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레비나스
○ 하이데거 (1889. 9. 26 독일 슈바르츠발트 메스키르히~1976. 5. 26 메스키르히)
독일의 철학로 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독창적인 사상가이며 기술사회 비판가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존재론자였으며 유럽 대륙 문화계의 신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초기생애

가톨릭 교회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보였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 예수회 수련수도자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과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실제로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술'(記述) 심리학의 창시자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 Von der mannigfachen Bedeutung des Seienden nach Aristoteles〉(1862)를 쓴 19세기말의 가톨릭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를 중학교시절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평생 동안 하이데거는 다양하게 쓰이는 ‘있다’라는 동사의 바탕에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가 깔려 있을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또 일찍이 브렌타노를 연구하면서 그리스인들,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사유가 아직 시·철학·과학으로 갈라지기 이전에 이루어진 통찰력 있는 성찰이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그노시스파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게 각별한 영향을 준 인물들은 19~20세기초의 철학자들, 예를 들어 덴마크의 신학사상가 쇠렌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를 세운 디오니소스적 생기론자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들의 관심을 인문과학과 역사과학으로 돌린 역사 생기론자 빌헬름 딜타이, 현상학의 창시자 에트문트 후설 등 이었다.
20대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나중에 가치론적 칸트주의의 서남(西南)학파를 창시한 하인리히 리케르트와 당시에 이미 유명해져 있던 후설과 함께 공부했다. 청년 하이데거의 박사학위 논문(1914)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 연구 속으로 심리학이 침투하는 데 맞선 그의 투쟁(그는 철학적 수준에서 이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음)과 후설의 현상학을 배경으로 씌어졌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나중에 불안·사유·망각·호기심·염려·공포 등에 대해 말하고 쓴 것들은 심리학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가 인간·공공성·타자지향성 등에 대해 말한 것도 사회학·인간학·정치학 따위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존재의 방식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 중기생애
하이데거는 191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3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영국의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연구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후설의 동료였기 때문에 전임자인 후설의 정신에 따라 현상학 운동을 더 진척하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종교 쪽으로 기운 이 청년은 자기 나름의 길을 갔고 1927년에는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을 펴내어 독일 철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저작은 매우 읽기 힘든 글이었고 후설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았지만 즉시 대단한 저작으로 여겨졌다. 놀랄 만큼 어려운 문체였는데도, 이 책은 독일어권 나라들만이 아니라 현상학이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라틴계 나라들에서도 깊이 있고 중요한 저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여러 실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하이데거는 본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책 때문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의 반응은 상당히 차가워서 몇 십 년 동안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의 목표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이 물음은 더 근본적인 물음, 즉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물음은 명백한 일상생활 뒤에, 따라서 자연과학의 경험적인 문제들 뒤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 물음을 대개 지나치고 마는데, 그 까닭은 이 물음이 일상생활에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예언자적 소명은 모든 사람이 각자 가장 진지한 태도로 그 물음을 던지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확정적인 대답을 얻으려 했는지 아닌지는 당시 인류가 처한 위기에 비추어볼 때 2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위기는 기술일변도의 발전, 즉 소외 또는 하이데거 사상에서 더 중심이 되는 용어를 쓰면, ‘매우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낳은 발전으로 말미암아 서양 사상이 겪은 심각한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락상태 또는 비본래성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 방식이다. 타락상태는 실존적·본질적 가능성이지만, 시대와 개인에 따라 그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에서는 다소 엄격한 견해가 누그러졌다. 후기 저작에서 그는 ‘존재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구원받고 따라서 다시 존재에게 다가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을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나라들이 아닌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진정한 실존).
〈존재와 시간〉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의 풍성함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1929)라는 짤막한 글에서 전개된 사상과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을 출판할 당시 하이데거는 1923년부터 몇 년째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정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그 직위를 사임하고 1928년 후설의 후임자로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돌아갔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는 하이데거의 교수 취임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그가 좋아하는 주제들 중 하나인 무(無)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가 후설에게 배운 바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 방식의 비밀을 벗기는 길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현상학적 방법이다. 하이데거는 이 방법을 따름으로써 인식하는 자로서 인간이 자기와 대면하고 있는 환경 내의 어떤 존재라는 내용을 가진 전래의 주체-객체 관계의 이분법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체-객체 관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가장 심오한 앎은 파이네스타이(phainesthai : 그리스어로 ‘자신을 보여주다’ 또는 ‘밝은 곳에 있다’라는 뜻)의 문제이다. 하나의 방법으로서 현상학(Phänomenologie)은 이 말에서 파생한 것이다. 어떤 것(etwas)이 밝은 곳에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처럼 개념화를 거친 이후 비로소 등장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데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한 방편이자 그것의 구원적 효과로 하이데거는 언어학적·해석학적 기법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만의 독일어, 자신만의 그리스어, 자신만의 독특한 어원 설명을 개발했다. 예컨대 그는 ‘존재'(Sein)로 끝나는 새로운 복합어를 100여 개나 새로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읽으려면, 많은 주요 어휘를 그리스어로 옮긴 다음 자유롭고 때로는 매우 독특한, 그렇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그의 해석과 어원 설명을 고려해야만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은 사물들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단순히 exist하지 않고 exsist함), 결코 그 사물들에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지만 그것들과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세계 속에 던져져 죽을 때까지 그 속에서 살아간다. 사물들 속에 던져진 채, 사람은 현존(Dasein)하면서 추락하며(Verfall) 사물들 속으로 빠져드는 지점에 처해 있다. 그는 끊임없이 기투(Entwurf)되지만, 주기적으로 또는 언제나 그는 잠시 몰입(Aufgehen in)되는 정도로 사물들 속에 침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사람은 특정한 그 누구도 아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세인'(世人)이라고 부르는 구조가 드러난다. 세인은 동료들을 통해 자신을 재보려는 경향인 인간의 ‘타자지향성’을 강조하는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앵글로-아메리카 사회학의 비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은유는 가능하면 사회과학의 용어를 피하고 존재론의 용어를 택한다. ‘세인’의 특징은 잡담과 호기심이다. 잡담의 경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조금도 진정한 인격적 관계에 있지 않거나 이야기되는 내용과 전혀 깊은 관계에 있지 않다. 따라서 잡담은 천박함을 낳는다. 호기심은 진정한 관심도 놀랄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기분전환의 한 형식이다.
