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제3대 주석 장쩌민 (江澤民, Jiang Zemin, 1926 ~ 2022)
장쩌민 (중 간자: 江泽民, 정자: 江澤民, Jiang Zemin, 1926년 8월 17일 ~ 2022년 11월 30일)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중국 공산당 주석 (1993 ~ 2003년)이다.
1993년 3월 국가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삼개대표사상을 발표하였으며, 외교 부문에서는 미국과 유럽과의 친선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1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 장쩌민 주석이 시베리아 범 한 쌍을 기증하였다.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장쩌민 (江澤民)은 현지 시간 2022년 11월 30일 낮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 장쩌민 (Jiang Zemin)
.출생: 1926년 8월 17일,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사망: 2022년 11월 30일
.정당: 중국공산당
.배우자: 양예핑
.종교: 없음 (무신론)
* 중국공산당의 제7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임기 1989년 6월 24일 ~ 2002년 11월 15일
.전임: 자오쯔양(6대) / 후임: 후진타오(8대)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
.임기 1993년 3월 27일 ~ 2003년 3월 15일
.전임: 양상쿤(4대) / 후임: 후진타오(6대)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89년 11월 9일 ~ 2004년 9월 19일
.전임: 덩샤오핑(5대) / 후임: 후진타오(7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주석을 역임했다.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이다. 1세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로 분류된다.
퇴임한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중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시진핑이 독주체제를 완비한 지금은 전직 국가원수 예우만 받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약력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 본적은 장시 성이라고 한다.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장상칭은 중일전쟁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런데 친아버지 장시쥔은 왕징웨이 정권에서 복무한 한간이라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직접 겪었다고 한다.
국립중앙대학에 들어갔다가 일본군 지배 치하에 있던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전학을 했다. 이 대학은 현재도 명문대이지만, 장제스 집권 당시에는 수도가 난징이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위상이 훨씬 높은 중국 제1의 공과대학이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상하이의 한 회사에 전기 기술자로 취직하였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
장쩌민 스스로는 대학 시절 당시 불법 지하조직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1949년 중공 정권이 성립하기 전에 입당한 것은 확실하다. 국공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기울고 1949년 상하이를 점령하자 그는 당에 의해 발탁되어 여러 기술직 공무원을 한다. 1949년 왕즈핑과 결혼을 하게 된다.
– 만주 시절
1954년 만주 창춘에 있는 디이자동차회사 (第一汽车)에 부임했다. 이 회사는 소련과 기술 제휴를 맺고 있었고, 1955년 장쩌민 및 여러 기술자들은 모스크바의 자동차 회사에 파견 연수를 받고 1956년 돌아왔다. 디이자동차는 중국 최초로 소련 ZIS 트럭을 라이센스 생산했고, 장쩌민은 이 공로로 공장의 고위직에 오른다.
1956년 백화제방 박가쟁명의 반동으로 실시된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 또는 “반동”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도 공장 내의 반동을 솎아내라는 중앙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1958년 대약진운동 당시에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연료를 빼앗긴 데다가, 중소결렬로 소련의 기술 지원이 끊겨 자동차 생산이 반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 문화대혁명기
1962년, 만주에서 본거지인 상해로 전근되어서 상해 전기과학연구원의 부소장으로 부임했다. 1965년에는 우한에 있는 열기관 연구소의 소장 및 당 부서기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부인은 이사를 허가받지 못해서 20년 간 별거 상태로 지냈다. 이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부부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벌어지자, 우한은 홍위병에 의해 점령되었고, 홍위병은 장쩌민을 여러 번 비판했다. 그리하여 2년간 57간교라는 수용소에서 노동했다.
1970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제1 기계공작부에 대외 담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몇 안 되는 우방이었던 루마니아에 공장 건설을 원조를 해주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 년간 파견되었다. 여기서 루마니아어를 익혔다고 한다.
– 마오쩌둥 사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국정을 농단하던 사인방은 마오 사후의 권력 투쟁에 대비하여 본거지인 상하이에 군 부대 및 지지자들로 하여금 농성 준비를 시켰는데, 화궈펑이 사인방을 기습 체포한 후에도 이런 지지자들은 남아 있었다. 장쩌민을 비롯한 여러 상하이 출신 고위 인사들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파견되어 이런 사인방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켰고, 상하이 지역의 소요 사태는 무산되었다. 이후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79년 화궈펑을 축출하고 집권한 덩샤오핑은 여러 산업 개발 시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1983년 3월 장쩌민을 새로 성립된 전자공업부 부부장에 임명했다. 장쩌민은 이 해 6월에는 이 부서의 부장이 되었고, 여러 전자 공업 진흥책을 펼치게 되었다. 장쩌민 아래에서 1984년 중국 최초의 정지궤도의 통신 위성을 실은 창정 3호의 발사에 성공하였고, 그는 이 공로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 상하이 시장
1985년 새로운 임기가 시작되는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다. 개혁 개방 이전부터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던 상하이에서 여러 발전 시책을 내놓았고, 상하이는 여러 경제 개방 특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986년부터 중국 공산당 독재에 항의하는 여러 운동이 중국 전역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장쩌민은 자기 지역인 상하이 내에서의 저항 운동을 유혈 사태나 소요 사태 없이 진정시켜 중앙의 주목을 받았다.

