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나오는 용기, 에스더(2)
흩어진 유대인의 고난과 희망
에스더의 이야기가 정경에 낄 수 있느냐는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의 반열에 올라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사실 그 민족주의적 경향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시대 통속적인 민족주의 경향에 잘 부합했기에 유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고 그 결과 성경에 편입된 것이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기록된 시점은 대개 BC 130년경 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이 이야기가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시대보다 350여 년 뒤로 유대 민족이 한때 독립 왕국을 일구고 있던 시대였다. 대제국 페르시아가 사라진 후 근동의 패권은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그리스로 넘어갔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유대 민족은 더 이상 독립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종교 제도와 사제를 중심으로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시절과 그리스제국 초기 시절의 종교적 관용 정책 덕에, 비록 완전한 독립국가 형태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후 분할된 그리스제국 시대, 그 가운데서 셀류시드 왕가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시절 유대인들은 가장 극심한 박해와 모욕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 역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민족 독립 운동의 열기가 고양되었고 마침내 마카비 혁명의 성공으로 독립 하스몬 왕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 시기는 어떤 시기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강렬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살아왔던 그들에게 독립 왕국이 다시 회복되었으니 그 민족주의 열풍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스더 이야기는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런데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이야기는 에스더서 이외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스더라는 이름을 가진 페르시아 왕후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만이나 모르드개 같은 인물도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유대인 학살 사건 계획도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스더 이야기는 사실 바벨론의 신화 구조를 따라 치밀하게 구성된 일종의 소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단순히 가공인 것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라 없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강한 위기의식을 드러내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진실성을 지닌다. 주인공 에스더와 그의 민족이 처한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일상화되어 있던 위기감을 드러낸다. 배경으로 설정된 페루시아 시대에 거국적이고 거족적인 단일한 사건으로서 유대인 학살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지적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급기야는 셀류시드 왕조의 극심한 박해를 받기까지 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후의 대로마 항쟁지 마사다 성채에 올라 “다시는 나라를 잃는 비극이 없기를!(Never Again!)”을 외친다고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영원한 기억’이라는 뜻의 야드바셈이라는 이름을 붙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세워놓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한다. 이 기념관은 통곡의 벽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당대의 마사다 성채요, 통곡의 벽이요,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 아픈 기억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에스더의 이야기는 다시는 비운을 겪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의 희망의 표징이다. 그러나 오늘의 마사다 성채, 통곡의 벽,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유대인들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한편 유대인들이 그 땅의 또 다른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잔혹한 행위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그 이중의 칼날 같은 속성을 지닌다. 그것이 에스더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는 사연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결단해야 하는 순간
한편 그 주인공 에스더의 역할 또한 이중적이다. 에스더는 철저하게 남성주의의 법도를 따라야만 자신의 존재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치지에 있었다. 와스디 왕후 폐위사건에서 밝혀진 것처럼 왕후로서 에스더는 그런 운명에 처한 모든 여성의 귀감이어야 했다. 실제로 에스더는 그 귀감으로서 몫을 훌륭하게 해낸다.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기로 나섰을 때조차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틀을 지키는 것 자체가 민족을 구하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 지위에 어울리는 치신을 해야만 민족을 구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법도에 충실함으로써 에스더는 위기에 치한 민족을 구해냈다. 그 점에서 에스더는 철저하게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규방에 갇혀있으면서도 민족의 구원자로서의 몫을 감당해낸 요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에스더의 이런 면모에서 강고한 남성주의와 민족주의의 공모 관계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에스더가 만들어낸 공모는 아니다. 공모가 있다면 그것은 에스더를 둘러싼 세력들이 만든 것이다. 전능한 왕 아하수에로 아래 하만과 모르드개의 미필적 고의성 공모가 에스더의 희생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왕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시혜자로 남으며, 그 아래 사람들은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는 승패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모르드개가 승리했고 그 승리의 영광을 희생의 주인공 에스더와 함께 나눴다. 아마도 남성주의라는 잣대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그런 결론으로 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민족주의에 있다. 민족주의는 마치 양날의 칼과 같다. 그것은 억압의 무기가 되기도 하며 해방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남성주의의 아성에 갇혀있었던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의 특별한 역할에 주목하는 것은 그 양날의 한쪽 기능을 쉽게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이 또 다른 민족을 억압할 때 억압을 받는 민족의 입장에서 민족의 존립과 정체성의 유지는(비록 잠정적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절체절명의 운명적 과제가 된다. 바로 그 상황에서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유대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자신의 처신 여하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에스더는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결단했다. 에스더는 결코 여걸도 아니었으며 민족 해방의 투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결단은 민족을 위기에서 구했다. 에스더의 결단이 위대했던 점은 그 결과 때문이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다짐했던 그 비장함에 있다. 그 비장함은 그 결단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자신의 지위도, 나아가서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잃을 수 있었다. 결국 에스더의 선택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거는 결단이었다. 그 결단을 주저했더라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유대 민족의 파멸은 분명했다. 에스더 자신은 민족의 파멸과 함께 공멸했을 수도, 아니면 끝내 자신의 지위 보존에만 연연하며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을 괴롭게 살다간 이름 없는 왕후로 남았을 수도 있다. 에스더가 실존 인물이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이미 수백 년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위기를 겪고 있었던 유대 민족의 상황이 그러한 인물상을 그렸다는 데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에스더는 단일한 사건의 독보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졌지만, 위기에 처한 민족 현실에서 있었음직한 수많은 에스더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에스더의 이야기는 그 선택의 결단을 새삼 환기 시킨다.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될 성경 인물들
그동안 성경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하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교훈들을 엿볼 수 있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매번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역사 속의 성경인물들과 사건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결과물로만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과거의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며 계획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이천년 전에 쓰여진 고서(古書)가 아닌 21세기에도 우리에게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동안 선택한 인물들은 많은 설교자들과 성경공부로 인해 적지 않은 부분을 무비판적으로 학습되어 왔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런 인물들을 필두로 전통적인 해석으로 오랫동안 고착화 되어 있는 이야기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성군이라는 다윗의 삶에 전쟁의 피 비린내가 끊이지 않았으며,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는 솔로몬은 도리어 그 지혜로 파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성경은 아름다운 성공의 이야기만 전하지 않기에 이렇게 평소 익숙하지 않았던 어두운 사실들을 짚어 봄으로서 그 인물에 대해 통합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성경이 바라보는 시각은 항상 약자의 편에 있다. 멸시 당하는 여성들, 절규하는 사회적 약자들, 실패한 지도자 그리고 늙은 사람들과 같이 낮고 약한 자들 편에 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인물과 사건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새로운 시각이 펼쳐질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마친다. 감사합니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