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었다. 아니 분단 70주년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 후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한반도가 소련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도를 꺼내어 한반도의 중심인 북위 38도 선에 줄을 그었다. 트루먼은 ‘북쪽은 소련이 점령을 하여 일본을 무장해제 하고,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여 무장해제 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트루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38선 이북을 점령한 후,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하기 시작했다.
1945년 미국의 군정
미군이 서울에 입성한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25일이 지난 1945년 9월 9일 이었다. 그날 미군이 서울 조선총독부 청사 앞에서 일장기를 강하하였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도 25일 동안 한반도의 심장부에서 일장기가 계속하여 펄럭이고 있었단 말이 아닌가! 한편 소련의 지배하에 북한이 빠르게 공산화가 되어 가는 반면, 남한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속속들이 우국지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했지만 미군은 그 어떤 단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입성하면서 ‘맥아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한반도 기존의 어떤 단체도 인정하지 않으며, 미군정이 직접 통치한다는 내용이다. ‘맥아더 포고령’은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결의
1945년 12월 27일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영‧소 삼국의 외무장관이 모여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뒤 여러 문제의 처리에 관해 의논을 하였다. 이때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탁 통치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 안을 첫 번째로 언급은 것은 1943년 11월 27일에 미‧영‧중 3개 연합군이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이다. “앞으로 3국은 한국 사람의 노예상태에서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적당한 시기’란 실질적으로 신탁통치를 의미하고 있다. 1946년의 남한 지역은 찬탁과 반탁 진영 사이의 갈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김구를 비롯한 우익민족세력은 반탁의 선봉에 섰고, 소련의 지시를 받은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공산세력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대변하는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게 속지 마고, 일본 놈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1947년 유엔 이관
이러한 난국의 해법을 찾고자 미군정은 소련과 한국통일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6년 3월 서울에서 양국 점령군 대표로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다. 한반도를 미국은 친미적으로, 소련은 친소적인 통일을 고집하였기에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1947년 5월 하순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 되었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회의는 결렬되었다.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미국의 유엔으로 이관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에서는 두 가지 결정을 했다. 첫째 유엔 한국위원단의 감사 하에 남북한 총선 실시해서 정부를 수립하고, 둘째 그 후 미‧소 양군이 철수한다. ‘유엔 한국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입국했으나, 소련은 유엔의 결정은 북위 38도선 이남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위원단이 38도선 이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1948년 8.15일 대한민국 건국
결국 38도선 이남에만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치러졌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이 주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사실 북한의 건국 준비 과정은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소련은 북한에 임시헌법을 만들라는 지시를 하고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의 도안도 제시했다. 해방 후 초기에는 북한의 집회에서도 태극기가 등장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태극기가 인공기로 대치되었다. 한반도 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념이 다른 남북한이 함께 국가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남한만이라도 먼저 국가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49년 유엔 총회에 의하여 대한민국만이 합법적인 국가임을 인정하지만, 1991년 9월 17일 46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50년 6.25일 전쟁
우리민족의 의지와 관계없는 분단이었기에 남한도, 북한도 통일을 원했다. 그러면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 북에서 김일성은 호시탐탐 남한을 침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1950년 1월 5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타이완 섬이나 중국 본토에서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7일 후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 후 6개월이 조금 넘어, 김일성은 침공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주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였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진출한다.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2월 다시 서울을 되찾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1953년 7.27일 휴전
1951년 7월부터 휴전 논의가 있었으나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야 이루어진다. 휴전협정에서 유엔과 공산군의 가장 큰 쟁점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유엔군이 잡고 있던 공산군 포로는 13만이 넘었는데 공산군이 밝힌 유엔군 포로는 11559명에 불과했다. 만약 무조건적으로 포로를 송환할 경우, 공산군은 132474명의 병력을 충당하는 반면, 유엔군은 만여 명에 불과한 병력만 충당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헌병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포로석방’을 지시했다. 6월 18일 00시를 기점으로 작전은 개시되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2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할 수 있었다. 북한은 국경선을 38선으로 주장하였으나 유엔군은 휴전 시점의 국경선을 주장하였다. 유엔군의 제안이 받아 들여져 오늘의 휴전선이 만들어 졌다. 당시 땅에 관한 협정은 이루어 졌으나 바다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을 구실로 북한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NLL(North Limit Line)을 침범하고 있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었다. 70년은 성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벨론 포로로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언제 진정한 광복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환기 사관(구세군 본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