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연구서 소개
한비자(韓非子)의 통치론(統治論) _ 具聖姬 (淑明女大)
Ⅰ. 序 論
Ⅱ. 한비자의 功利主義的 인간이해
Ⅲ. 한비자 統治論의 연원
Ⅳ. 한비자의 법가적 통치론- 法治․勢治․術治
Ⅴ. 한비자 통치론의 진보성과 한계점
Ⅵ. 結 論
Ⅰ. 序 論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이기적 충동을 극복하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데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천적 윤리의식과 후천적 교육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요인들만으로는 사회의 질서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사회질서의 유지는 조직 구성원간의 상호간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법률과 제도에 의해 도모되어져 왔고, 그러한 법률과 제도 또한 강제력을 지니지 못한 경우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을 경험하여 왔다.
이른바 인간의 이기적 행동을 통제하는 데는 그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비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만의 일이 아니고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살게 된 이래 그 형태와 정도만 달리 하였을 뿐 거의 대동소이하게 나타나 왔다는 것이다. 동양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항상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중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져 왔다.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상태나 내란상태와 같은 불안정한 사회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의 형태로 나타났었다. 한비자도 군주의 강력한 권위와 힘에 바탕한 전제군주정의 권력국가를 확립함으로써 전국시대의 전쟁상태를 극복하고 안정된 통일국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한비자는 법가의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法治主義를 주장하였다. 法사상사적으로 볼 때 그의 법치주의사상은 孔․ 孟에 의한 덕치주의와 荀子에 의한 예치주의를 거쳐 그 다음에 나타난 법사상이다.
그는 유가에 의한 덕치나 예치로서는 당시의 戰國時代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오로지 강력한 법치에 의하여서만 그러한 혼란은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실제로 그의 법치주의적 통치론은 秦나라의 지배원리로 받아들여져서 진의 시황으로 하여금 천하대란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이룩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법가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을 건국하는 정치사상적 기초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진의 단명과 함께, 漢제국이 유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부터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조직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려한 법가의 정치사상은 이후 중국의 역대왕조의 국가체제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그 존재가치를 유지하여 왔다. 그렇다면 중국역사 속에서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적 통치론의 역할공간과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문에서는 철학적 사유나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정책을 제시한 여타 제자백가보다도 현실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法家를 대표하는 韓非子의 통치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周 이래의 宗法制度가 붕괴되는 전통적 신분질서의 혼란기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여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韓非子의 통치론과 그의 통치론이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韓非子의 法治․勢治․術治의 사상과 그 속에 나타난 그의 통치론이 지닌 진보성과 한계점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제자백가 중에 법가가 제일 나중에 출현하게 된 까닭을 시대적 정치적 환경에서 고찰해 봄으로써 법가사상이 기존의 다른 학파와 어떤 학문적 관계에 있었는지 규명하는 등 법가사상의 학문적 사상적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한비자에 대한 연구는 1980-90년대에 중국, 대만, 일본 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주목받고 있지 못하는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 한비자사상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으로 그리고 주로 철학적 입장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한비자 원전에 근거하면서, 국․내외에서 연구되어진 자료들을 참고하여 한비자통치론의 내용과 구세관, 역사적 공헌 및 평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수천 년 전의 외국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올바로 바라보고 바람직한 해결책을 빌어 올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법가사상은 단순히 그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잠시 풍미했던 한 학문의 수준을 넘어서 청대 말엽까지 지속된 사회관 ․ 국가론 그리고 법치제도론 등을 담고 있다. 게다가 겉으로는 유교의 도덕철학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법가적 법치제도를 유지해 온 중국의 정치체제가 수천 년간 지속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법가의 통치론에 담겨있다.
