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미리암
지난 김대중 대통령 시절,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등장할 뻔한 적이 있었다. 최초의 여성 총리 후보로 지명된 장상 씨는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고 그 외에 분야에서 여성 고위층 인사들이 등용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대통령 후보는 고사하고 총리직 후보로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도덕성이 문제였다. 자식의 국적 문제와 재산 관리 의혹 등을 안고 있는 총리 지명자가 공직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이전의 인물들이 어찌되었든 그 일을 계기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의 기준이 엄격해야 한다는 하나의 지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 표면적 이유가 전부였을까?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지만, 만일 그 정도의 홈이 있는 남성이었다면 동일한 결론이 내려졌을까?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가운데 그 정도의 홈이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는 역대 총리 가운데 그만한 문제가 없었던 인물이 얼마나 될까? 함부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결코 손에 다 꼽지 못할 것이다. 총리보다 더 중책인 대통령 후보마저도 그보다 더 심한 의혹을 받고 있던 현실을 생각하면, 절대로 도덕성의 기준만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공직 사회가 한 순간에 그렇게 비약한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판단이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여성계의 의견이 두려워서 쉽사리 ‘여성’ 총리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의견을 공론화시킬 수 없었지만, 사실상 인준의 가부를 결정한 것은 총리 지명자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점에서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인준 부결은, 표면의 도덕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남성주의의 강고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도덕적 흠결이 없었던 탓일까? 한명숙 총리는 무난히 인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에 대한 의혹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론은 한명숙 총리의 온화한 성품과 지도력을 강조하면서도 여성 총리의 국정 장악력을 의심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 대한 시선은 남성에 대한 시선보다 훨씬 가혹하다. 남자에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용인되는 일이 여자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아니, 사장이 여자야?’ ‘여자가 담배를 피워?’ ‘여편네가 운전은 무슨 운전이야, 집에서 밥이나 하지?’ 등등, 적어도 법적으로는 남녀가 동등하다고 인정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을 폄하하는 시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목회 현장에서도 여성 목회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사람들도 여성이 목회하는 교회에 대해 그의 목회 비전이나 방향성을 보기보단 여성이 담임 목회자이기에 기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존속했던 호주법 같은, 제도적으로 여성의 동등권을 제약하는 법률들이 남아있는 상황이니, 남녀가 명실상부하게 동등한 존재로 인정되는 세상은 아직 요원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성들은 갖가지 장벽으로 그 존재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몫을 감당했더라도 묻혀버린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아니, 그렇게 남성들의 시선으로 왜곡되고 묻혀버렸지만, 오히려 지울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한 여성들이 많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미리암이 그와 같은 여성의 전형이다.
위대한 여성과 위험한 여성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까? 비교해보나 마나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압도적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성경에는 중요한 몫을 담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면면히 등장한다. 물론 그 분량의 비중으로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 표면에 기록된 비중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여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경우로는 예수 주변의 여성들일 것이다. 이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충분치 않다. 남성 제자들 이야기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이 남성 제자들의 역할보다 훨씬 중요했으리라는 사실은 곳곳에서 시사된다. 예컨대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현장과 부활 현장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남자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린 상황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한 이들도 바로 여성들이었다. 성경의 기록자는 그 사실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기에 그렇게 기록해뒀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적인 역할에 관해 기록하는 데는 아주 인색했다. 성경의 기록자들 자신이 남성들이었다. 남성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 제약의 결과다. 이뿐만 아니라 문맥상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대목에서도 부정적 시선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죄인인’ 여자라느니(누가복음 7:37), ‘일곱 귀신 들린’ 여자라느니(누가복음 8:2) 하는 경우가 그렇다. 미리암은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의 전형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인 ‘마리아는 히브리어로 ‘미리암’이다. 그 미리암은 ‘위대한 여성’이자 ‘위험한 여성’이다. 위대한 여성으로서의 몫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실제 그의 역할을 말한다. 반면에 위험한 여성으로서의 몫은 상당 부분, 아니 거의 전적으로 그 위대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을 반영한다.
