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1) 중에서 _ 10월 30일자
종교개혁 기념일에 떠오르는 몇 가지 잡문들

내일 10월 31일은 개신교에서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당시 비텐베르크성교회 (Wittenberg Castle Church) 정문에 95개조의 논박문을 게시하여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 (Disputation on the Power of Indulgences)을 제안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부, 한 수도원의 수도사, 한 작은 대학의 교수가 ‘면죄부’ (Indulgence)에 대한 문제 제기로 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은 불길이 당겨졌습니다. 20여년 전 방문했던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Lutherstadt Wittenberg)는 수년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면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 때 비텐베르크성교회 정문에 지금은 동판으로 새겨져 있는 라틴어 95개조가 눈에 선하게 남아있습니다.
역사는 흘러 503년이 되었습니다. 3년 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하면서 떠들석하게 여러가지 행사를 많이 하더니 그 후엔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오늘 잡기장은 지나날 몇 개의 잡기장노트에 써놓았던 조각글들 중에서 교회갱신에 대한 글들을 다시 한번 들춰 보면서 저 자신과 오늘의 교회를 반성해 보려고 합니다.
1)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반성과 성찰이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살피고 새롭게 해 나가는 것이다.
2) 오늘날 가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교회다. 교회는 가장 철저한 무신론 집단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입으로만 믿을 뿐, 실제로는 돈을 숭배하는 모임이다. (John Cobb의 ‘영적파산’에서)
3) 교회가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간단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 교회는 어서 권력이나 금력이 없어져서 가난하게 되면 비로소 세상으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팀 켈러목사, 뉴욕 맨하탄 건물 없는 교회 담임목사)
4) 그 동안 교회는 마치 자기들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있는양 말해왔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는 과학이 더 잘 알고, 인간의 심성은 심리학이 더 잘 알고, 정치와 경제는 사회과학이 더 잘 알고, 문화와 예술은 미학이 더 잘 안다. 그러니 기독교는 겸손해야한다. ‘우리는 우주와 인간과 역사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한다. ‘과학이 발견해낸 최대의 공적은 우리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오늘날 교회도 바로 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겸손이 정답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에서)
5) 행복한 크리스챤이란 없다. 없어야 맞다.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한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6) 1948년 8월 15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자기들 땅을 떠나 철수하는 영국군대와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만 남겨두고 교회는 가지고 가시오’ 간디가 한 말이다.
7) 고 김수환 추기경의 별명은 ‘바보 김수환’이었다. 그는 평소 늘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인간도 하느님 나라에 갈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 주변엔 천당 못갈 것 같은 교인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다들 천국은 따놓은 당상들 처럼 말한다. ‘예수만 믿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천당은 가게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어디 김 추기경은 그런 교리를 몰라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8)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일까?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일까?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일까? 다 아니다! 인생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9)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 중세의 교만한 교회는 무너졌고, 근세의 교만한 이성도 무너졌고, 계몽주의의 교만한 인간도 무너졌다. 이 시대를 주름잡는 교만한 과학과 자본도 곧 무너질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하느님이 무너트리시거나, 그리 아니하셔도 스스로 자빠지게 되어있다.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10) 지난날 우파는 종교를 오도했고, 좌파는 종교를 폐기했다.
11) 종교는 지난날 죄를 많이 지었고 역사에 비극과 불행을 초래하는데 크게 앞장서 왔다. 기독교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그것은 교회의 잘못이지 예수의 잘못은 아니니까 겁내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12) 오늘날 기독교는 여자들의 노출된 가슴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이 극심한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 낙태문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지배와 제 3세계의 아픔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13) 몇 년 전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다. 한국 개신교 목회자수 – 14만 483명, 불교 성직자수 – 4만 6905명, 천주교 성직자수 – 1만 5918명, 대한 경신연합회 (무당연합회)와 한국역술인협회 회원수 – 약 30만.
14) 오늘날 사탄은 별로 할일이 없게 되었다. 과거 사탄이 하던 일들은 거의 교회가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여기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시고 어서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자들이 교회엔 많이 있다. 예수와 함께 살기엔 불편한 자들이 성직자가 되어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15) 오늘날 기독교는 겨우 출애굽을 시켜놓았더니 다시 제 발로 이집트의 끓고있는 고기 가마 곁으로 돌아가 버렸다.
16) 나는 그리스도교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드린다.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 어느 노신학자의 고백, 한도명, 신학비평사, 2010)
17) 한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대형교회들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으로 위장한 자본을 기초로 하고있다. 이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고 있다. 기독교의 진짜 문제는 탐욕과 이기심과 특권의식이다.