Ⅱ. 韓非子의 功利主義的 인간이해
한 시대의 정세 및 각 방면의 思想的 배경이 한 사상가의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사상가의 사상 역시 그 시대의 정세 및 각 방면의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고, 思想 역시 역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있으며, 한 시대의 사상이 곧 그 시대정신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한 사상가의 사상을 연구하려면 진실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규명해야 함과 동시에 그 사상의 주류에 있는 사상가의 인성론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한 시대 혹은 한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그 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한비자의 통치론의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한비자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한비자의 인간관을 논하기 전에 우선 한비자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한비자가 정의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리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법가사상은 바로 한비자 본인의 인간관에 기초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본성에 대한 가정이 사회질서 형성방안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든 그 시대의 상황과 필요에 의해 발생하듯이, 한비자의 사상 또한 춘추 말에서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배경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한비자사상의 특징은 봉건국가에서 중앙집권제적 영토국가로 나아가는 과도적인 시기에 정치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戰國時代말기 정치구조의 변동에서 나타나 있고, 당시 이러한 추세는 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따른 요구로서 등장한 사회경제적 諸 관계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자백가는 각자의 세계관과 논리를 바탕으로 현실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지만 정치구조 및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 어느 하나의 사상도 당시 전국시대말기의 각국의 치열한 정치국면을 구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측면을 냉철히 직시한 韓非子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당면문제 해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한비자는 戰國時代 末期 韓나라의 公子로 대략 기원전 280년에 태어나 기원전 233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48세였다. 기원전 237년부터 秦이 韓을 침략하여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때가지 중용되지 못하고 있던 한비자는 기원전 233년 비로소 진에 韓王의 특사로 파견된다. 한비자는 진에 온 이후 위기에 빠진 국운을 회복하려 했으나 李斯의 방해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이사의 모함으로 자살하게 된다.
한비자는 일찍이 이사와 함께 荀子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 사상계통을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비자는 荀子의 性惡說을 계승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여 이익을 좋아한다. 때문에 군신관계도 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익에 의해 맺어져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민이 자발적으로 善을 행할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법률규칙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보다 확실하다. 인민이 선을 행하였다 해도 그것은 우연히 선에 합치되었을 뿐이다. 욕망에 흐르는 인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법을 철저히 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인간성은 惡하여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보는 점에서 순자와 한비자는 일치한다. 그러나 순자는 교육에 의해 선으로 인도하려고 하지만 한비자는 욕망을 억제하려 한다든가 이기심을 개선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으로 이기심을 이용하여 법에 의해 다스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여 상을 좋아하고 벌을 싫어하기 때문에 상벌은 진실로 인민을 다스리는 힘을 갖는다. 상벌의 위력 앞에 도덕은 무력하다. 도덕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이 바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을 결정하는 극히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에서 “信賞必罰”이 주장된다. 옛 聖人이 살았던 堯舜의 시대에 비하여 경제적 조건도 인간의 의식도 크게 변하였으므로 현재의 時勢에 맞는 정치는 법치 이외에는 없다. 이 점에서 尙古說을 말하는 유가는 틀렸다고 한비자는 주장한다.
한비자의 이기적, 이해 타산적 인간관은 법치주의의 근원이 되고 있다.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익추구에 있다고 보며,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는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行爲動機를 부여하는 이해 타산적 존재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것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여 이익을 좆아 행위 하는 이기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가에서의 인간관계는 仁과 義로써 맺어지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孝와 親으로써 맺어지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忠과 信으로써 맺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법가의 한비자에 있어서는 이러한 모든 관계가 利와 害로써 맺어진다는 것이다.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는 것은 骨肉之親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匠人이 사람들이 부자가 될 것을 바라고, 棺을 만드는 장인이 사람들이 많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前者가 착하고 후자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귀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임금이 계산적으로 신하를 이용하면 신하도 계산하면서 임금을 섬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이렇게 이해관계를 따지고 계산적으로 행동한다면 신하는 목숨 걸고 나라에 충성하지 않을 것이며 임금 또한 나라를 해쳐가면서 신하를 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신하는 자신을 해친다는 것은 이익이 없다는 것이고 임금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해치면 이익이 없어진다.
이렇듯 임금과 신하는 계산으로써 합쳐져 있는 것이다.
신하는 죽을 힘을 다하여 일하는 대가로 군주에게서 爵祿을 사고, 군주는 爵祿을 신하에게 판다. 군신간의 관계는 父子의 정으로 이루 워진 관계가 아니고 이해타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聖王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法禁을 엄하게 하는데, 법금이 분명하니 관리들이 청렴해지고 賞罰을 엄격히 하여 공정해지니 백성들이 자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지니 군대가 강해져서 霸王의 공적이 이루어진다. 패왕이 된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최대의 이익이다.
