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가문의 영광인가, 가문의 수치인가? 룻과 나오미(2)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룻과 나오미
이삭 줍는 여인의 이미지와 함께 사뭇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사 시대에 기근이 들어 베들레헴 출신의 한 가족이 모압 땅으로 임시 이주를 했다. 그 가족은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이었다. 이방의 땅인 모압에서 엘리멜렉은 세상을 떠났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불행히 두 아들도 죽고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시어머니 나오미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세 과부들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했다.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한사코 나오미를 따랐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 룻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나오미의 부유한 친척 보아스를 만난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임에도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시는 룻을 어여쁘게 여겼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현명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해 단절된 남편의 가계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규범을 따라 보아스가 룻에게 청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그 뜻은 이뤄졌다. 이렇게 해서 룻은 당당하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고 아들을 낳아 단절된 가계를 잇는 몫까지 감당했다. 이렇게 해서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으로 기억 되었다.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던 규범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는 사실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지키고 있던 규범은 두말 할 것 없이 가부장제의 규범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 가계를 잇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두 여인에 관한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 규범과 관련해 주인공들의 역할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로서 두 가지 관습이 나온다. 그 첫 번째가 시형제결혼법이다. 이 시형제결혼법은 우리나라 고구려 시대 형사취수제와 같은 것으로 한 형제가 죽으면 그 부인이 다른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이다. 이 관습은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는 장치이면서, 남성 중심의 혈통인 가계를 잇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룻이 이 규범에 구애받아야 하는 처지는 아니었다. 가계를 이을 수 있는 어떤 남성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여자는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던 것은 이런 사정을 유념한 것이었다. 그러나 룻은 이어야 할 가계가 이미 사라진 상황인데도 시어머니를 따른다. 여기에서 롯은 시형제결혼법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습을 거스른 셈이다. 그렇게 관습을 거슬렀지만 결과적으로 이전의 가계를 복원한 그의 역할 때문에 그 반전은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그의 인상을 더해준다. 그러나 이 계기는 또 한편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록 주인공들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 안에 있었고 그 틀 안에서 그들의 몫이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룻과 나오미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강인한 여성상과, 함께하는 여성의 연대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 룻이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했다면 당연히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룻 자신도 또 다른 남성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숙명적인 여인상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 여인들에게 보상의 기회가 마련된다.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반전의 기회가 마련되는데, 그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이 ‘고엘’법이다. ‘되사다, 되찾다, 구속하다, 속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에서 파생된 고엘 법은 잃었던 땅을 되찾도록 하는 법이다. 룻의 시댁 엘리멜렉 집안의 친척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밭을 사들여 그 유산을 보존해야 할 책임을 진 집안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룻은 결국 그와 결혼해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은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는 아들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룻은 끊어진 혈통을 잇고 그 유산을 보존한다. 이 사실은 남편도 없고 땅도 없는, 완전히 주변화된 여인들이 다시 중심으로 진입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출신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렇게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충분한 의미를 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반전은 이야기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숨은 의도에 있다. 당당하게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 나서 삶을 개척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잃어버렸던 한 가계를 복원한 주인공이 바로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서슴없이 밝힌다. 그 여인이 복원한 가계에서 이스라엘의 성조 다윗이 태어났다. ‘나오미의 아들’로 불린 룻의 아들은 오벳이었고, 그는 이새의 아버지, 곧 다윗의 할아버지였다. 이 이야기가 순수혈통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다윗의 한쪽 조상이 모압 사람이었다는 전승이 있었고, 다윗이 사울과의 관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모압으로 피신한 사실도 있었다. 아마도 순수 혈통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국부이자 민족적 정통성의 출발점으로서 다윗을 순수한 이스라엘 정신의 표상으로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의 이야기는 마치 가시처럼 그 순수한 믿음에 흠집을 낸다. 자신들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조상이 사실은 이방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고 밝히는 이 이야기는 편협한 혈통주의와 국수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 의도와는 달리 정반대로 읽힐 수 있는 소지도 있다. “이방 여인도 그렇게 헌신적이었는데 너희들은 어떻냐?”라는 의도로 해석된다면 전혀 다른 성격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야기의 성격은 분명하다. 어째서 굳이 신성불가침의 대상인 성조 다윗의 직계 조상과 관련된 사실을 발설했을까? 그것은 바로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과연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룻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장벽을 쌓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그 장벽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보호벽이 될지도 모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통곡의 벽이 되고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룻은 그 벽이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상이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