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맘의 두서없는 이야기 28
곰탕에 마음을 담다.
모든 주부들의 고민 중 하나가 바로 매끼 식사 아닐까 싶다. 나또한 처음에는 부지런한 주부에 속했었다. 사먹지 않고 한 푼이라도 아껴 가정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자는 일념 하에 반찬을 하기 시작한 것 이다. 오이지며 고추장아찌, 무장아찌 등의 저장성이 용이한 반찬은 물론 건강에 좋은 나물 반찬도 열심히 준비했다. 시금치 등은 한 번 먹기에는 조금 양이 많다 싶어 나물로 무친 후 나머지는 데쳐 냉동실에 잘 얼려둔다. 그러면 나중에 시금치 된장국이나 볶음밥 등에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또 마트에 싱싱한 조선무가 나오는 시즌이 되면 넉넉하게 사서 보관해 두고 수시로 이용한다. 먼저 들깨가루를 약간 넣고 무나물을 볶는다. 새우 살을 넣고 볶으면 맵지 않고 부드러워 아이들도 좋아하는 메뉴다. 아니면 콩나물과 무채를 넣고 밥을 고슬하게해 양념간장에 비벼먹는 별미 밥도 좋다. 식초, 설탕, 소금의 적당한 비율에 무채를 살짝 절인 후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넣고 무치면 시원하고 입맛 도는 무채나물이 되고 식초와 와사비, 설탕을 푼물에 얇고 동그랗게 썬 무를 절이면 삼겹살 먹을 때 소화를 돕고 느끼함을 잡아주는 좋은 반찬이 된다. 이렇듯 무한한 반찬의 세계에 잠시 동안 빠져들었던 나는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반찬그릇을 볼 때마다 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간장 빛이 고운 장조림을 하면 항상 같이 연근과 우엉이 따라 온다.
배추겉절이를 하면 연하고 부드러운 배추 속은 좀 남겨뒀다가 살짝 데쳐 소금과 참기름 정도만 넣고 무쳐도 고급 한정식 집에서 나오는 깔끔한 배추 나물이 된다. 그러던 나의 보물 창고 냉장고가 한번 크게 망가진 적이 있다. 냉동 칸 외에는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모든 반찬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알다시피 냉동실에 반찬을 보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당장 냉장고를 살 형편은 되지 않고 고치자니 사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달간의 시간을 그렇게 버티기 위해서는 특별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때 바로 주부들의 다정한 친구인 (곰탕/곰국)이 생각났다. 왜 곰국 하면 웃음이 먼저 나는지 어디선가 읽었던 대목이 떠오른다, ‘아내가 말없이 곰국을 끓였다. 그것도 평소에 잘 안 쓰는 집에서 가장 큰 들통으로 말이다. 그리곤 친정에 갔다.’ 곰국에는 이렇듯 에피소드가 참 많다. 어쨌든 곰탕은 많은 양을 끓일 수 있고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데 펴 먹기만 하면 되는 간단하면서도 영양만점의 음식 아닌가. 특히 뜨끈뜨끈한 사골국물에 파만 조금 넣고 밥이랑 먹으면 하람이도 너무나 좋아한다. 그래서 한동안 질리도록 곰국만 먹었는데 그 후 나는 그 편한 맛에 길들여져 예전보다는 많이 게을러진 주부가 되어버렸다, 남편과 하람이 에게는 미안 하지만 솔직히 그냥 대충 먹는 게 편한 걸 어쩌랴. 어느 사이엔가 집에는 항상 몇 개의 햇반이 준비 되어있다. 그리고 하나씩 먹을 수 있는 포장 김은 기본이고 냉동피자며 만두, 물에 간단히 타 먹는 미소된장 등만 꽉 찬 부엌. 나의 전리품이던 수제 반찬들은 사라지고 냉장고는 그렇게 텅텅 비어버렸다. 주부의 의욕은 생각보다 연약했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그런 미안함도 사라질 때쯤 하람이가 무심한 듯 한마디 던진다.
“엄마 요즘 바빠?”
하람이 저녁으로 줄 양념된 훈제 치킨 살을 고르고 있던 나는 갑자기 하람이의 그런 질문에 손이 부끄러워져 접시를 뒤로 쓱 밀어버렸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훈제치킨 다리를 사서 브로컬리와 당근 등의 갖은 야채를 넣고 볶으면 아주 맛있고 특별한 요리가 되는데 그것도 귀찮아 살만 골라 밥에 얹어 주던 나는 요즘 뭐가 그리도 바빴던 걸까. 소고기를 참기름에 살짝 볶아 끓이는 미역국을 참 좋아하는 하람이. 콩나물과 고구마순을 좋아하는 하람이. 달걀장조림을 좋아하는 하람이. 시중에서 파는 파스타 소스를 넣은 파스타 말고 얇게 썬 편 마늘을 기름에 들들 볶아 올리브유와 소금만 넣고 볶는 일명 오일 파스타라는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좋아하는 하람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라면 일단 뭐든 맛있게 먹어주던 하람이도 이제는 살짝 심통이 난 게다. 나 또한 잘 먹어주는 가족들이 있는데 왜 그런 소소한 기쁨을 잊었던 걸까. 딴 데 정신이 팔렸었는지 가장 기본 되는 가족의 욕구조차 만족시켜 주지 못한 과거 영양사 엄마는 그래서 이번 주말에 무서우리만큼 큰 들통에 우족탕을 끓일 생각이다. 우족과 잡뼈를 찬물에 우려 핏물을 뺀 후 첫 번째 끓인 물은 버린다. 그리고 다시 물을 받아 오랫동안 천천히 약한 불로 끓여 내면 곰탕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그렇게 완성된 곰탕은 차게 식혀 윗부분에 굳은 지방을 걷어내고 조금씩 담아 냉동 보관해 두면 여러 가지로 쓸 수 있어 좋다.
쌀쌀해진 호주 날씨뿐만 아니라 최근 마음을 힘들게 하는 한국의 안타까운 상황을 바라보며 모든 분들에게 든든하게 버틸 무언가가 더욱 필요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박은정 사모(시드니동산교회 양화영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