군주가 이러한 큰 이익을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함에 있어 능력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면, 신하들은 이를 알고 목숨을 다하여 일을 한 즉 공을 세우고 爵祿을 얻게 된다. 작록을 얻으면 부귀가 보장된다. 부귀를 얻는다는 것은 신하에게는 가장 큰 이익이다.
위와 같이 군주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이지 백성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비자의 治道의 목적은 民利民福에 있는 것이 아니라 君利富强에 있다. 이것은 유가의 민본주의나 仁政사상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인간관은 荀子의 性惡說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가 인간을 이익 추구적 존재로 이해한 점에서는 荀子와 입장이 같지만, 그러한 인간관으로부터 治道의 원리와 목표를 이끌어 내는데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순자에서 禮가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 상호간의 이익충돌을 衡平하게 하고 인간의 惡性을 敎化하는데 뜻을 두지만, 한비자의 法이 추구하는 목적은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이익충돌에서 군주의 이익을 우선시키고 이해 타산적 성질을 이용하여 賞과 罰을 줌으로써 신하를 군주에게 복종시키는 데 있다.
때문에 한비자는 법이 생겨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편안하고 이익이 있으면 그 곳으로 나아가고, 위태롭고 손해가 있으면 그 곳을 떠나는 게 人之常情이다.
이러한 인지상정을 이용하여 利와 害에 法에 의한 상과 벌을 매달면 모든 신하는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강력한 지배질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 같은 이해 타산적 인간관을 기초로 해서 법에 의한 상벌을 통하여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상벌의 禁令을 통하여 한비자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富國强兵과 천하통일을 이루는 패왕의 업이다. 이로써 한비자의 인간관이 법과 법의 목적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관은 사회질서에 대한 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인간본성이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을 때,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비자가 그러하였듯이 인간의 본성을 성공적으로 억압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본성이 선하다고 가정하였을 때, 현실의 지배적 인간유형으로서의 이기적 인간은 원래적이며,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제도 등의 영향으로 원래의 모습이 파괴된 결과로서의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 사회질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인간본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조치, 즉 사회제도를 개혁하여 바로 잡고, 인간의 선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교육활동 등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간본성에 대한 가정은,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이 취해져야 하는 가의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지표가 됨을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당시 전국시대말 각국의 약육강식의 극한의 대립이 바로 인간의 악한본성이 초래한 것이라 단정했기 때문에, 그는 당시 세태의 가장 적절한 해결방안으로 강력한 전제군주를 중심한 법치의 통치론을 제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Ⅲ. 韓非子 統治論의 연원
법가의 이론가들은 춘추전국의 무질서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을 어떠한 존재로 인식했고, 역사를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당시 전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혼란 속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았는지? 이와 관련하여 다른 사상가들과 비교해서 법가의 사상가들은 무엇보다도 고상한 윤리도덕을 말하기보다 눈에 명료하게 보이는 사실을 중시했다. 즉, 법가의 사상가들은 추상적인 주관성보다는 구체적인 객관성을 추구했고, 직관에 의존하기보다는 경험을 중시했다.
예컨대, 한비자는 “경험하지 않은 또 인증할 수 없는 것으로 무엇을 단정하는 것은 바보짓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법가의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기의 私益을 좇아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했고, 역사란 항상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화하는 세태에 맞추어 국가경영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말기에 한비자의 법가적 정책론이 강력하게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국말기의 열국이 종래 봉건국가의 조직으로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제자백가가 나타난 것도 새로운 두뇌의 도입이 요구되었기 때문인데, 전국시대의 말기가 되자 그것만으로는 틈을 메울 수 없게 되었고, 봉건국가의 기구를 합리화 할 강력한 정치사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봉건국가를 합리화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법이었다. 종래의 봉건국가를 지탱해준 것은 충효의 도덕이나 의리 인정이라 하는 인간적인 것이었다. 인간적인 것은 이치로는 캘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정이나 도덕으로는 국가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 법은 비정한 것이고, 기능적․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한비자를 위시한 법가가 출현한 것도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춘추말기 이래로 지주계급의 세력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들의 이념적인 법치사상도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세기 무렵 전국중기에 이미 나타나 후에 法家라고 불리게 된 정치가와 사상가에 의해 점차로 형성되고 체계화되었는데, 제가백가 중의 법가는 그들이 전국시대에 있어서 실제적인 정치를 이끄는 정책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變法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변법 과정 중에 법가의 사상도 완성되었다.
