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샤먼과 대만 타이페이 & 한국 백제유적 방문기 (2)
필자는 지난 2025년 10월 15~31일 사이에 중국 샤먼 (Xiamen, 厦門 하문)과 대만 타이페이 (Taipei, 臺北 대북) 그리고 한국방문 일정으로 여행했다. 이중 중국 샤먼시와 대만 타이페이 방문중 인상깊었던 부분과 한국에서 방문한 백제유적 (공주, 부여)에 대해 몇 편 기록하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중국 푸젠성 샤먼 (Xiamen, 厦門 하문)의 관련 인물들

샤먼시와 임어당 / 린위탕 (林語堂, 1895 ~ 1976)
임어당 / 린위탕 (林語堂, 1895년 10월 10일 ~ 1976년 3월 26일)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이다. 푸젠성 룽치 출신으로 1926년에는 샤먼 대학 문학장을 지냈다. 샤먼시의 고랑위 섬은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로 임어당 고택이 있다. 섬 내에는 차량이 없고 도보로 이동한다.
임어당은 푸젠성 룽치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하이의 세인트 존스 대학 (聖約翰大學)을 나온 후, 베이징 칭화 학교 (北京淸華學校)의 영어 교사가 되었다. 1919년 결혼한 임어당이 신방을 차린 곳이 구랑위다. 그러나 그해 하버드 대학에 건너가 언어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얻었으며 1921년에는 독일로 건너가 예나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1923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로 베이징 대학,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시기 유명한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사건 때 임어당은 루쉰과 함께 학생 편에 서서 교육계와 학교 당국에 맞서기도 하고 중국민권보장동맹회의 중요 멤버였던 ‘운동권’ 교수였다. 그들은 동료였지만 루쉰이 임어당보다 14살이 많았다. 루쉰과 그의 동생 저우쭤런의 영향하에서 린위탕은 도가사상과 만나게 된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모두 도가와 도교가 중국문화와 중국인의 민족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 바가 있었다.
이후 1926년에는 진보파 교수에 대한 군벌 (軍閥) 정부의 탄압으로 북경을 떠나 샤먼 대학 문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루쉰과 고힐강 등 저명한 학자를 학원에 초빙하기도 했는데 이후 임어당의 주선으로 루쉰은 샤먼대학 국문과 교수로 오게된다. 그러나 당시 부패한 환경으로 많은 교수가 이직하고 임어당도 사직했다.
1927년 우한 (武漢) 정부 외교부장 비서로 일하며 영문 주간지와 신문에 날카로운 논진 (論陣)을 펼치자 너무 급진적이고 반봉건적 사상을 옹호해 온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후 우한 정부가 무너지고 자신이 정치적 체질이 아님을 깨닫고 ‘나는 육식동물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 (政界)를 떠나 상하이 국제 출판물 교환소 소장을 맡고 문필활동에 전념했다.
1929년 이후 상하이 둥우 대학 영어 교수를 지냈으며 1932년에는 유머 잡지 《논어》를 발행하여, 그 당시의 중국 사회를 풍자·비판하였다. 영어를 가지고 수필도 쓰고 중국의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여 중국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였다. 1935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서 살면서,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으로 삼 년간 파리에 주재하고 1953년 UN 총회 중국 (타이완) 대표 고문으로 참가했다. 1954년 싱가포르 난양 대학 창립에 참여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한 <생활의 발견> (生活的藝術)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심미적인 눈으로 생활을 즐기라고 하는 도가의 주장이 중국인의 생활을 예술화시켰다고 설파했다. 또한 <홍루몽>의 체제를 모방한 <경화연운 (京華煙雲> (1939)을 창작하는 등 미국에서 생활했던 30년 동안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다.
1966년 타이완으로 이주 후 1967년 홍콩 중문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시기 대륙과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대륙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츰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다가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 (CCTV)>에서 이미 80년대 말에 타이완에서 드라마화되었던 <경화연운>을 다시 제작해서 대히트하는 등 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했다.
1968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강연한 일도 있다. 그 이외에 국어라마자를 개발했다. 대표 저서로 《생활의 발견 (生活的藝術)》, 《북경호일》, 《폭풍우 속의 나뭇잎》, 《경화연운》 등이 있다.
1976년 3월 26일, 홍콩에서 별세하였다.
