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2세 (Flavius Theodosius, 401 ~ 450)의 가장 위대한 업적,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테오도시우스 법전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413년에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지키기 위해 건설한 삼중 성벽. 흉벽과 내벽, 외벽으로 이루어진 든든한 성벽 덕분에 무려 천 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침투할 수 있는 적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이 성벽의 높이는 약 12m나 되며 이중 삼중 으로 건설되어 방패막 역할을 잘 하였다.
약 1,6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우수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건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 (Flavius Theodosius, 401 ~ 450)가 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 구조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 평가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과 동시에 안테미우스는 기존의 콘스탄티누스 성벽만으로는 거세지는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제국 수도 방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추가로 난공불락의 육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우스의 정권 때부터 시작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군림 할 때 건설이 마무리가 된 이 성벽은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은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함께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의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프로폰티스) 해부터 골든 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으로,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 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물리치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의 야심 앞에서 열리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 테오도시우스 법전 (Codex Theodosianus)
테오도시우스는 온화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했고 헬레니즘에 심취한 유도키아와 함께 4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대학교에서는 학자들이 모여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편찬된 모든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벌였다.
약 9년에 이르는 작업끝에 마침내 438년 2월 15일 《테오도시우스 법전》 (Codex Theodosianus)을 공표하였는데 서방 황제와 동방황제가 공동으로 이 법전을 반포하였다.
로마제국은 사라졌지만 로마법의 정신은 인류의 유산이 되어 현대문명의 기초를 놓았다. 로마의 거대한 법적 유산 중 테오도시우스 법전은 최초의 공식적 칙법집이다. 이 칙법집의 마지막 권인 16권 종교법은 로마제국이 이교신앙에서 기독교 제국으로 변해가는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4세기 로마제국의 종교적 격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친기독교 정책에서 비롯된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성직자들에 대한 경제적인 특권을 허락했고 감독들에게 법정심리와 재판권을 수여하였다. 기독교는 특혜받은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런 정책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콘스탄티누스 가문은 이런 정책을 통해 이전의 이교시대와 곧 성립될 기독교 제국의 매개자 혹은 중간자의 역할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마지막 인물인 율리아누스는 이교부흥을 시도했지만 그의 정책이 역사의 방향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가문은 다소 중립적인 종교정책을 표방하였다.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친 기독교 정책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도 않았다. 비기독교와 유대교,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를 허용하는 전통적인 종교관용책을 시행하였다.
테오도시우스 시대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니케아적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 제국이 된다. 니케아적 기독교만이 유일한 합법적인 종교로서 국가종교가 되며, 이로써 새로운 천년의 역사를 준비하게 된다. 이교는 금지되며, 기독교의 다양성도 용인되지 않는다. 유대교는 민족종교로서의 틀은 허용되었지만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는 여러가지 제약을 받게 된다. 테오도시우스는 확신에 찬 신앙인이었고, 이런 종교적 확신 때문에 니케아 신앙을 통해 로마제국의 정신적 통일성을 이루려는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다양성을 니케아 신앙 안에서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테오도시우스의 계승자들은 기독교 제국의 이상이 뿌리내리는 데에 기여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정책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이르러 기독교제국의 이상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칙법을 편찬하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