법가를 완성시킨 한비자도 이러한 시대적 혼란상을 “천하에 도가 없는 상태”라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곧 멸망으로 이끈다고 강조하고, 사회 안정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여 이로써 패하지 않는 국가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역사법칙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와 같이 각종의 사회혼란은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大統一의 국면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그의 법가사상은 다른 어떤 정치사상보다도 가장 현실문제를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파악한 정치사상을 창출하려고 더욱 노력했을 것이며, 그 결과 법가는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이론을 냈던 학파이다. 그렇기 때문에 秦나라는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법가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물론 그들이 법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법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법가사상이 군주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려했다는 점은 주목하여 전체주의나 권위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법가사상의 성격에 주목하여 현실주의나 법치주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의 학문개념에 비추어도 법가는 법학 이론이라기보다는 조직론이나 방법론에 가깝다. 법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고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한비자이전의 법가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법가에는 세 파가 있었는데, 각각 세를 중시하고, 술을 중시하고, 법을 중시했다. 권력과 권위의 세를 중시하는 愼到 , 법률과 법제의 법을 중시하는 商鞅을 , 일을 처리하고 신하를 다루는 방법 혹은 기예의 술을 중시하는 자는 申不害를 종주로 삼았다.
신도는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勢”를 강조하였다. “勢”는 권세 또는 세력을 의미하는데, 管子에서는 “勢”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명한 군주가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다스리면 신하들이 감히 군주를 속이려 하지 않고 백성들이 기꺼이 봉사하게 되는데, 이것은 군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군주의 권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비자도 착하거나 똑똑한 것으로 백성들을 복종시킬 수는 없지만 권세와 지위로는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같은 생각은 덕이 있는 임금만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했던 유가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며, 왕권강화를 통해 절대군주제를 실현하려는 목적을 보인 것이다.
다음으로 韓나라의 재상을 지낸 신불해는 術을 강조하였다. 술은 “꾀”,“방법”, “기술”, “전술”을 뜻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통치자가 신하를 제압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정치적 책략을 가리킨다. 신불해는 노자의 無爲사상을 받아들여 無知와 無爲가 군주의 길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商鞅은 衛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다. 상앙은 “法”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책을 주장하였다. 그가 말한 法은 법치주의를 의미하는데, 상앙은 연대책임제와 “信賞必罰”을 통해 법치주의를 완성하려고 하였다. 곧 법으로써 국가를 다스린다고 표방하니, 법이 곧 치국의 모든 규범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商君書에서 말하기를, “나라가 다스려지는 바는 셋이 있으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信이요, 셋째는 權이다. 법이라는 것은 君과 臣이 함께 조작 조종하는 것이며, 信이라는 것은 군주와 신하가 함께 세우는 것이고, 權이라는 것은 君이 홀로 제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은 저울이나 자와 같은 것이어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법을 정한 이상 법을 위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법을 행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信賞必罰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백성들을 집단으로 조직하여 여러 집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또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줄 일은 반드시 상을 주고 벌줄 일은 반드시 벌을 줌으로써 법 적용에 대한 신뢰성과 공평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법은 엄격하고 무거워야 하며 또한 그 내용이 자세해야 한다고 보았다. 법이 지나치게 간결하면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도 꼼꼼히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하고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기의 법가는 세파로 나누어진다. 상앙을 대표로 하는 중법파, 신불해를 대표하는 중술파, 신도를 대표로 하는 중세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파를 집대성하고 또 노자학과 순자학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한 학파의 학설을 이룰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한비자이며, 결국 한비자는 법가적인 통치론을 완성하였다. 또한 이러한 한비자의 법가적통치론은 바로 전국시대를 종결지으려는 진시황에 의해 유용하게 활용되어 결국 진시황은 춘추전국의 장구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게 된 것이다.
