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이란 건국의 아버지’ 키루스대왕 (Cyrus the Great; Cyrus II, 키루스 2세 보졸그, 고레스, BC 576•590 ~ BC 530)와 중앙아시아 유목민 마사게타이족의 여왕 토미리스 (Tomyris)
키루스대왕 (Cyrus the Great; 키루스 2세 보졸그, 고레스,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경 ~ 기원전 530년 12월 4일)의 페르시아제국 군대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구바루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이 원정은 비교적 별다른 저항 없이 같은해 10월 당시 고대 세계최대의 도시이자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의 함락으로 끝났다. 많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키루스의 정복은 신속하고 저항없이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 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다 왕국과 시리아 왕국등 많은 왕국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키루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때부터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의 사면의 왕”으로 칭했다.
키루스 2세는 그의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바빌론에 잡혀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대인의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 키루스의 죽음
고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키루스는 카스피해 동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조언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마사게타이족을 이끄는 토미리스 여왕 (Tomyris)이 자신의 아들이 키루스에게 죽자 그에 대한 복수로 키루스를 공격했고 결국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의 죽음은 기원전 530년 8월경이라고 한다. 죽은후 키루스의 시신은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파사르가다에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 키루스에게 죽음을 선사한 마사게타이족의 여왕 토미리스 (Tomyris)
마사게타이족 (고 그: Μασσαγέται)은 고대 이란족의 유목연맹체이자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반농반목 (半農半牧) 집단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 사이에 카스피해 북동부 연안, 시르다리야강 하류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 집단으로서, 시르다리야강 하류 지역에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면서 스키타이 문화를 형성했는데, 스키타이족, 사카, 다하에와 같은 계통이거나 그 일부에 속했던 집단이라는 가설이 전한다.
헤로도토스의 저서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은 이들의 공격에 못 견디어 볼가강을 건너 서천 (西遷) 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530년에는 이 집단의 토미리스 여왕이 아락스강 (Araks) 북안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의 원정군을 격파하고 키루스 2세를 살해했다고도 전한다.

말을 희생물로 삼는 의례와 공처제 (共妻制), 고령자에 대한 식인 폐습 등의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토미리스 (Tomyris)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키루스 2세를 죽였다고 전하는 스키타이 족 일파 마사게타이족의 여왕이다.
토미리스는 후대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며, 그녀의 남편, 이름은 밝혀진 바 없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키루스 2세가 마사게타이 정벌 당시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고, 그녀의 아들이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것에 격분해 토미리스 여왕이 키루스 2세를 죽여 피가 가득찬 주머니에 그의 머리를 담갔다고 전한다.
연대적으로 세계 최초의 여왕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녀의 정확한 나이, 이름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토미리스와 그 아들로 마사게타이의 군사령관이었던 스파르가피세스 (Spargapises)의 이름은 이란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기록한 이들이 모두 그리스인 역사학자들이었으므로 토미리스의 이름도 그리스식으로 발음된 이름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많은 그리스 역사가들은 그녀가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창시자로써 그녀의 나라를 정복하려 했던 키루스 대왕을 죽이고 효수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484년경부터 425년경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토미리스가 살았던 시절보다 거의 100여 년 뒤에 살았으며 그녀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한 최초의 고전 작가였다.
토미리스의 역사는 서구 사회에서 널리 알려졌고 전설이 되었다. 이후 로마의 스트라보, 폴리아에누스, 카시오도루스 그리고 요르다니스 또한 토미리스에 대한 글을 썼으며, 그 기록은 《게타족 (고트족)의 기원 및 습속》 (De origine actibusque Getarum)에 남아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 대왕은 마사게타이에 대한 첫 공격에서 승리했고, 그의 조언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을 추적하기 위한 함정을 만들 것을 대왕에게 제안했는데, 이에 따라 페르시아인들은 겉으로는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 장막을 많이 만들고, 그 안에 포도주를 많이 가져다 두었다.
원래 스키타이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발효된 암말의 젖에 탄 하시시였다.” — 그리고 그들은 (키루스 대왕과 페르시아인들이 일부러 가져다 둔) 그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상대가 술에 취해 무력화되어 있는 동안 기습해서 마사게타이군을 무찔렀고, 토미리스의 아들인 군사령관 스파르가피스를 체포했다.
그때 마사게타이 군사의 1/3은 포로가 된 자들이 사살된 자들이 많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가피세스는 키루스 대왕을 달래 그의 몸을 결박한 포승을 풀게 했고, 페르시아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자결하게 된다.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에게 그의 배반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자신의 모든 병력을 몰아 두 번째 전투에 나섰다.
그 후 벌어진 전투에서, 마사게타이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고, 페르시아는 많은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이 전투에서 죽었으며, 토미리스는 그의 목을 베어 효수하고 사람 피로 가득 채운 포도주 부대에 처 넣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토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너의 피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겠다.” (헤로도토스 《역사》 1.214)
반면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침대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전했고, 그리고 많은 다른 기록들이 키루스 대왕의 죽음에 따른 다른 원인을 전하고 있다.
토미리스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예술과 문학에서 꽤 인기있는 소재가 되었다.
예술에서 토미리스가 등장하는 일반적인 장면은 그녀가 키루스의 잘린 수급을 들고, 그것을 피가 가득 찬 그릇에 넣는 것이었다.
유스타슈 데샹 (Eustache Deschamps)은 14세기 후반 그의 시에서 토미리스를 아홉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추가했다.

- 키루스 사후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확장정책을 계승해 이집트를 복속하는 데 성공했으나 7년 만에 죽었고, 키루스의 집권 이전에 페르시아를 통치한 아르사메스의 손자인 다리우스 1세가 캄비세스 2세의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황제로 등장했다.
○ 영화화
2019년에 개봉한 카자흐스탄 영화 <토미리스: 전쟁의 여신> (감독: 아칸 사타예브)은 키루스 왕과 토미리스 여왕을 주인공으로 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