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새로운 복의 기준을 보여준 아브라함
들어가며
이번 회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전통적인 시각이라 함은 성경에 여러 다양한 이야기와 메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결론을 내린 후에 여러 이야기들을 결론에 맞추어 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에 가장 경계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Prokrūstēs)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하여 집에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리고, 길면 잘라버렸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관용구는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행위를 감수하면서 자기가 보고 말한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집과 편견을 말할 때 쓰인다. 어찌 보면 사람은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내면에 숨겨져 있다. 이것은 비단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대면하거나 배움의 현장 속에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편견과 아집은 우리로 하여금 편협하고 비이성적이게 만든다. 몸의 나이보다 생각의 나이가 그 사람의 젊음을 드러내듯이, 어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성(Openness)이야 말로 젊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익숙한 내용, 뻔한 설교
때로는 성경 읽는 사람이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서 프로크루스테스식의 태도를 보게 된다. 단편 소설을 읽어도 그 안에는 여러 메시지들이 들어있다. 몇 해 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성도에게 한 가지 고민을 들었다. 고민의 요지인즉, 설교 시간에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주보에 나오는 본문과 제목만 읽어봐도 설교의 서론, 본론, 결론이 다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은혜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본인이 열심히 성경을 읽는 탓에 목사님의 설교방식이나 성경풀이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성경에 대해 잘 알 것이고 매주 설교에다 성경공부까지 해왔을 것인데, 이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고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게 될 아브라함의 핵심을 흔히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알고 있다. 믿기만 하면 다양한 축복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쏟아질듯이 이야기 된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전통적인 해석이 말하는 믿으면 복이 온다는 일차원적인 복의 의미를 넘어, 결과보다는 과정에 기반을 둔 새로운 복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하자.
자식들 때문에 머리 아픈 아브라함
한 부자가 세상을 떠나면 보통 그 자녀들 가운데 불화가 생긴다. 대게 그 분쟁의 중심에는 재산 상속이 관련되어 있다. 뉴스에서도 나오듯이 같은 재벌가의 자식일지라도 그 사이에 재산 문제로 법정 소송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분명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지는 자녀들이 싸우는 것을 원하진 않았을 듯하다. 그런데 싸우는 자식들을 둔 애꿎은 아버지가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다. 싸우는 자식들의 이름은 유대인, 아랍인, 기독교인이다.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섬기고 있으면서도 수세대를 거쳐 다투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손이라 믿는다. 비록 이삭이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적자라고 주장한다. 반면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 믿는다. 당연히 첫 아들의 후손이니 본인들이 적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는다. 아브라함이 혈육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믿음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을 거룩하게 받들고 있다.
축복의 자녀가 되는 길
한 조상을 섬긴다면 서로 가까이 지내고 평화롭게 지내야하는데 오히려 더 지독하게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적자라는 사실을 공인받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했으니 적자가 되면 분명 큰 것이 준비되어 있을 것 같다. 물려받을 유산이 크기 때문에 그만큼 치열하게 공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복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인가? 서로 싸우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복의 근원이라는 결과적 사실만 기억한다. 따라서 그의 후손이라 자처하면 저절로 자기에게 복이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미 일궈놓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현실이기도 하다. 자기 노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줄만 잘 서면 출세할 수도 있고 크게 한몫 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소위 ‘연줄대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이다. 그 연줄 대기에는 공정한 규칙도, 상대를 배려할 여유도 없다. 내가 먼저 연줄을 붙잡으면 된다는 독점욕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복의 기준이 이미 성공한 사람에게 연줄을 대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을 거둔 사람의 전철을 따르는 길을 택해야 한다면 전혀 다른 양상이 될 것이다. 누가 만들어 놓은 밥을 먹는 것과 내가 밥을 만들어 먹는 경우는 다르다. 전자는 배가 꺼지면 끝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절대 굶주리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미 이뤄놓은 것을 넘보기 때문에 서로 싸운다. 성경이 전하는 복의 의미는, 아브라함처럼 복을 누리고 싶다면 아브라함의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적자임을 내세우지만 말고 적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결과’가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된 ‘원인’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꿈을 꾼다고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직접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해 삶에서 그 꿈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꿈을 실현시키는 자의 땀과 노력을 읽어야 한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눈을 감을 때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믿음의 후손인 우리 역시 믿음과 축복을 받는 꿈속에서만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할 것이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