 던지고 포기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해 져야하고 부와는 거리를 두어야만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교회만이 존경을 받습니다. 스스로 무력해지고 가난해지지 아니하면 절대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쳐야 합니다. 정교유착, 금권과 교회의 유착, 이 두 가지를 끊어내는 것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기본정신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인문학교실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인문학적시각에서 보는 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의 과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