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편협한 신앙의 눈을 넓혀라, 요나
날씨를 분별할 줄은 알지만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한 사람들은 당대 사회의 지도층에 해당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한 데에는 분명한 저의가 있었다. 도대체 자신들의 전통적 통념에 어긋나는 예수라는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서슴없이 외치고 다닌 예수는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단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다그쳐 만일 신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그 증거를 대라는 저의로 표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 저의를 파악한 예수는 그들의 요구에 직접 답하는 대신에 엉뚱한 발언으로 그들을 물리쳐 버린다. “표적? 요나의 표적만큼 분명한 표적이 어디 있느냐? 그것 말고 더 보여줄 것이 없다”라고 답한 것이다. 예수가 말했던 요나의 표적’,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요나의 표적은 자기 변화의 사건을 말한다. 시각의 전환, 발상의 전환, 삶의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삶의 변화 과정을 의미한다. 자기밖에 모르던 상태에서 타인을 알고 세계를 아는 것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다.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은 그 변화의 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우리는 똥오줌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어떤지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배설물을 구분 못해 그것을 다시 되먹는 것이 아이들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심리다. 유리병 속에 빠진 동전을 움켜쥐고 자신의 손을 빼내지 못해 엉엉 울고 마는 아이들도 있다. 놔버리면 다 해결되는 것을, 그 이치를 모르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던 아이들이 육체적 성장과 함께 나 아닌 바깥 세계를 인식하며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소위 성인이란 그런 유아적 상태에서 벗어나 나와 타인, 나와 밖의 세계를 구별하고 자신의 몫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모두가 ‘성인’ 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자기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 인식은 육체적으로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서도 여전하다. 개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인간의 문명 자체가 그야말로 ‘문명’으로 포장되었을 뿐, ‘미망’에 가깝다. 나라와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자기는 문명이고 그 밖은 야만이라는 인식, 자기는 중화이고 그 밖은 오랑캐라는 인식, 자기는 선민이고 그 밖은 이방인이라는 인식, 자기편은 정의이고 그 밖은 악의 축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이 세계가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의 계급과 집단들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집단도 좀처럼 자기 울타리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더 보여줄 것이 없다”라는 예수의 선언은 저의가 불순한 무리를 향한 임기응변의 답변이 아니다. 요나의 진실을 안다면 더 이상 그 어떤 표적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폐쇄적 민족주의와 요나서
성경 전체로 보나, 예언서들로 보나 요나서는 특이한 책 가운데 하나다. 요나라는 인물이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열왕기하 14:2’), 요나서는 자연스럽게 예언서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사실 요나서는 일반적인 예언서와는 격식을 달리한다. 예컨대 예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숙한 예언 선포의 형식을 볼 수 없다. 요나서는 그 장르상 예언서보다는 단편소설에 가깝고, 그 성격상 일종의 성장소설과도 같다. 그 기록 시기도 역사적 전승이 말하는 당대가 아니다. 성경의 전승은 요나가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기(BC 782∼752년)에 활동한 예언자라고 전한다. 그러나 요나서 본문이 전하는 정황상 이 책은 그보다 훨씬 후대의 상황, 즉 남북 왕국이 다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하고 난 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구체적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시도했던 유다 사회의 개혁 이후 상황에서 기록된 책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그 시대적 배경을 아시리아 시대로 설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페르시아 시대(대략 BC 300년경)에 해당한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에스라·느헤미야 이후의 배타적 민족주의 상황과 밀접한·관련을 맺고 있다.