– 중앙 정계에서의 발탁 및 집권
1989년 4월 15일, 개혁파의 거두였던 후야오방 정치국 상무위원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중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민주화와 부패청산 등을 외치면서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갔는데 인원이 수십만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5월달이 되자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후야오방을 추모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와중에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긴급호출되어,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에게 당 총서기를 맡으라는 지시를 듣는다. 이는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부임 준비를 위해 일단 상하이로 되돌아갔다가 5월 29일 베이징으로 돌아오는데, 덩샤오핑은 이미 시위대의 유혈 진압을 결정해 놓고 있었고, 6월 4일 군 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게 된다. 이 와중에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 이외의 후계자로 낙점해 놓았던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이 시위대에 동정적인 발언을 했다가 실각했고, 장쩌민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장쩌민 후임 시장이 바로 주룽지인데 주룽지는 장쩌민과 1980년대 상하이에서 초반부터 같이 일해 왔으며, 호흡이 잘 맞아서 나중에 장쩌민은 그를 총리로 불러들인다.
장쩌민은 1989년 6월 말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자신을 상하이에서 보좌했던 여러 부하들을 중앙에 불러들여 여러 중요 자리를 맡기면서 자신의 사단으로 삼는데, 이들을 속칭으로 “상하이방 (上海幇, 상하이 마피아)”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는 장쩌민 밑에서 총리를 지낸 주룽지가 있다. 상하이 인사인 장쩌민은 여러가지로 다른 계파의 견제를 받았지만, 상하이방이라고 불린 이 사단에 상당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미 장쩌민을 후계자로 결정해 놓은 덩샤오핑은 다른 원로들에 비해 발언권이 컸기 때문에, 다른 계파의 여러 경쟁자들을 누르고 덩샤오핑의 후계자 자리를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1993년에는 양상쿤의 뒤를 이어 국가원수인 국가주석 자리에 오르고, 1997년 후견인인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실질적인 중국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

– 집권 기간
전반적으로는 도광양회 (韜光養晦), “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었고, 1997년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라는 식의 ‘유소작위 (有所作爲)’, 즉, 필요한 역할은 한다로 나아갔다.
최고직인 국가주석(政)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 이전의 국가 주석은 상징적인 자리로 리셴녠, 양상쿤이라는 당 원로가 맡았고, 총 서기는 당의 최고 직함이 된게 공산당 중앙위 주석이 폐지되며 분리되어 나온 1982년부터이므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계승한 셈이며, 군사적 자리인 군사위 주석만 덩샤오핑을 계승한 셈이다. 이 자리는 모두 후진타오에게 계승된다.
다만 중국에서 최초로 당-정-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일단 장쩌민은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를 겸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은 장쩌민이 아닌 화궈펑이 된다. 어차피 덩샤오핑은 다른 공식 감투가 없어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차오스 (喬石, 중앙 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 – 1980년대 이래 당시 당내 권력 3위)가 그의 권력에 맞섰으나 1998년 이미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차오스를 은퇴시켰다. 이는 쩡칭훙 (曾慶紅)을 영입했던 게 절묘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리펑과 연대하고 캐스팅 보터 리루이환을 지지시키며 후진타오기의 리커창 후임도 막아버렸던 “장쩌민의 제갈량”이었다.
임기 기간 대부분 동안 덩샤오핑이 배후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계자로 세운 후로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지위를 은퇴하고 평당원으로만 머물러 있었으며, 언론 노출도 거의 없이 모든 정무를 장쩌민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엄청난 권위로 다른 보수파 당 원로들 및 장쩌민의 경쟁자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장쩌민을 밀어주었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이 결실을 맺어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방중해서 장쩌민만 회동한 것을 가지고, 일부 한국 언론이 왜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을 만나지 못했냐고 비판 기사를 썼는데, 당시 덩샤오핑은 형식상 아무 직함 없는 평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상과 만나는 것은 격이 안맞는 일이었고, 노태우뿐 아니라 다른 외국 인사들도 덩샤오핑이 아니라 장쩌민을 만났다. 이후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쩌민이 진정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1992년 “개혁 개방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조한 남순 강화를 할 정도로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산당 내의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고, 마오쩌둥의 유산이 중국 사회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장쩌민 시절에는 완전히 이를 청산하고 중국이 개국되었다. 즉 확실하게 개국된 중국은 바로 이 장쩌민의 시대에 열렸다. 주식시장과 코카콜라, NBA 중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개방. 한국과의 수교도 그의 시대에 있었다 (1992년). 최초 방한 (김영삼), 최초 방미 (빌 클린턴), 최초 방일 (오부치 게이조) 등 진기록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권 당시에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빌 클린턴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2000년 8월 말에 중국의 휴양지 베이다이허 (北戴河)에서 미국 CBS의 시사프로 ’60분’에 출연해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와 인터뷰를 했는데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기자와 대화할 정도로 능통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상황을 추궁하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매우 강단 있는데, 특히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와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천안문 항쟁이라는 큰 사건을 겪은 직후 집권한 장쩌민에게 있어 사회 안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공안 이외에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확대 개편하였다. 이는 중국 내부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장쩌민의 임기 중에 파룬궁 신도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 정책 역시 시작되었다. 장쩌민은 무신론자다.
이른바 삼개 대표 사상을 “주요 전략 사상”으로 내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중국 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2.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3.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제외한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직을 2003년 후진타오에 넘기고 퇴임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겼는데, 중공 중앙군사위 주석은 2004년까지 1년간 더 유지하면서 바로 군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 퇴임 후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 방송을 낸 방송국 사장은 사임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 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장쩌민의 후계자이자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심지어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도 비리혐의로 잡아들이자 장쩌민은 시진핑에게 항복 선언을 하며 영향력이 거의 없게 되었다.
– 사망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장쩌민 (江澤民)은 현지 시간 2022년 11월 30일 낮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