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평안함 속에 숨어있는 불편함을 깨라, 에스더
구국의 여인상
한 나라의 최고 권좌에 있는 남자의 부인, 오늘날에는 그 주인공을 일러 영부인이라 한다. 왕조 시대라면 왕후나 왕비요, 대제국의 면모를 갖춘 나라라면 황후라 불린다. 봉건 왕조 시대의 왕후와 현대의 영부인을 동등한 차원에서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최고 권력자를 보필하는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보조자의 역할은 대개 최고 권력자의 그늘에 가려지고, 따라서 그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들도 있다. 정치적 역학 관계와 개인의 자질이 결합되어 공식적으로 중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 가끔 있다. 평가야 어찌 되었든, 우리 역사에서는 구한말의 명성황후, 곧 민비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는 영부인보다는 상원의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장차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를 지속적으로 비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러한 경우는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고 전통 시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 스스로의 독자적 인 역할로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다.
성경의 주인공 에스더는 잘 기억되지 않는 왕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사실 대제국 페르시아 황제의 부인이었으니 ‘황후’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성경 번역상 굳어진 ‘왕후’로 부른다. 특히 교회에서 여신도회의 이름을 붙일 때 가장 자주 애용하는 이름이 에스더다. 한 교회에 여러 여신도회가 있으면 가장 젊은 여신도회는 에스더회, 그 다음은 드보라회, 그 다음은 마리아회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단 하나의 여신도회만 있는 경우에는 단연 에스더회가 가장 선호된다. 기독교인들은 에스더를 그렇게 친숙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대대로 기억되고 있으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왕후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 이름을 대하면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비장한 결의와 함께 아마도 ‘구국의 여인상’이 떠오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에스더가 독립된 나라를 구한 것은 아니고 겨레를 구한 여인이었으니 ‘겨레를 구한 여인상’ 정도가 어울리는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우리에게는 ‘겨레를 구한 여인상’과 ‘구국의 여인상’이 아무런 차이 없이 받아들여진다. 어쨌든 에스더가 기억되는 것은 왕후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맡은 특별한 역할, 곧 민족을 구한 역할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경험을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런 ‘구국의 여인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추앙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더에 관한 기억으로 그만하면 과연 충분할까?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에스더서
그 주인공 에스더에게서 떠오르는 구국의 여인 이미지는 산뜻하지만, 정작 에스더서를 읽다보면 복잡한 심경에 빠지고 만다. 룻기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에스더서는 룻기의 아름답고 선의에 가득 찬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된다. 에스더서의 분위기는 잔혹하고, 그 주인공들도 한결같이 긴장 가운데 눈빛을 번뜩인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책 에스더서는 정경의 역사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가장 뒤늦은 시기에 정경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아예 ‘에스더서는 정경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뻔한 책’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에스더서는 현대적 상식으로 보면 더더욱 불온한(?) 책이다. 에스더서의 기조를 오늘날의 몇 가지 개념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남성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로 집약될 것이다. 룻기와 함께 여성 주인공의 이름을 표제로 달고 있는 또 하나의 책 에스더서(가톨릭 성서에는 이밖에도 유딧서가 있지만)에 이 어인 뜻밖의 사태일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바탕을 제거하면 이야기의 얼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주 불온한 남성주의의 횡포로 시작된다. 인도에서부터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대제국 페르시아를 다스린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 BC 486-465년) 왕은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무려 180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잔치 7일째 술이 거나해 기분이 좋아진 왕은 왕후 와스디의 미모를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불러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와스디 왕후는 그 청을 거절한다. 왕은 분노해 나라의 법을 맡은 관리들과 왕후의 처리 문제를 의논한다. 결론은 와스디 왕후의 폐위였다. “페르시아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가 한 일을 알게 되면, 오늘 당장 임금님의 모든 대신에게도 같은 식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멸시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으로 정해 왕후를 폐위하고 그 자리를 더 훌륭한 여인에게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낮은 사람이고 높은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여인이 저마다 자기 남편에게 정중하게 대할 것입니다.” 이것이 와스디 왕후의 폐위 사유였다. 지독한 남성주의의 횡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의 조서에는 이런 내용도 포함되었다. “남편이 자기 집을 주관해야 하며, 남편이 쓰는 말이 그 가정에서 쓰는 일상 언어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남성주의의 횡포로 빚어진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이 주인공 에스더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에스더의 등장 과정 역시 남성주의적 규율로 일관한다. 왕후 후보로 선발된 유대인 출신 에스더는 왕궁에서 근무하는 사촌 모르드개의 훈계를 따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왕후 후보로서 에스더는 정해진 궁궐 내 법규를 따라 열두 달 동안 몸을 가꾼다. 순서를 맞아 왕 앞에 나설 때 역시 왕실 미용법을 따라 단순한 단장을 하고 나선 에스더는 워낙 미모가 뛰어났던지라 곧 왕의 눈에 들었고 드디어 왕후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스더는 정해진 법도를 따라 자신의 미모를 가꾸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적극적인 역할도 맡지 않는다. 