그러나 가능성으로서의 진정한 존재와 자유를 드러내게 하는 기능을 가진 기분·불안·두려움 등이 있다. 이것은 자신을 선택하고 자신을 지배할 자유가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의 관련, 인간 존재의 유한성의 관련은 자신의 죽음과 만날 자유(das Freisein für den Tod), 즉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 죽음과 지속적인 관련을 맺는 것으로 체험된다. 불안 속에서 모든 존재자는 ‘무(無)와 무처(無處)’로 빠져들고, 인간은 자신의 실존 속에서 방황하면서 어디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무와 대면한다. 이제 평범하고 명백한 일상성은 모조리 사라져버린다. 사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과 대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경우, ‘맑은 정신의’ (nüchtern) 불안과 그 속에 함축된 죽음과 대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으로 중요하다. 즉 근본적인 것들이 드러난 것이다. 드러난 구조들 중에 기꺼이 행동할 가능성들도 있다 (“…아는 즐거움[die wissende Heiterkeit]은 영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불안은 사람에게 존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두려움의 어두운 측면과 연루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존재는 빛과 즐거운 일 (das Heitere)과 어우러져 있다. 존재는 “자기 마음대로 방침을 정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자신의 (참된) 집에 이르는 것이다.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존재와 사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자주 골머리를 앓지만, 분명한 것은 하이데거가 인간 숭배를 거부하고 좀더 큰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 후기생애
1930년대초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학자들이 ‘전환’이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전환을 몇몇 전문가들은 〈존재와 시간〉의 문제에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부인하고 자기가 젊은시절부터 똑같은 질문을 던져왔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말년에는 이렇게 주장하기를 점점 더 꺼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길을 넌지시 암시한 적도 없었다. ‘전환’이 일어났을 무렵, 그는 잠시 동안 제3제국의 문화정책에 관여했는데, 이는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193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에도 독일 대학들은 심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독일 대학들은 ‘민족 혁명’을 지지하고 유대인 학자와 학설(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이던 반나치 과학자가 항의 사직을 하자, 교수진은 만장일치로 하이데거를 후임자로 선출했다.
그의 총장 취임 연설인 〈독일 대학의 자기 확인〉은 나치즘에 대한 긍정으로 널리 공표되었다. 그는 대학생들의 과제를 노력봉사와 군사봉사와 학문봉사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의 권위주의적 교육정책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그 연설은 ‘하일 히틀러’가 아니라 플라톤의 〈국가 Republic〉에서 인용한 문장, 즉 “위대한 것들이 모두 위험에 빠져 있다”로 끝맺었다. 그 연설은 과학적 전문화에 반대하면서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것을 촉구했으며 ‘존재자들'(Seiendes : 존재[das Sein]의 대립어) 속에서 자아를 상실할 위험을 경고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분명히 친(親)히틀러적인 발언을 한 경우도 있다. 그는 “지도자 자신이, 그리고 오직 그만이 독일의 실체이고 현재이자 미래이며 법이다”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하이데거는 히틀러주의에는 굴복했지만 나치의 문화정책이나 철학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상당한 압력을 받아서 나치와 결탁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과 친나치 분위기와의 관계는 빠르게 나빠져갔다. 그는 1934년초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이데거는 히틀러주의란 인류 전체 속에 있던 구조적 질병이 역사적으로 폭발한 것이라면서, 그 독을 없애는 데에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1944년 11월 하이데거는 고별 강의를 했으며, 1945년 점령군은 그가 일체의 공식 강연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조사’를 받았지만, 1933~34년 사이의 히틀러 지지가 심각하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교수 자격은 1959년 사임할 때까지 계속 논란거리였다. 그는 1951~58년에 걸쳐 영향력 있는 정규 강의를 했다. 1933~34년 동안의 그의 처신은 국제 현상학 운동에서 그의 강력한 위치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 평가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별한 자부심은 엄청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며, 존재에 대한 사유 탐구는 일종의 신앙을 위한 위장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난해한 용어법은 전통적인 접근법을 덮어 신비화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무례한 평가는 하이데거가 쓴 글을 통해 그가 걸었던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서 검증하지 않는 한, 하이데거에 대해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대답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질문’을 하라고 요구하고 약을 올린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은유는 그가 거부한대로, 평범한 철학 용어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 레비나스 (1905. 12. 30 리투아니아 카우나스~1995. 12. 25 프랑스 파리)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로, 서구 철학사에서 존재론이 차지해 온 우위성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레비나스는 1923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1928부터 1929년까지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에드문트 후설(1859~1938)과 하이데거가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1928년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박사논문을 끝낸 뒤, 파리에 있는 유대인 학교인 에콜 노르말 이즈라엘리트 오리엔탈과 알리앙스 이즈라엘리트 우니베르셀에서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40년 독일군에 체포되어 이후 5년 동안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에콜 노르말 이즈라엘리트 오리엔탈 교장으로 일하다가 1961년 푸아티에대학교에서 첫 교수직을 얻었다. 이어서 파리제10대학교 (1967~73)과 소르본대학교 (1963~78)에서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레비나스 철학의 주요 주제는 존재론을 가장 근본적인 철학 영역인 ‘제1철학’ (first philosoph)으로 간주하는 전통에 관한 것이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전체성 (totality)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그 전체성 안에서는 다른 것과 ‘타자’ (other)는 필연적으로 같음 (sameness)과 동일성 (identity)으로 환원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체성을 향한 이러한 욕망은 ‘도구적’ 이성 (instrumental reason)의 기본적 표현이다.