18) 기독교가 교리화 되고, 말을 많이 하고, 설명과 변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전혀 기독교다운 태도가 아니다. 기독교는 애초부터 말을 많이 하는 조직이 아니라 말없이, 묵묵히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였는데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는 걸 보니 참 수상하다.
19) 신학자들은 신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신은 누구인가?’ 잘 설명하기가 쉽질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신이 아닌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돈은 신이 아니다’ ‘권력은 신이 아니다’ ‘명예는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20) 시장과 종교에는 공통점이 많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 ‘시장은 틀리지 않는다’ 이런 말은 ‘교회에 맡기십시오’ ‘교회는 절대 잘못이 없습니다’ 하는 말과 흡사하다. 시장무오설은 교황무오설과 비슷하다.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에서)
21) 이젠 ‘루터를 넘어서서’ – Beyond Luther – 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사실 16세기의 가톨릭교회는 많이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면죄부를 팔거나 성직을 매매하지 않는다. 그들은 치열하게 반성했고 거듭났다. 오히려 지금은 개혁교회가 그 옛날의 가톨릭교회처럼 되었다. 헌금이란 이름의 돈으로 천국 입장권을 예매하고, 돈을 써서 총회장이나 감독이 된다. 자본주의적 기업형 교회운영, 탈세, 세습, 부도덕은 끝이 없다. 루터를 넘어서야 희망이 보인다.
22) 예전엔 교회가 그리스로 넘어가더니 교리와 이론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와 조직이 되었고, 근세엔 유럽으로 퍼져가더니 문화와 전통으로 자리 잡더니, 미국으로 가서는 자본과 기업이 되었는데, 이즈음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거대한 재벌이 되어 버렸다.
23)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받고’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24) 정말 정신 차리고 똑똑히 알았으면 좋겠다. 종교는 그들의 제의의식들, 기도, 예배, 찬송, 설교, 주술을 통해서 오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핵문제, 생태계문제, AI나 과학 기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옛날엔 그런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비도 내리게 하고, 농사도 풍년이 되게 하고, 적도 막아내고, 병도 고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기도로 탄소배출을 제한하거나 환경보호를 이뤄내는 시대가 아니다. (이하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에서)
25)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와 똑같은 유대인과 우리와 같은 믿음을 지닌 기독교인들로 해석했지, 단 한번도 무슬림이나 불교인이나 무신론자들도 사랑해야할 이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
26) 종교는 제일 뻔뻔한 집단이다. 정치인들 보다 훨씬 더 뻔뻔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자기들은 거장 이기적이고 교만하면서도 말로는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겸손하라고 설교한다. (유발 하라리)
27) 종교는 축구와 비슷하다. 교회도 축구클럽과 흡사하다. 22명이 공 하나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웃기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는 팀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결속성이 있다. 종교는 웃기는 것이 아니다.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결속성이 모여있다. (유발 하라리)
28) 간디는 말했다. ‘종교의 진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수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 처럼 대해야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29) 기독교 2천년 역사중 기독교가 범한 최대의 실수는 ‘의심이나 회의를 죄’라고 규정하고 가르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의심이나 회의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의심이나 회의는 공부나 연구의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룩함과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30) 아모스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신앙보다 도덕을 더 강조했다. ‘하느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말씀을 뒤집어놓았다. 신앙심이 도덕성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가르쳤다. 종교의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을 비틀기 시작한 데서 부터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앞에 둔 이야기들입니다. 지나치게 들리는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양약은 먹기엔 좀 쓴 법이려니 생각하며 천천히 다시 읽으며 생각하면 참 고맙겠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 종교개혁가, 루터의 95개 논제 / 95개조 반박문 [번역문 전문포함]
95개 논제 (95 Thesen) 또는 95개조 반박문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비용 등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황이 면죄부 발행을 남발하자, 이에 항의하여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그레고리력으로는 1517년 11월 10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내붙인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종교 개혁의 신호탄으로 평가받고 있다.
– 배경

면죄부는 11세기 말부터 판매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일괄 면죄부를 대량 세일에 나섰다. 1500년대 초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그의 초입세를 납부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알브레히트의 면죄부 판매원인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테첼을 시켜서 면죄부를 팔게했다. 테첼은 “단순히 면죄부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조차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식의 과대선전을 하면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테첼과 같은 면죄부 판매원들은 “면죄부를 사는 순간 그만한 교회의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만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종교개혁 직전의 당시에 면죄부가 엄청난 숫자로 팔렸으며 이는 당시의 교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다.