여기에는 남성의 시선에 포착된 에스더만 존재할 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사촌 누이를 왕후로 만드는 데 성공한 모르드개는 금상첨화격으로 왕에게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얻는다. 반란음모를 감지한 모르드개가 이를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림으로써 왕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운 것이다. 그가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게 변방의 소수민족 유대인 출신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궁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있는데 이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아하수에로 왕의 최고대신 하만은 다른 대궐 근무자들과 달리 평소에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세운다. 하만은 왕에게 청했다. “임금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의 여러 지방에 널리 흩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삽니다. 그들의 법은 다른 어떤 백성들의 법과도 다릅니다. 더욱이 그들은 임금의 법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없애도록 조서를 내려주십시오.”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민족이 있다니, 왕은 당연히 그 요청을 허락했다. 물론 자신의 왕후가 그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 말이다. 그 결정을 내리고 약 1년 후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고 재산을 강탈당할 운명에 처해졌다. 20세기 나치의 끔찍한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금세기 수많은 ‘인종 청소’의 음모는 이렇게 오래전에 예비(?)되었다. 민족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에스더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마치 이제까지 침묵하며 남성주의적 규율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은 이때를 예비한 것이었다는 듯이. 그러나 에스더는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제도와 규범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왕에게 호소해야 하겠지만 제 발로 걸어가 호소할 길은 막혀있었다. 왕이 부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심지어 왕후라도 왕에게 먼저 가서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그 법도를 어긴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해졌다. 더욱이 에스더는 왕의 칙령으로 학살에 처해져야 할 바로 그 유대인이었다. 그 사실이 들통 나면 자신의 운명마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에스더는 비장한 결단을 내린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결단으로 해야 할 행동마저 에스더에게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 절차 역시 법도를 따라야 했다. 왕의 허락 없이 왕의 뜰에 나섰을 때 왕이 홀을 내밀어 받아주지 않으면 간청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자신도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에스더 왕후를 사랑하는 왕은 다행스럽게도 에스더를 맞아주고, 에스더는 왕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왕에게 간청하는 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왕의 칙령은 곧 법이었으며 그 법은 쉽게 번복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제로 그 법을 무력화하는 방법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먼저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칙령을 만들도록 한 하만부터 제거해야 했다. 에스더는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는 왕의 마음을 아는지라,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왕후의 간절한 호소에 왕의 마음이 움직였을 때, 왕후 에스더는 왕이 내린 칙령은 자신의 민족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한다. 왕의 목숨을 구해줬던 모르드개를 제거하려는 동기에서 그 음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왕은 하만을 처형하고 유대인들이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미 내려진 칙령을 번복할 수는 없었고, 예정된 날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 유대인들 역시 그에 맞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을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수들이 유대 사람들을 없애려고 한 날은 거꾸로 유대 사람들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없애는 날로 바뀌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민족은 통쾌한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소생했다. 하만의 가족이 학살된 것은 물론 수도와 지방 곳곳에서 유대인의 원수들 수만 명이 학살되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키게 되었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에스더서는 끝을 맺는다. 참혹한 유혈의 보복을 기뻐하는 유대 사람들의 환호는, 에스더서에 담긴 남성주의와 인종주의에 더해, 민족주의마저 바로 그것들과 동일한 폭력의 반열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나라를 잃고 민족이 압제당한 경험을 갖고 있기에, 그래도 민족주의를 또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왔던 우리의 통념이 이 대목에서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우리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책, 성경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함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런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선택적으로 자기가 읽고 싶은 구절을 찾아 읽는 경우이다. 그러나 필자가 쓰는 글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결코 선택적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성경은 우리를 인도하는 생명의 책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져서 우리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에스더서와 같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혹은 보고 싶은 대로 읽는다면 ‘구국의 여인’의 모습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성경읽기로 읽는다면 그 문자 안에 숨어있으며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연결되는 에스더서를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