도구적 이성이란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혹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결정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적 이성을 수용함으로써 서구의 철학은 대상을 파괴하고 사물화하는 ‘지배에의 의지’ (will to domination)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도구적 이성은 그것이 사용되는 궁극적 목적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괴적이고 사악한 목적의 추구에 사용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도구적 이성은 20세기 유럽 역사의 주요 위기들, 특히 전체주의의 도래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새로운 ‘근본적인 존재론’을 발전시키고자 한 하이데거의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론 역시 서구 철학의 일반적 특성인 지배적이고 파괴적인 경향성을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은 인식과 이론적 이성, 즉 판단이나 믿음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는 이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존재론은 윤리학에 비해 철학적으로 열등하다. 그는 윤리학은 인간 상호 간의 모든 실질적 관계를 포괄하는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는 존재론에 대한 윤리학의 우월성은 ‘타자의 얼굴’ (face of the Other)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얼굴’에 의해 나타나는, 타자의 ‘남이라는 성질’ (alterity) 또는 타자성 (otherness)은 인간이 타자에 관한 판단이나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알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인간이 타자에게 진 도덕적 빚은 결코 갚아질 수 없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는 “무한히 선험적이며, 무한히 이질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와 타자와의 관계는 무한의 관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재론은 타자를 이론적 이성에 의해 재단되는 판단의 대상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타자를 유한한 존재로 다루며,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전체 (one of totality)이다.
레비나스는 윤리학은 십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의 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려운 자유: 유대교에 대한 에세이’ (Difficult Freedom: Essays on Judaism, 1963)와 ‘아홉 개 탈무드’ (Nine Talmudic Readings, 1990) 등의 종교적 저술에서 여섯 번째 계명의 윤리학적 의미를 연구했다.
레비나스의 다른 철학서적으로는 ‘존재와 존재자’ (Existence and Existents, 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발견하다’ (Discovering Existence with Husserl and Heidegger, 1949), ‘어려운 자유’ (Difficult Freedom, 1963), ‘존재와는 다른, 혹은 본질을 넘어서’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1974) 등이 있다.
○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이 레비나스의 철학의 바탕에 우리가 전제해야하는 것이 뭐냐면,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것이 뭐냐면 칸트의 대상철학, 다른 말로는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그걸 규정해요. 자기의 관점에 모든 것을 동일하게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 그래서 자기와 같지 않은 것들을 배제시켜버리고 자기와 똑같게 만드는 거죠. 그것은 뭐냐면 나와 다른 존재자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차이성을 다 무시해버리고, 배제시켜버리고, 소외시켜버리고 나와 같아지는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폭력이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럴 수 있겠죠? 예를 들어서 생활 속에서 그런 실례가 많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사회를 보게 되면 아직도 우리는 동일성의 요구가 굉장히 강한 사회예요. 여자는 이래야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그래서 교육 같은 것에서도 우리는 아직 그런 체제를 못 벗어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힘들어지는 부분도 많이 있는데, 일 레비나스는 전체주의와 동일성, 대상,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죠. 이때 주체라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주체도 아니지만 모든 존재를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처해진 ‘세계-내-존재’로서의 시간 안에서, 역사성 속에서 나름대로 피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일 때는 대상으로 보이고 차별적이 존재자로 보이지만 그 사람도 전체성을 탐지하는 면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존재자라는 거죠.
– 윤리란 무엇인가 : 제한된 존재자가 생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하는 금기
그래서 선생님들 책이 없기는 하지만, 조금 안으로 들어와 보면 레비나스가 갖고 있는 첫 번째 철학 사상이 뭐냐면 그 성서가 갖고 있는 유대이즘이에요. 끊임없이 무엇을 향해서 여기서 저기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 두 번째는 뭐냐면 여기 책에는 안나와있는데, 불란서에 모리스 불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2.20)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블랑쇼와 입장이 굉장히 흡사하게 나가요. 그러니까 이 문학에서는 아까 러시아의 대 문호들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가장 영향을 받은 책은 죄와 벌이에요. 그 외에 러시아의 대 문호들이 많잖아요. ‘죄와 벌’이라는 것은 도대체 우리들은 그냥 읽고 지나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그것을 속 깊이 규명해나가면 서 대체 죄라는 게 뭔가, ‘죄성’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벌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인가를 쫒아나가게 되죠. 그런데 모리스 블랑쇼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 사람이 만난 것이 뭐냐면 서구를 흐르는 문학이나 문학에서는 두 가지 죽음에 대한 것들이 꼭 등장해요. 죽음에 대한 태도가.
