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가문의 영광인가, 가문의 수치인가? 룻과 나오미(1)
‘끼리끼리’라는 이름의 병폐
언젠가 가수 인순이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위 ‘혼혈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아픔들을 쏟아놓았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단일 민족의 오천 년 유구한 역사’라는 말을 들을 때면 자신은 그 순수한 민족의 혈통을 더럽히는 죄인으로 여겨져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두려워서 결혼할 생각마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또 걱정이었다.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곱슬머리가 아니었고 피부색이나 생김새도 보통 한국 사람과 같아 얼마나 안도의 한습을 지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인순이의 아픈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순수혈통주의에 매여 닫힌 사회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단일 민족의 오천년 역사’란 사실 허구의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세계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한국 민족이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살면서 정체성을 형성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살아온 역사는 고려 시대 이후 대략 1,000년일 뿐이다. 그 이전에는 북방 몽골 계통이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도 혈통상 다양한 갈래가 뒤섞여 있었다. 1,000년의 역사 가운데서도 절반의 시기를 차지하는 고려는 매우 개방적인 국가로서 여러 민족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렇게 보면 반도 안에서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민족 집단을 형성하고 살아온 역사는 5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떤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이겠거니와 우리 민족의 역사도 여러 민족들의 교류 가운데서 존속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많은 다양성을 체험했고 또 스스로 구현했다. 그런데도 단일민족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과거 역사에서의 다양성과 오늘 현실에서의 다양성을 애써 부정하는 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민족적·국가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상만은 아니다. 좋게 말해서 순수혈통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쉬운 말로 표현하면 ‘끼리끼리’ 현상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끼리끼리’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향우회나 동문회가 우리 사회만큼 성행하는 곳이 또 있을까? 요즘은 그릴 리 없겠지만, 한때는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경우 딱지를 면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 “같은 식구끼리 왜 이래?” 하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빽’이면 다 통하는 사회, 정실(情實) 관계로 얽히고설킨 사회의 모습은 ‘끼리끼리’의 문화, 동일성의 문화의 실체다. 가수 인순이의 슬픈 사연은 혼혈인 개인의 일만은 아니다. 인순이는 가수로서 소위 성공했기에 만천하에 그 사연을 토로할 기회라도 누렸다. 그러나 그 밖의 많은 혼혈인들 그리고 인종을 떠나 경제적인 차이 때문에 그 어떤 순수한 집단에 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픈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을까? 21세기에는 더 이상 순수혈통주의만이 문제가 아니다. 신자본주의 늪에 빠져서 가진 자들만 끼리끼리 뭉치려는 ‘순수자본혈통주의’ 역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겐 또 다른 높은 벽으로 다가온다. 몇 일전 생활고를 버티지 못하고 세 모녀가 동반 자살했던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끼리끼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것은 집주인에게 남긴 밀린 공과금과 집세 그리고 유서 아닌 유서,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를 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 밖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이 비극은 과연 누구의 탓일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능력이 없는 그들 탓일까? 아니면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인식도 못하고, 먹고 살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가는 이 ‘끼리끼리의 사회’ 탓일까? 흔히 아름다운 효부 이야기로만 기억되는 룻의 이야기는 그 순수혈통주의에 대해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
가시 돋친 아름다운 이야기
룻 이야기는 아무런 이의 없이 편안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의도를 띤 작품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와 새롭게 민족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인 시대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기록된 사실 자체가 강력한 의도성을 띤다. 이 이야기의 한 초점은 주인공인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 민족 정통성의 정점인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기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교훈을 의도한 것이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을 재건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그 정책으로 이스라엘이 재건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는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책으로 사회는 경직되었고 그 사회 안에서 숨을 죽여야만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조 다윗의 혈통이 이방 여인에게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교훈의 의미를 강하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룻 이야기는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요나서와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룻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가시 돋친 이야기인 셈이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