Ⅳ. 한비자의 법가적 통치론-法治․勢治․術治
군주가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尊君의 원칙에 따라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가 절대군주 국가를 세우고 정치제도의 名과 分이 일치하는 刑名參同의 정치가 행해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변화무쌍한 전국시대에 처하여 자기이익을 쫓는 인간들을 통제하여 농전에 전심토록 하고, 혼돈하고 무질서한 나라를 평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한비자는 위에 소개한 법, 세, 술의 세 가지 정치권력을 적절히 운용하여 통치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韓非子의 통치론에는 法治만 있는 것이 아니라 述治와 勢治가 합하여져 있다. 법치는 商鞅에서 이어 받았고, 술치는 申不害에서 이어 받았으며 세치는 愼到에서 이어 받았다.
이 法․術․勢의 三治는 임금이 반드시 간직하고 있어야 할 세 가지 요소로서 그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法만 있고 술이 없거나, 술만 있고 法이 없거나, 또 法術이 있어도 勢가 없으면 정치는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군주가 정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권세를 확고하게 잡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법과 술을 동원하여, 신하와 인민들을 장악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총명한 君主는 제도를 시행하는데 하늘같이 公平하고(法), 인물을 등용하는데 귀신같이 밝았다. 하늘같이 공평하므로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못하고 귀신같이 밝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곤란에 빠뜨리지 못한다(術). 위세를 부려 교화를 엄하게 실시하면 백성들은 그를 거스리려 해도 거스릴 수 없다(勢).
총명한 군주는 하늘과 같이 법에 따라서 공평무사하게 행동한다. 이것이 법의 기능이다. 총명한 군주는 귀신과 같이 은밀하게 백성을 정치하는 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지배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이 術의 기능이다. 그리고 총명한 군주는 법을 강력하게 실행시킬 수 있는 위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勢의 기능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제왕이 도구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다음은 한비자의 주요 통치론인 法治․術治․勢治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法治-국가주의적 법치에 의한 인민통제
한비자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법이란 문서로써 기록 편찬하여 관청에 비치해 놓고 백성에게 공포한 것이다.
한비자는 위에서 “言行이 법령에 따르지 아니할 때에는 반드시 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법은 어떠한 행위를 금지시켜야 하는가?
밝은 임금은 公과 私의 구분을 살피고, 利와 害의 소재를 살펴서 간사한 사람들이 私利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명령은 반드시 행하여지고, 금한 것은 반드시 그쳐야 한다. 이것이 군주의 공의이다. 사사로움이 행하여지고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믿으면, 상을 주어 독려할 수도 없고 벌을 주어 막을 수도 없다. 이것이 신하의 私義이다. 사의가 행하여지면 혼란에 빠지고 公義가 행하여지면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公과 私가 구분되는 것이다.
위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법으로서 금해야 할 행위는 私利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韓非子에 있어서 私利(私益)의 추구는 公利(公益)에 反하는 행위로서 兩 이익은 상반 일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相反衝突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성행하게 되면 公利는 소멸해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있어서 公利라는 것은(나라 전체의 이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君主 개인의 이익을 뜻한다. 한비자는 아직 국가와 군주를 개념적으로 구별할 줄 몰랐으며, 朕은 곧 국가였다. 따라서 공익을 나라 전체의 이익으로 파악하지 않고 군주 개인의 이익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군주의 이익과 신하의 이익은 언제나 충돌ㆍ 상반된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점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임금과 신하는 마음을 달리 한다. 임금은 이해타산으로써 신하를 거느리고 신하들도 이해타산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쓰는 이해타산에 있어서 신하는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 나라(실은 君主)를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임금은 나라(군주)의 손해를 보면서 신하를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군주의 최대의 이익은 覇王이 되는데 있다.
신하의 최대의 이익은 작록을 받고 부귀해지는 데 있다.