하나는 여러분들 <율리시스의 시선>이라는 거 아시죠? 자기 사랑하는 여인을 잊어버리지 못해서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데 아드레날린의 실이라는 것 있죠. 투명하고 가늘고 아차 하는 순간 끊어질 수 있는 실이에요. 그 실을 갖고 내려가는데, 그래서 돌아올 때도 그 동굴이라는 컴컴한 세계의 미로, 어디가 어딘지 구별할 수 없는 세계를 나와야 하잖아요. 그 실을 따라 나와야하는데, 내려가긴 내려가요. 사랑하는 여인을 붙잡고 올라오죠. 서양에서 참 재미있는 게 금기가 하나씩 있어요. 그냥 데리고 가라는 게 아니라, 금기라는 게 우리의 삶의 제한성을 말해주는 것이죠. 우리 존재자로서, 형체가 제한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금기는 뒤돌아봐선 안 된다는 거죠. 뒤돌아보는 순간 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죽음의 지하로 함몰되어버립니다. 자기는 거기서 다시는 그 여인을 만날 수 없게 되서 목 놓아 울고 실을 붙잡고 겨우 이 땅에 살아나오지만,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탄식.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탄식이 있게 되고, 또 하나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어요. 사실은 서양의 문학이나 철학, 문화에 어디든지 배경이 깔려있어요.
사이렌의 소리. 시-렌의 소리. 아름다운 계곡을 지나가는데, 독일에도 로렐라이 언덕을 가보면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노래를 불러서 사공들이 배를 젓다 사고가 나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런 유래들이 서양에는 로렐라이 뿐 아니라 비슷한 게 참 많아요. 그런데 그것도 다 여기서 나온 건데, 죽음의 계곡이잖아요. 죽음의 계곡. 이 계곡을 지나가는 자가 없어요. 다 난파되어 죽어요. 그런데 여기서 살아서 이 죽음을 횡단한 자가 있지요. 멋있지 않아요? 제가 이번에 수원 어디를 가서 글쓰기에서 이 이야기를 써먹었어요. 산 채로 죽음을 횡단하는 글쓰기. 그 전날은 글로 쓰는 사람은 삶으로 쓰는 그 글단 사람들이 제목이 너무 멋있대요. 제가 여기서 도용한 거예요. 그래서 이 계곡을 이르길 죽음의 계곡이라고 하는데, 이 죽음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듣지 않거나 그 여자를 보지 않거나 대책을 세워야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둘 중에 하나예요. 사공들에게는 눈을 가리고 노를 젓게 해요. 여자를 보고 소리를 듣고 하면 사공들이 배를 젓지 못해서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으니까. 자기 자신도 할 수 없으니까 몸을 돛대에 묶어요. 자기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눈으로 보고 들리기도 하지만 자기 몸은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우로, 좌로, 말을 하면서 횡단하죠. 죽음을 횡단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고 어느 한 쪽을 묶어야 해요. 눈을 묶거나 다른 것을 묶거나. 우리가 모든 자유, 제약되지 않는 전체로서의 자유를 갖고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거죠.
누구나 다 부분적인 자유를 갖고 살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항상 금지가 있다는 거죠. 이 금지는 뭐냐면 살아서는 갈 수 없어요. 자기 스스로 제한을 시켜야 한다는 거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거잖아요. 이 두 가지가 다 우리들은 어떤 일정한 존재자로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자라는 것은 존재하고 다르게 ‘자’라는 게 있어서, 이것은 물질, 형태, 제한된 시간, 제한된 공간에서 살 수 밖에 업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여기서 ‘자’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제한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작품에서는 금기가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가지 입장입니다. 그런데 금지 중에서 인간 누구에게나 잇는 금기. 그것은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선 결국 죽음에 빠져버리죠. 다른 쪽에서는 살아남죠. 여기서는 죽음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극으로 봐요. 비극의 탄생이 되죠. 그래서 서양의 문학작품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이 비극인데. 자기가 가느다란 실을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살아온 탓에 살았죠. 그러나 돌아보는 금기를 범했기 때문에 여자는 죽음으로 빠져버리는데, 사람, 인간이라는 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실. 누가 해줄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은 곧 자기가 자기에게 부여하는 윤리에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의 존재성으로 표현했을 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자기의 생명성. 그것을 붙잡고 가는 것.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윤리인데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아까 이야기 했지만 냉철한 이성, 냉철한 순간에서 잠시라도 눈을 감거나 놓쳐버리면 어디론가 떨어져버린다는 거죠. 굉장히 육적인간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비현실적인 인간이 되거나. 사실은 존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와 존재자가 같이 사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아까 말씀드렸지만 예수처럼 사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레비나스는. 한 순간도 자기의 비윤리성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타자와 더불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줄을 붙잡고 가는 것. 외줄타기 처럼 그렇게 갈 때만이 이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온전히 존재를 만나면서 사는 것이 되는 거죠. 하이데거하고는 굉장히 다르죠. 하이데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자기에게 열어 보이는 거죠.