거듭남의 전형 요나
요나서는 기록된 시대 정황과 관련해 독특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의식적 성장 과정을 드러내주는 성장 소설의 전형을 띠고 있기도 하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요나 자신도 요나서 외에는 잘 알려진 바 없거니와 그의 아버지 아밋대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 사실은 그의 출생이 비범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저 평범한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에게 막중한 사명이 맡겨진다. 이스라엘 원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하나님의 명을 전하라는 사명이다. 그들의 죄악이 하늘 끝에 닿았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다. 이 정황은 매우 절박한 상황이다. 아마도 유대인 학살이 행해지는 와중에 나치의 본고장 베를린에 가서, 우리 식으로 하면 남북 대결이 극심한 상황에 평양에 가서 뜨끔한 소리를 하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평범한 아무개의 아들 요나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대개 상식적인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그 망할 놈들한테 무슨 놈의 신탁을 전한단 말인가, 그놈들한테 갔다가 내 목숨이 성하겠는가?’ 하는 심사였을 것이다. 기어코 요나는 가야 할 그곳과 정반대되는 세상 끝(다시스)으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풍파를 만난다. ‘철부지’ 요나는 그 와중에도 잠만 쿨쿨 잔다. 풍파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자신이 그 당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요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기로 작정한다. 도망치는 ‘비겁한’ 요나에서 ‘비장한’ 요나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직, 변신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요나의 결행은 여전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의 연장이다. 그놈들에게 신탁을 전하러 가느니 죽는 게 낫다는 심보다 ‘내 죽으면 죽었지 그 일은 못 한다’, ‘내가 그러면 성을 간다’는 심정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유치한 결행에 지나지 않지만, 그 ‘비장한’ 결의로 요나는 진정한 변신의 기회를 맞는다. 그는 캄캄한 물고기뱃속에 갇혀 사흘 밤낮을 두고 사투를 벌인다. 캄캄한 어둠 속에 사흘을 갇힌 요나에게서 우리는 무덤에 묻혀 사흘을 지낸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된다. 저 나락에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거듭난 요나는 이제 니느웨로 향해 신탁을 전한다. 원치 않지만 옳은 길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성인의 자세다. 그렇다고 요나가 완전히 거듭난 것은 아직도 아니다. 자신이 전한 신탁으로 구원의 기회를 얻는 못된 놈들을 보니 마땅치가 않다. 여전히 요나는 신탁과 자신의 의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망한다고 선언했는데 흥하다니, 망한다고 선언하라 해놓고 이게 뭡니까?” 요나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투덜댄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는 자상한 하나님은 요나를 타이른다. 소설은 그 후일담을 전하지 않지만,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요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에서 타인을 포용하는 인물로 거듭난 인간의 한 전형이 된 것이다.
배타적 경계를 넘어서
요나의 거듭남은 사실 유대 민족의 거듭남을 겨냥하고 있다. 본문 자체에 설정된 배경과 기록된 시기의 상황은 연대상으로 대략 400여 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요나서는 과거와 당대를 교차하는 가운데 독특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기로 설정된 여로보암 2세 시대는 북 이스라엘이 매우 강력하게 팽창 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다. 반면 당시
아시리아는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팽창 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는 갈라였고, 니느웨는 단지 작은 성읍에 불과했다. 니느웨가 아시리아의 수도가 된 것은 요나의 활동 시기보다 1세기 후인 산혜립 왕 때였다. 니느웨는 갈라 시대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아시리아의 수도였지만 아시리아의 대명사처럼 기억된다. 그 까닭은 니느웨를 수도로 하는 동안에 아시리아제국이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 이스라엘이 유린당하고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 시대착오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향하는 상황이 설정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더욱이 그 주인공 요나라는 인물 설정도 흥미롭다. 성경 전승(열왕기하 14:2’)에 따르면 아마도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팽창을 지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요나서 밖의 요나에 관한 유일한 정보인 이 전승은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이 국경을 확장했다고 전한다. 이 전승은 요나가 당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팽창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니느웨를 구원하는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 그리고 사실상 과거의 기억으로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체제와 통념을 극적으로 뒤집어엎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아시리아는 원한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원한의 대상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폐쇄적 경계 짓기에 몰두하는 현실을 반증한다. 요나서의 상황과 주인공의 설정은 그러한 현실을 뒤집어 엎는다. 한마디로 요나서의 주제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이며, 폐쇄적 ‘우리주의’에 대한 경고다.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만 구원을 받는다는 배타적 선민의식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나와 너를 가르는 배타적 독선에 대한 경고, ‘나는 정의의 편이며, 너희는 악의 축’이라고 보는 독선에 대한 경고다. 이 경고는 에스라·느헤미야 이후의 폐쇄적인 유다 사회를 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요나서는, 유대인들이 성조로 내세우는 다윗의 조상이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룻기와 맥을 같이한다.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요나 4:11)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란 비단 어린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십이만은 문자 그대로 12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다. 어쨌든 이 말씀의 초점은 사람뿐 아니라 육축이라 하더라도 뭇 생명은 고귀하므로 무고한 이들이 재앙으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쓴 책 제목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나라와 민족의 경계, 그 어떤 경계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다. 몇 년 전 코소보 전쟁 당시 기자가 변경 지대에 가서한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슬림입니까? 기독교인입니까?” 이에 대한 노인의 응답은 “난 그저 사람일 뿐이오(I am Homo Sapiens)”, 간단한 한마디였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쉽사리 이 사실을 망각한다. 나라와 민족 이전에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생명이라면 누려야 할 고귀한 삶, 빈부귀천 없이 누려야 할 고귀한 삶의 가치가 있다. 요나서는 그 사실을 환기시킨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넓힌다고 할 수 있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