이상의 한비자의 설명에 의하면 법으로써 금해야 할 행위는 공익 즉 군주의 이익에 反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법이라는 것은 군주가 覇王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고 이에 대하여 형벌을 과하는 것이다. 법이 공익에 반하는 사익추구를 금지시킨다는 것은 군주의 이익과 신하의 이익이 충돌될 때 군주의 이익을 우선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군주의 명령으로서 군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수단이지 결코 백성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이 아니다. 한비자의 법이 이와 같이 군주 개인의 私益을 보호하는 수단이라면, 그것은 公益을 보호하는 법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서 한비자의 법은 객관성을 결하고 있다. 그의 법은 군주 자신의 주관적 자의표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법은 군주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자기의 이익과 충돌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고 이에 대하여 벌을 과한다. 그리고 그 법의 목적은 군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절대군주정을 확립하여 패왕이 되는 데 있다.
아마도 한비자처럼 그의 독특한 법 개념을 가지고 인치주의를 완성시켜 권력국가를 만들어 낸 이론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실질적 의미의 법치주의와 법치국가의 사상가는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형식적으로 법의 탈을 빌려 쓰고 위장한 인치주의와 권력국가의 모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법가에서는 법의 내용과 목적을 인간보다는 국가를 우선시 하는 단체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법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충돌과 마찰을 안정화시키는 것은 어차피 국가나 법의 강제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강제규법으로서의 법의 내용과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떠나 자의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궁극적으로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인간의 가치 실현을 목적으로 한 수단적 성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비자의 법치사상은 인간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가 목적에도 民을 집중시킴으로써 현명한 자나 不肖子나 모두 자기 힘을 다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현명한 군주의 정치라고 하여 重刑論을 전개했던 것이다.
2. 勢治-권력의 장악
勢는 權勢, 權力또는 威勢, 威力 등을 가리켜 말한다. 한비자는 군주에게 법과 술이 갖추어져 있어도 勢가 없으면 제대로 다스려질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勢는 법과 술을 실행하는 전제이며 기초이다. 세가 없으면 법과 술은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비자에 의하면, “勢는 대중을 휘어잡는 바탕이다.” 臣民의 生死與奪權을 쥐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세가 없으면 군주는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暴君 桀이 비록 난폭하기는 하였지만 귀하기로는 천자였으며 그가 천하를 장악하고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세가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어진 마음을 가진 요순이라 할지라도 勢가 없으면 단 세 사람도 다스릴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한비자에 의하면 “군주는 은혜롭고 어진 마음을 기르지 말고 위엄의 勢를 길러야 한다.” 세가 있으면 다스려지고 세가 없으면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다는 것이다.
호랑이와 표범이 사람을 이기고 모든 짐승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호랑이와 표범이 발톱과 이빨을 잃는 다면 반드시 사람에게 제압당할 것이다. 지금 권세가 중요한 것은 임금의 발톱 및 이빨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임금으로서 그의 발톱과 이빨을 잃는다면 그것은 발톱과 이빨을 잃은 호랑이와 표범의 신세처럼 될 것이다.
힘이 많으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조회하고 힘이 적으면 상대에게 조회한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힘을 기르는 데 노력한다.
한비자가 정치에는 勢가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특히 유가의 賢에 대비시킨 것은 유가의 존현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적으로 보아도 “고대에는 덕을 숭상하고, 中世에는 지혜를 좇았으며, 오늘날에는 힘을 겨룬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체로 재능이 있으나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비록 현명하지만 못난 사람을 제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척밖에 안되는 材木도 높은 산에 서 있으면 천길이 되는 계곡을 굽어볼 수 있다. 이것은 재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자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桀이 천자가 되어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것도 현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력이 컸기 때문이다. 堯가 匹夫가 되면 세 집도 바로 잡을 수 없다. 그것은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비자가 말하는 세의 중점은 人爲之勢이다. 인위지세는 법률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보아 수레를 끄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나라는 군주의 수레와 같은 것이며, 권세란 군주의 말과 같은 것이다. 무릇 권세에 의지하여 멋대로 날뛰는 신하를 처벌하지 못하면서, 두터운 덕을 베풀어 민심을 얻고자 하는 것은, 마치 군주가 수레를 타지 않고, 말의 이로움을 빌리지 않으면서 수레에서 내려 그것을 좇아 달리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즉, 형벌의 위세를 인위지세의 기본내용으로 하여 嚴刑重罰 같은 위엄 있는 권세를 통하여 세습 제도를 통하여 전수되는 自然之勢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勢를 제도의 문제로 보았으며, 사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사람이 현명하건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제도에 의하여 세를 얻는다는 것이다.