– 하이데거의 철학 이해하기
하이데거를 조금 이야기하면, 레비나스를 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이해되어야 해요. 하이데거는 여태까지 사람들이 형이상학, 다른 말로 그 동안 ‘신’에 대해서 신을 창조주로 놓고 인간을 피조물로 보아서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를 경배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삶에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죠. 하이데거는 이것을 비판해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죠. 어떻게 인간이 창조주를 창조주라고 알 수 있느냐. 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어있는가, 존재분석을 해요. 인간이란 세계-내-존재라고 이야기해요. 무중력, 환경적 요인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동안 인간에 대한 개념은 한 번도 인간이 처한 환경이나 역사를 철학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거죠. 인간 자체를 이야기하고 인간의 이성을 이야기했는데. 앞에 사실은 헤겔이라는 친구가 역사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역사성을 논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인간과 더불어 분석한 사람은 하이데거예요. 하이데거가 철학사에서 공헌한 것은 인간의 철학문제를 역사성과 더불어 결부시켜 봤다는 것이 중요한데, 인간은 그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내에서, 환경적 존재라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의 의미고, 두 번째 의미는 사계 안에 있는 존재. 이 존재라는 말이 뭐냐면 이 존재라는 것, 세계-내-존재라는 말은 존재자라는 이야기가 되요. 존재자라는 것은 뭐냐면 존재가 세계 안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존재자가 되는 거예요. 존재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항상 있어요. 우리들 피조물로서의 존재자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하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담아놓은 우리를 이야기할 때에요. 어떤 사람은 피조물로서의 존재인 우리를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존재를 담아낸 존재자로서의 우리를 보죠. 그렇죠? 이해가 되세요?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면 세계 내에 있는 피조물이고 이렇게 보면 우리는 존재가 자기를 드러낸 그릇으로서의 존재자예요. 그런데 기초존재론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왜냐면 이 존재를 알기 위해서 기초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존재를 만나기 위한 길로서 인간을 먼저 분석해보니까, 인간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있다. 이 환경이라는 것이 뭐냐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존재지요. 그래서 존재가 시간을 입을 때 공간 안에 존재해요. 그 이야기는 역사-내-존재라는 거예요. 역사 속에 사는 것이지 역사를 초월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역사안의 존재는 그러나, 항상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존재를 찾아가는 것으로 칸트는 이야기했는데, 하이데거는 조금 다르게 봐요. 이것이 전기에서 인간을 본성을 통해 존재를 찾아가는데, 후기에 가서는 거꾸로 존재가 자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존재자가 되요. 이것이 기독교로 말하면 ‘회심’이 되나요? 사울이 바울 되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사람이 거듭났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이 사람이 거듭날 것이 뭐 있나요?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거듭났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똑같은 사람인데 이 전과 다르다는 거죠. 그것은 결국 이 사람이 얼굴이 바뀌었겠어요? 생물학적으로는 세포가 끊임없이 바뀌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다름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전에는 세계 안에서 환경 안에 있는 피조물로서의 세계 내 존재로서의 시간과 공간, 사람을 보았는데 가만히 보니 다른 입장에서는 존재가 역사 안에서 시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인 거예요. 그래서 이 후기 쪽에서 이해하면, 존재는 존재자 없이는 존재인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어디서 자기를 드러내요? 그래서 존재자와 존재는 서로 필요한 관계가 돼요. 서로 필요해요. 존재자는 자기를 있게끔 하는. 자기가 있기 위해서는 존재가 있어야 하잖아요. 또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자 없이는 존재를 열어 보일 자리가 없지요. 그래서 공속관계가 되어져요. 이 세상에서 존재자가 어떻게 바뀌게 되냐면, 존재가 자기를 개시했다가 감추었다가 개시했다가 감추었다가 하는 작용에 의해서 존재자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달리 삶을 살아가게 되죠. 그래서 주권이 어디로 가느냐? 존재로 바뀌어요. 그래서 하이데거에 의해서는 인간 중심의 존재자 차원에서 존재로 넘어가게 되죠.
–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하이데거의 후기철학
[청중 질문]
그게 굉장히 커다란 차이에요. 그래서 레비나스는 교회에 가면 예배 보다가 교회 문을 나오면 실생활과 관계 짓지 못하고 사랑하고 다 잘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잖아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게 예수이기 때문에 따로 분리되어질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런 요소가 없지 않아 있지만, 하이데거는 1부 2부, 전기와 후기가 있잖아요.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전기의 길은 좋게 받아들이고 후기의 길은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왜 그렇게 보냐면 하이데거가 모든 존재자로서부터만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에 기초존재론이라고 존재로 향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2부에서는 전환되죠. 존재에서 존재자에게로 내려오는 길, 2부에서 얘기하잖아요.
이때는 마치 하이데거가 마치 존재가 있어서 모든 존재자들이 이 존재로 하여금 하나의 부분으로서 드러내는 역할. 그래서 이 전체로서의 존재고, 존재자들을 부분으로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하이데거도 그토록 서양의 철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존재론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다시 비판하려고 했던 것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예. 그래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전기를 굉장히, 취하는 거예요. 이 분은 인정하기 싫다.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이데거, 여러분들 얘기 다 아시죠?
조금만 이야기하면, 그 이전에 하이데거가 비판한 것도 레비나스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뭐냐면,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이 뭐냐면 이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 우리들을 구체적이지 않은 존재와 구별 지어 서구 형이상학이 진행되어 온 것을 비판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의 존재자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부터 시작해요. 누구.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자일 때가 소문자 sein, 이것서부터 시작해요. 이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in velt 세계 안의 존재에요. 그래서 세계 안의 존재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점하는 존재다. 그러다 보니까,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그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존재라고 하는 거죠. 현존재는 소문자 sein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분석해 들어가 보니까 sein 이라는 것은 물질,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가 있다. 존재자로부터 존재를 만나요. 이때 존재는 대문자 Sein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보통 피조물로서의 존재로 봤는데 다시 존재를 만나고 보니까 Da-Sein 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이때는 이 Sein이 물질과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온 Sein이죠. 이해되세요?