위대한 구원자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다. 수심 2km 낭떠러지로 형성된 홍해를 건넌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진실은 문자적 진술 자체에 있지 않다. 홍해를 건넌 사건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한다. 파라오의 군대를 뒤로하고 탈출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리라고 여긴 것이 사람들의 상식인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 군대를 물리치고 탈출했다는 감격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바로 그 감격스러운 사건을 경험하면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노래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격한다. 이 사건을 전하는 성경 본문은 곧바로 이어 미리암이 노래하는 장면을 전한다. 순서로 봐도, 내용의 비중으로 봐도 모세의 노래에 비하면 처진다. 그러나 그 우뚝 선 지도자 모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암의 존재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마도 미리암이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면 모세가 등장하는 그 자리에 그렇게나마 등장할 턱이 없다. 미리암은 그 자리에 우연히 등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출애굽 여정에서 미리암의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을 드러내준다. 출애굽 이야기가 거의 전적으로 모세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그 극적인 사건의 현장에 미리암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실제 지도자로서 미리암의 역할이 결코 모세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미리암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또 다른 구원자로서 등장한다. 구원자로서 미리암의 역할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되었다. 갓 태어난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생명을 구해낸 세 여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모세를 양자로 삼은 이집트의 공주다. 여기에서 이 세 여인의 역할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로서의 역할이다. 그 역할에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모세의 누이는 생명을 살리는 여인의 지혜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 이 장면에서 그 누이의 이름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그 누이와 미리암은 동일시된다. 미리암은 죽여야만 하는 사내아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 바구니에 아기를 담아 강물로 흘려보낸다. 그것을 발견한 이집트의 공주가 그 사내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는 다 미리암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 공주에게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하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한다. 지혜로 생명을 구한 역할, 그것이 미리암의 역할이었다. 생명을 구하고 양육하는 여인들의 여할에 미리암의 지혜는 더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누이 미리암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모세와 같은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연과 함께 출애굽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의 현장에 분명하게 등장하는 미리암은, 그 사연이 숨은 배경으로 남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 역할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신탁을 받는 여성 사제와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여인 미리암은 모세와 함께 두드러진 지도자였으며 구원자로서의 여인의 역할을 유감없이 보여준 지도자였다. 모성적 존재보서 규방에서 보이지 않게 양육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다름없이 공적인 존재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위험한 암탉의 등장
그러나 그 다음에 등장하는 미리암은 위험한 인물로 드러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미리암은 모세의 아내를 두고 갈등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민수기 12장). 여기에서 미리암은 모세가 미디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두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비방한다. 그 때문에 미리암은 저주를 받아 더 이상 공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모세의 형 아론의 중재로 문둥병의 저주에서 회복되기는 하지만, 이로써 구원자로서의 미리암의 역할은 끝나고 미리암은 위험한 인물로 바뀌고 만다. 위대한 여성 미리암은 이제 위험한 여성 미리암으로, 곧 금기의 인물로 바뀐다. 게다가 민수기 20장 1절에 이르러 느닷없이 미리암의 죽음이 언급되는데, 이 사실은 금기의 인물로서 미리암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가데스 광야에서 백성들은 먹을 물이 없다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비방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말미에는 아론의 죽음이 언급된다. 백성의 불신 사건과 아론의 죽음 사건의 서두에, 사라졌던 미리암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미리암의 존재는 ‘불신’과 ‘죽음’의 이미지가 되고 만다. 그러나 모세와의 갈등의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이 전하는 표면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 갈등의 사건은 오히려 구원자로서 미리암의 역할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다. 갈등의 표면적 이유는 여자 문제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미리암은 아론과 함께 모세의 배타적 지도력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이 어째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라고 한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공동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표면상 여자 문제 때문으로 되어있지만, 그 사건은 모세의 지도력 자체를 문제시한 사건이었다. 출애굽의 모든 공과를 모세에게 돌리는 전승의 입장에서 보면, 아론과 미리암의 이의 제기는 불경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구원자로서 미리암의 이미지를 전하는 전승을 깊이 헤아려 살펴볼 때, 미리암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단자’, ‘배신자’로 돌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미리암은 여전히 공동의 주역으로서 모세 지도력의 결함을 극복해보려는 공동 지도력의 중요한 축이었다. 그런데도 한 순간에 미리암이 금기의 인물로 전락한 것은 남성중심적 시선을 따른 전승의 결과다. 이 점은 미리암과 함께 이의를 제기했던 아론은 저주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모세와 미리암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간에 아무런 해명도 없이 아론은 어정쩡한 중재자로 등장한다. 여기에는 모든 사건의 발단이 ‘방정맞은 여자’ 때문에 빚어졌다는 남성 중심의 시선이 깔려있다. 오늘 날에도 남성 중심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이나 권력의 앞에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이들이 있다. ‘다름’이 곧 ‘틀림’이 아니다. 남녀를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를 진정으로 선용하는 길이다. 어느 한 편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다른 한 편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남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새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역시 남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들이 누려왔던 ‘특권’을 포기하라는 요구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요구는 아니다. 이제는 상대에 대해 우월감과 편견을 버리고 서로가 함께 걸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하겠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