한편 샤먼 구랑위에는 임어당의 고거가 있다. 구랑위 (鼓浪嶼, Gulangyu Island) 또는 고랑서 (혹은 고랑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샤먼시 쓰밍구에 있는 섬이다. 섬의 면적은 2km2이고 2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샤먼에서 페리를 통해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샤먼은 아편전쟁 후의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으로 개항한 5항의 하나로, 섬에는 영사관이 두어져 서양인이 대부분 살고 있었다. 현재도 양옥이나 교회, 임어당고거 등이 존재한다. 자동차의 주행이 금지되어 있다. 식민지 시대에 섬에 중국에서 유일한 피아노 박물관이 있었기 때문에, 섬은 ‘피아노의 섬(鋼琴之郷)’으로 불리고 있었다. 현재는 관광의 섬으로서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샤먼시와 루쉰 (鲁迅, Lǔ Xùn, 1881 ~ 1936)
샤먼 (Xiamen)은 중국 근현대 문학의 거장 루쉰 (鲁迅, Lu Xun)이 잠시 머물렀던 ‘역사적 인연’이 있으며, 특히 루쉰이 머물렀던 곳은 현재 샤먼의 주요 명소인 화신루 (Huaxin Road)와 같은 문화적 공간으로 남아 있어, 루쉰의 자취를 따라 샤먼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는 여행 테마가 존재한다. 루쉰은 1925년 베이징을 떠나 푸젠성 샤먼에 도착해 교편을 잡았고, 그 시기 그의 사상과 문학 활동에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였다.
루쉰 (Lǔ Xùn, 1881년 9월 25일 ~ 1936년 10월 19일)은 중국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런 (周樹人, Zhōu Shùrén)이며, 자는 예재 (豫才), 루쉰은 새롭게 지은 필명이다. 이외 영비 (令飛), 하간 (何幹) 등 100개 넘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반정부 논객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중국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저우쭤런과 생물 연구자였던 저우젠런은 그의 남동생이다.
대표작으로 ‘아큐정전’ (阿Q正伝), ‘광인일기’ (狂人日記) 등이 있으며, 특히 단편 ‘광인일기’는 중화민국의 봉건의 상징이었던 전통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민중의 각오와 행동을 촉구하게 되는 단편소설로 <신청년>에 1918년에 수록되었다.
이후로 그의 대표작이며 중국 근대문학의 걸작인 ‘아큐정전’이라는 중국 사회의 현실과 민중 정신을 담아낸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6년의 북양 정부와 공산당과 가까운 학생 시민 데모 충돌 뒤 잇따른 충돌 사건 뒤에는 베이징을 탈출, 남하하여 샤먼 (廈門)을 거쳐 광저우 (廣州)로 옮기었으며, 다시 장제스의 국민당 혁명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립 후는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상하이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국민 정부와 투쟁을 가속시키기 위해 공산당에서 세운 지하 좌익작가 연맹에 발기인으로 비중있게 참여한 뒤는 공산당 혁명과 거리를 둔 작가들과 뿐 아니라 혁명문학파 동료들과도 자주 전투적 설전을 벌이었으며 루쉰의 정치적 성격도 보다 짙어졌다. 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프티부르주아’라고 여겼고 자본가와 서방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새사회를 달성해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사상·문학은 중국의 온전치 못하였던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그가 가속시킨 투쟁이 공산당의 혁명을 이행하는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신민주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문명과 제도의 건설에 주의를 기울이던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거쳐 스탈린주의로 이행하던 중에 생을 마쳤다. 그는 1936년 상해의 조계지에서 작가적 자유를 얼마만큼 누리던 중에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일생 많은 번역을 남겼고 오사운동 이래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과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의 작가 연구에 참고가 될만한 잡문, 산문도 많이 후세에 남겼다.
한편 루쉰과 샤먼의 관계는 샤먼대학 교수시절인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어당의 주선으로 샤먼대학 국문과 교수로 가게된 루쉰은 연인 쉬광핑과 함께 1926년 8월 26일 베이징역을 떠난 텐진, 난징, 상해를 거쳐 배로 9월 4일 샤먼에 도착한다. 쉬광핑은 상해에서 헤어져 모교인 광동성립여자사범학원에서 자리를 얻어 광동으로 간다.
이 시기 루쉰은 중국 혁명의 혼란 속에서 베이징을 떠나 샤먼으로 왔고, 당시 신설된 샤먼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샤먼에서의 생활은 그의 문학적 성숙과 중국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다지는 시기였다.
샤먼대학 시밍 (Siming) 캠퍼스에는 루쉰의 동상이 있다. 루쉰이 군벌 탄압을 피해 샤먼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시기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동상은 문학적 거장의 상징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루쉰이 80년 전 샤먼에 머물렀던 역사를 보여준다.
현재 샤먼에는 루쉰이 거주했던 집이나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이 남아있으며, 현지인과 방문객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장소로 여겨진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