– 중세, 근대철학의 세상 인식과 신(神)
맨 처음에 하이데거 철학이 이렇게 출발하잖아요. 하이데거 철학이 고대 중세 철학을 비판하면서 나오는 건데 왜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에 가서 신을 찾고 빌고 신에게 기도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살려달라고 구원해달라고 빈단 말이에요. 신에게 비는데, 신이 인간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논거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신이 있다고 중세에서 그랬잖아요. 신이 있는데 그럼 신은 어디 있느냐. 이 신은 완전한데, 늘 변하는 불완전한 세상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있어야 될 곳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이 초월의 세계라고 뒀어요. 그게 중세잖아요.
그런데 근대에 오게 되면 만약에 초월의 세계에 있는 신이 변하는 이런 불완전한 삶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불완전한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신을 알 수 있느냐. 그것이 인식론으로 가죠. 플라톤은 생득개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이 있었던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기 때문에 생득으로 본연적인 관념으로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중세로 넘어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의 빛을 통해서 신이 은총을 베풀어 풀 한포기 동물 이런 것을 통해서 자연의 섭리, 하느님의 손길을 깨달아서 신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 논쟁들이 깊어져가면서, 실질적으로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어떻게 세상에 악이 존재하느냐, 어떻게 저렇게 슬픈 일이 가능하냐. 그것은 신이 허락한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잘못이냐. 그래서 선악에 대한 물음을 묻게 되죠. 그런데 그 동안에 신이 완전하려면 신 아닌 게 없어야 되잖아요. 신이 완전하려면 신 아닌 것이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다보니까 신의 전능성, 완전성을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악이나 슬픔도 신의 영역 안에서 나온 것이어야 해요. 선이 구제한 것이 악이다. 선이 있어야 할 장소에 부재하는 것이 악이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이어야 할 때 그렇지 못한 것이 악일 수 있다는 논리들이 나와요. 그러면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 무엇에 근거하여 우리가 적극적으로 했다. 아니면 이것이 나쁘다, 이 사람은 좋게 느끼고 저 사람은 나쁘게 느끼는데. 같은 상황에서 이 사람은 행복하게 여기고 저 사람은 슬퍼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악한 것이냐 선한 것이냐 이런 물음이 생겨요. 그러다보니까 무슨 문제로 넘어 오냐면, 이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 어떤 사람이 그것을 선하게 여기느냐 악하게 여기느냐 문제이지, 선과 악은 애초에 있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 하게 돼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 동안 선이시라고 그랬고, 하느님의 선한 것에 반하는 것을 악이라고 그랬는데, 하느님은 선이나 악이냐 또 이런 문제를 물고 나오면서, 그렇다면 선한 하느님이 있다, 좋다. 저 세상에 있고, 여기 인간의 세상은 악하게 돌아가고 그렇다면 하느님이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 무슨 관계에 있느냐.
그러면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있는 하느님,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그것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들이 유한하고 죽어가기 때문에, 죽지 않는 유한하지 않는 무엇을 빗대어 신이라고 한 것이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져요.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신도 없고(관념적인 신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무엇에 의해 돌아가느냐. 무엇에 의해 사람들은 살고 무엇 때문에 좋고 나쁘다고 하느냐고 묻게 되면서 하이데거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 뭐냐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항상 인간보다 못한 것과 인간보다 우월한 것 인간보다 못한 게 뭐냐면, 동물, 식물, 광물로 나가고, 인간보다 우월한 것은 신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므로 신은 인간처럼 부족하지 않아야 하고 완전해야 하고 선이어야 하고 좋아야 하고 모든 우리들의 실재하는 늘 그대로 있는 항존적인 존재여야 신이라고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 중세의 신(神) 관념을 넘어 : 하이데거의 인식
그런데 하이데거가 볼 때 이런 구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다 더 점점 더 나은 목적론적 입장에서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니냐. 그러므로 ‘만들어진 신’이 아니냐는 거예요. 신이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만든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런 신은 그러므로 신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이 신을 니체가 형이상학으로서의 신을 망치로 다 부셨다고 하고 그것을 이어받아 하이데거가 이런 신 앞에 가서는 더 이상 기도도 춤도 우리들이 간청을 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있느냐. 왜 있다가 죽느냐. ‘있다’라는 것이 뭔지 분석하는 학문을 기초분석론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분석을 할 때 사람이 동물이 되고 식물이 될 수 없으니까 더 알 수 없으므로, 사람이 제일 잘 아니까 사람부터 분석해 들어가 보자. 그래서 기초인간분석론, 기초인간론이라고 이야기하죠. 분석에 들어가 보니까, 우리는 단순한 영적,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어떤 힘이, 내가 나로 있게끔 한다는 사실을 찾았다. 인간은 영원히 사는 존재도, 홀로 있는 존재도 아니오, 세계 내에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입고 시간과 더불어서 같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자가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분석해 들어가니까 인간은 ‘내가 있다.’는 사실, 존재한다는 사실이 뭐냐, 그것은 우리, 존재자, 구체적인 나를 존재케 하는 그것이 바로 존재다. 그 존재가 뭐냐 뭐 힘이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죠. 그런데 여기까지가 바로 하이데거의 1부의 개략적인 내용이죠. 그렇다면 존재가 뭐냐, 하이데거가 그 다음부터는 이런 관점에서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 자체로 사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상학적 방법이라고 하죠. 하이데거를 그래서 현상학적 해석자라고 이야기 하죠. 보통 하이데거를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은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대 철학에서는 현상학적 해석자라고 해요 바로 이 때문에. 그래서 존재를 그 자체로 보니까, 존재라는 것은 그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를 있게끔 해야 하니까 움직이잖아요, 역동적이잖아요. 끊임없이 존재자를 있게끔 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를 숨기고 드러내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구체적인 존재자잖아요. 그럼 이 사람이 있게끔 하는 존재가 돼서 숨고, 죽은 사람이 숨는 거죠. 사람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 그러니까 존재는 존재 전부, 전체성이 동시에 그대로 개시되어 질 수 없는 것. 그래서 개시와 은폐의 운동 아래 있는 것. 개시는 생명을 존재자로 드러내는 것, 은폐는 죽잖아요. 사람이 그럼 자기가 은폐되어 지는 거잖아요. 존재와 은폐 개시의 운동으로 존재를 설명해 내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다보면 문제가 발생하는 게 레비나스가 볼 때는, 그러면 존재는 또 존재자와 별개로 따로 떼어져서 존재라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게 아니냐,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2부에서 전체성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 아닌지 비판하는 거예요.
