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과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죄와 벌 [죄의식과 용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병들게 한 것은 결코 노역이나 감옥의 처참한 생활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가 병든 원인은 자신이 자살하지 않고 자수했다는 것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던 스비드리가이로프조차 해낸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토록 살고 싶은가 하고.
그는 같은 유형수들의 생활을 보며 그들이 모두 인생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들은 자유로웠을 때보다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듯싶었다. 그들은 한줄기의 햇빛이나 울창한 숲, 차가운 샘물 등을 그리워했다. – 본문 中
글의 에필로그 부분을 인용해 보았다. 나는 이 책의 결론이 참 맘에 든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데, 시베리아의 수용소 생활에서 그의 태도가 바뀐다. 같은 유형수들의 생활을 보면서, 그들이 모두 인생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자유로웠을 때보다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들을 보면서 라스콜리니코프도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얻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살다보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를 때가 있을 것 같다. 용서 중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 때 특히 괴로운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자신이 노파를 죽인 것 때문에 죄의식을 안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는 소냐를 만났고 자신의 모든 과거를 솔직히 고백할 용기를 얻는다. 죄의 고백 후에, 그는 죄 값을 치르면서 이 소설은 마무리 된다.
레미제라블 [가난]
문득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죄와 벌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그 작품 역시 ‘가난’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네. 하지만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맨주먹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죄악이지. 그저 가난한 정도에서는 고상함이나 인격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알거지가 되고 보면 그게 아니거든. 아무리 심한 모욕을 받더라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도 마찬가지네. (중략)” – 소설 초반부 마르멜라도프의 말 中
‘가난한 것이 죄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은 가난함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격이 용납하지 않는 일도 하게 될 때가 있다. 가난은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격이 망가지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에 막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 사회의 가난은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충분히 돌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이왕이면 모든 사람이 사람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