이같은 불의를 보다 못한 마르틴 루터는 이에 항의하며 95개 논조를 비덴베르크 대학 성당의 문에 내걸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어 올렸다.
– 내용
95개 논제의 원제목은 “면죄부(免罪符)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토론”이다. 95개의 명제는 내용상 일반적으로 8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1)속죄에 대한 규정 (1 – 4조)
2)교황의 사죄권의 한계 (5 – 7조)
3)교회법이 부과한 속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옥 영혼에 대한 구원문제를 취급 (8 – 29조)
4)면죄와 참회 그리고 사죄문제 (30 – 40조)
5)면죄부의 구입과 면죄시행의 남용 (41 – 52조)
6)면죄설교와 복음설교의 가치비교, 교리의 보화, 면죄부 판매 설교의 과장 등 (53 -80조)
7)면죄부 남용에 따른 평신도의 산발적 질문과 면죄시행에대한 공박 (81 – 91조)
8)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생활 언급 (92 – 95조).
– 루터의 주장 요약
1. 회개의 삶을 강조하고 고해성사 즉 사제들에 의해 집행되는 고백과 속죄는 불필요하다.
2. 면죄부는 죄책감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교황자신이라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일은 자신의 수중에 보전하셨다.
3. 면죄는 죄에 대한 처벌을 교황이 사면 할 수 없다. 그 사면권은 역시 하나님에게만 있다.
4. 면죄부는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다. 교회가 부과한 처벌은 오로지 산 자에게만 적용되며 사망이 그러한 처벌을 취소시킨다.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에 의할 뿐이지 자신의 관할권이나 열쇠의 권한에 의해서 자신의 힘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참으로 회개하는 신자라면 면죄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며 면죄부는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참된 회개를 요구하신다.
6. 사람을 낚는 그물인 공로의 보화는 불필요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를 외치고 하늘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 95개조 반박문 [번역문 전문]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구두로 토론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신을 통해서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마 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 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 (참 내적 참회) 형벌이 계속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그가 사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때 사함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殘在)한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 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는 교황이 법령에서 죽음과 필연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11. 교회법 상의 형벌을 연옥의 형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다 (마 13:25).
12. 이전 시대에는 교회법 상의 형벌이 진실한 회개(참회)의 시험으로써 사면(赦免)의 뒤(後)가 아니라 앞(前)에 부과되었다.
13. 죽은 자들은 교회법과 관련하여 이미 죽었으며, 그로 인해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죽음으로 인해 모든 형벌로 자유롭다.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이 불안 공포만으로도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그 고통은 절망의 공포에 매우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17. 연옥에 가 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교화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 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 목사는 자기의 감독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교황은 열쇠 (천국)의 힘으로서가 아니고 (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이 당치도 않지만), 대도 (代禱)의 방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 (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 (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리누스 (St. Severin)과 파스칼리스 (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 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 같이 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르쳐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 (즉 참회師 – 고백을 받는 신부 – 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허가)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 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제6논제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사도 계승의 면죄 (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면죄증의 속죄를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일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버리고 (요 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 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 (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되어진 것이 아니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일이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교회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 주려고 (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개의 방울과 백의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를 주는 교회의 장보 (藏寶)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어지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 (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 (分與)하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또 그 장보 (藏寶)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고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고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티어스 (St. 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장보 (藏寶)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 관리의 보유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참 장보 (藏寶)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렇지만 이 장보 (藏寶)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 19:30, 20:16 눅 13:30).
64. 그와 반대로 면죄증의 장보 (藏寶)가 나중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그러므로 옛날에 있어서 복음의 장보 (藏寶)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면죄증의 장보 (藏寶)는 오늘날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면죄증 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는 면죄증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 (면죄증)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69. 감독들과 교구 교사들은 사도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교황의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71. 사도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지어다.
72.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74. 면죄증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굉장한 능력이 있어 –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만일 성 베드로가 교황이었다 할지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르치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교황은 팔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이와 같은 뻔뻔스러운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예로서 만일 교황이 베드로 교회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 (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연기제 (年忌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 (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또한 돈 때문에 불 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받는 경건한 영혼을 구하도록 허락하면서,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 왜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 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 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면죄증에는 그것으로써 한 번만 사죄된다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89. 만일 교황이 면죄증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전부터 주어 오던 증거나 면죄증을 정지하는가? 똑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는가?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만일 면죄증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 (Bedenken)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겔 13:10 16 렘 6:14, 8:11 살전 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 (행 14:22).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