–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자’
[청중 질문]
고정불변 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말하자면 이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레비나스가 볼 때는 존재가 따로,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만약에 있다고 가정하면 숭배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로 돌아가게 되잖아요. 레비나스는 그것이 못마땅했어요. 존재는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다. 하이데거도 전반엔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있을 수 없어. 존재자는 오로지 존재자로서만 존재해. 레비나스는 그것을 강하게 붙들고 나가는 거예요. 하이데거의 후반부는 레비나스가 받아들이지 않고, 이 전반부 존재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어요. 그 이야기를 바꿔 말하면 존재는 인간보다 더 나은 완전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존재라는 것이 뭐냐면 존재자로서만 드러나는 겁니다. 존재자가 존재가 되요. 굉장히 불교에서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부처라고 설명하잖아요.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불교 설명할 때, 하나의 상이 있고 거울이 있으면, 거울이 나를 비추고, 또 나를 비춘 거울이 또 비춰서 번져나가죠. 이게 부처에요. 나도 부처고 거울에 비춰진 이것도 존재자 측면에서 부처에요. 다 부처에요.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인식의 차원에서 사람들이 달리 언급한다 뿐이지 사실은 하나에요. 있는 건 하나죠.
어떤 펜션에 갔는데 삼면이 거울로 돼있어요. 그리고 화장대가 있었는데. 제가 거기 서니까 여기서도 보기고 저기서도 보이는데. 산수 입장에서는 세 개만 보여야 되는데, 이게 카메라 용법에서 쓰이는 것처럼, 세 개만 보이는 게 아니라 무수히 보이더라고요 제가. 여기에서 보이는 것이 이쪽으로도 무한히 보이고 저쪽으로도 무한히 보이더라고요. 내가 딱 하나인데, 만약에 이것을 이름하며 존재라고 하면 사실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과는 달라요. 존재자라면,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거죠. 그런 측면은 레비나스는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무수히, 사실 하이데거도 전기 부분은 존재란 존재자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후기에 가서는 존재자보다 월등한 존재를 상정했다는 것을 비판하는데, 레비나스는 전기 부분을 받아들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말하고 행위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자를 통하지 않는 존재의 사랑이라든지, 존재자를 통하지 않고 존재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냥 ‘나 하느님 사랑합니다.’ 가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자를 통해서 해야 돼요. 그래서 존재자로 있음 그 자체가 하나의 책임이 되는 거예요. 존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면 신이 따로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을 사람으로 물질적인 존재,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을 열어 놓는 거죠. 그것이 곧 거울에서 비춰지는 여기에 이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알듯이, 그 사람을 사랑함이 곧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거죠. 그래서 그 앞에서 자신이 해야 될 바, 어떤 부분이나 가리거나 선택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채무를 온전히 다 하는 거예요. (동서Art치료문화연구소 인용)
○ 이진우의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비교연구
– 레비나스의 탈현대적 도전: 존재의 경험과 타자의 사유 (출처: 이진우, ‘이성은 죽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 서울: 문예출판사, 1998, p.209-216)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현대의 이성 위기를 극복하고자하는 포스트모던 사유에 중요한 방향을 설정해 주고 있다. 그것은 최고 존재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체성으로부터 다원성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동일성보다는 차이에 사유의 우선성을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차이는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두이다. 우리는 여기서 차이의 문제를 다른 문제, 즉 타자(他者)와 연관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와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차이가 생성되고 분산되는 다양한 과정을 철학적으로 해명한다면, 존재론적 차이를 타자와 연관시켜 생각함으로써 형이상학의 문제점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사상가는 아마 레비나스일 것이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 레비나스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타자가 동일자에 의해 흡수, 지양되는 존재론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지배의 존재론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으로 타자의 형이상학을 발전시킨다. 둘째, 형이상학의 근본 특성은 자기자신에로의 반성적 환원이 아니라 절대 타자로의 초월이다. 셋째, 절대 타자에로의 초월은 신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대상으로의 소유될 수 없는 존재”의 성격을 절대 타자로 설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레비나스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타자의 철학은 실제로 하이데거가 설정한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전통 형이상학의 물음은 존재자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원칙과 근거에 대한 물음이라고 분석한다. 명사로 대답되어지는 이러한 물음을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주도 물음이라고 명명하면서, “무엇” 물음의 절대화는 결국 존재의 의미를 최고의 존재자로 환원시킴으로써 존재론적 차이의 망각 야기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결국 “존재자에 의한 존재의 지배”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자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보다 더욱 원천적인 물음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자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의 물음이다. 관계를 전제하는 실존 물음은 차이와 관계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본질 물음을 가능케하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이를 근본물음이라고 명명한다. 동일화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존재자를 지배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존재자에서 존재에로”의 방향을 택하고 있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게 공통된 문제는 동일화의 논리와 인식을 통한 존재자의 지배이며, 공통된 물음은 “지배될 수 없는 존재자는 어떤 것인가?”이다. 어떻게 존재와의 차이와 거리를 제거하지 않고서도 존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구별된다. 레비나스는 모든 차이들을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전통 철학을 하이데거와는 달리 “내재성의 존재론”이라고 명명한다. 모든 존재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있는 존재의 성격은 따라서 전체성이다.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차이도 결국은 제거되고 지양될 것으로 파악하는 전체성의 철학은 “전쟁의 존재론”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자에게 지배될 수 없는 거리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타자에로의 초월을 전제하는 형이상학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대상화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위하여 하이데거와는 달리 “존재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의 초기 철학을 대변하는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의 차이는 동일한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전통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그리고 후자는 전통 철학을 존재론으로 파악하는 데에만 있는 것인가? 존재자에게서 완전히 대상화될 수 없고 또 지배될 수 없는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하고 레비나스는 타자라고 한다면, 존재와 타자는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인가?
레비나스는 “존재자에서 존재론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존재자는 인식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다. 존재자에게 인식될 수 없는 타자성은 따라서 항상 부재의 형식을 취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자에게 고유한 타자성의 현재를 “존재자 없는 존재”라고 명명한다. 하이데거가 망각된 존재론적 거리를 현존재의 선험적 개시성을 통해 상기시키고자 한다면, 레비나스는 전통 철학이 지향하고 있는 거리의 제거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인식될 수 있고 대상화될 수 있는 사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무”(無)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부재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부재의 현재”를 밤과 불면에 관한 현상학적 서술을 통해 명사화될 수 없는 익명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주장과는 달리 존재를 존재 자체로부터 사유하고자 하는 하이데거도 무를 존재의 결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무는 “규정성의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피규정성의 본질적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아무런 이의 없이 레비나스의 존재와 타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모두 모든 것을 동일자로 환원하고 현재화하는 전통적 내재성의 철학에 대립하여 부재의 존재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부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와 현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는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세계 속에 현재하고 있는 인간은 어떻게 우리로부터 물러서는 존재 자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지각하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념을 제시한다면, 레비나스는 존재자에게서 대상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태도를 내놓는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자 없이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론적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다. 하이데거는 주지하다시피 존재의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에스 깁트”(Es gib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에스”(Es)는 비인칭 주어이고, “깁트”는 ‘주다’는 뜻의 동사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존재자가 있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가 자신에 고유한 것을 내어준다는 “탈소유”의 사건이다. 이와는 반대로 레비나스는 특정한 존재자를 객체화하는 존재의 부재방식을 “Il y a”로 표현함으로써 “존재가짐”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익명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욕망은 항상 “존재의 소유”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 존재의 본래적 성격이 박탈된다는 점에서 – 존재의 탈소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존재의 성격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소유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각각 존재론적 차이와 타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존재가 현재하고 부재하는 방식의 두 측면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존재자의 존재는 불가피한 사실이다. 익명적으로 나타나는 존재도 그 자체에 소유와 폭력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듯이, 존재자도 그 실존 방식에 있어서 소유와 지배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의 출현을 대체로 두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첫째, 동사로 서술될 수 있는 존재의 익명적 사건으로부터 명사로 지칭할 수 있는 존재자의 출현은 존재에 대한 지배와 소유로 이해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존재자는 존재의 지배와 왜곡인 것이다. 둘째, 주체의 출현은 하나의 존재자로 서있을 수 있는 “자리잡기” (Hypostase)의 방식으로 실행되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시간적 현재와 공간적 물질성의 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존재에 대해 존재자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의 거주를 연상시키는 자리잡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이다. 자리잡기의 개념을 통해 레비나스는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결국 내재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자리잡기의 사건은 현재이다”라는 레비나스의 핵심명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존재자의 현재는 지속적인 자리잡기의 사건을 의미한다. 둘째, 존재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존재는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순간의 현재를 형성한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는 결국 존재에 대한 예속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소유할지라도, 모든 것과의 만남을 통해 결국에는 자기자신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재성은 실존과 실존의 작품과의 동일화를 의미한다.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실존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타자와 구별하는 주체의 “홀로서기”이다. 주체는 현재의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으며, 지속적인 자리잡기를 실행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방식을 고집하는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대가를 치루고 자유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자리잡기를 통해 얻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주체의 내재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내재성은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모든 차이와 구별을 제거하는 전쟁과 지배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새로운 초월은 동일자인 자기자신에로의 회귀가 아닌 타자로의 이행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 이편에 머물면서 동시에 존재자의 물질성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존재 초월은 그 속에 철저한 개인화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을 때” 진정한 초월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명제는 따라서 레비나스의 반-하이데거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타당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대상화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실존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신으로의 회귀를 초월로 파악하였다면, 레비나스는 자신으로의 회귀는 항상 내재성과 전체성으로 귀결된다는 이유에서 절대 타자에로의 이행을 초월로 이해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자신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염려의 가능성을 논구하였다면, 레비나스는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할 때에만 주체의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본다면, 결국 인간의 존재는 바로 초월인 것이다. 자신을 수단으로 보지 말고 목적으로 볼 것을 요청하는 현대의 위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초월의 형이상학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인간을 天, 地, 人의 구조적 관계에서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존재자를 설정하지 않는 세계내적 초월론을 발전시킨 동양의 이성은 서양 이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과연 차이와 타자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초월 형식을 제시할 수 있을까?(열린토론 광장 인용)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