“法을 안고 勢를 업는다(抱法處勢)”는 것은 그것을 두고 한 말이다. 또한 한비자에 의하면, 세는 自然之勢가 아니고 인간이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人之所設也). 그렇다면 사람이 絶對君主政을 법제도로 만들어 놓으면 권력은 한 사람의 군주에게 집중되게 마련이다.
한비자의 법은 군주의 명령이며, 그 명령의 실효성은 형벌권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리고 이 형벌권은 군주 한 사람에게만 귀속된다. 그러므로 그 군주가 권력의 자루를 쥐고서 勢를 업으면 절대군주정의 통일된 질서체계가 하나의 제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한편 이 같은 법가의 권세론은 천하의 신민들은 모두 “폭군에게라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尊君의 이론을 내세운다. 한비자는, 만일 세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자가 桀 이나 紂와 같은 下材여서 천하를 어지럽힐 경우에라도 그 신민들은 모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비자는 맹자의 “一夫可誅”주장에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자식은 아비를 섬기고,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천하의 常道라 했다. 임금과 아비는 절대적인 권리를 함유하고, 신하와 자식은 무한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임금의 권세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에, 법가에 있어서는 “임금이 비록 不肖하다고 해도, 신하가 감히 침해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신하와 자식은 비록 현명하다해도 임금과 아비에 의해서 오로지 쓰여 져야 할 뿐이다.”요컨대 법가에 있어서 군주의 권세는 절대적인 가치이며, 군주개인의 도덕성과 능력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 세를 가진 군주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수 없으며, 대신과 백성들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법가에 있어서 治國平天下의 관건은 군주의 덕성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군주가 이러한 權勢를 효율적으로 장악하고 그것을 排他的으로 운용하는 일이다.
이러한 한비자 勢論의 이론적 근거는 역사적 경험과 실제 정치 현실을 바탕으로 제기된 것이며, 특권 귀족과 군주 측근의 사적 이해관계에 대항하여 법치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정치 목적 하에 제기된 것으로서, 모든 군주는 나름대로의 세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국가는 각각 그들의 법을 갖고 있더라도 法과 勢를 운용하는 術이 없으면 그 나라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3. 術治-賞罰權에 의한 신료장악
군주에게 있어 術과 法이 모두 필수적인 정치수단이기는 하지만,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법의 적용대상인 백성들로부터 받는 위협보다는 신하들로부터 받는 정치권에 대한 위협의 정도가 훨씬 크게 느껴질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君權 강화를 지향하는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術에 대한 언급에 더 비중이 두어질 수밖에 없다.
한비의 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한비가 제기하는 술의 구체적인 방법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한비의 술의 운용은 무엇보다도 信賞必罰論과 긴밀히 연관된다. 왜냐하면 한비자 術論의 최종적인 표현 형식은 바로 賞罰權의 사용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술론이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와 연관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用術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參觀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군주가 정책을 결정할 때, 가급적 많은 신하들의 의견을 청취함으로써 중신들의 독주를 막아 여러 신하에게 言路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을 여러 번 하지 않으면, 군주는 진실을 듣지 못하고, 言路가 일부 신하에 집중되어 있으면 다른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가리워지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여러 번 군주의 독단할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책 결정의 판단을 重臣이나 寵臣에게 일임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기는 하되, 최종 판결권은 군주가 장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군주가 중신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지, 군주가 자신의 사적 의지대로 정치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韓非子에는 군주의 사적인 정치를 경계하는 언급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明主는 법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고, 자신의 임의에 따라 선발하지 않는다. 법에 따라 공적을 평가하지 자신의 임의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법을 내버려 두고 사적인 감정으로 정치하면, 비록 많은 사람을 죽인다 해도 姦人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人主가 되어 몸소 백관을 살핀다면, 시간도 부족하고 힘도 미치지 못한다….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을 버려두고, 법도를 따르고 賞罰을 살핀다.
다음으로 信賞必罰權은 군주가 신하를 제어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述論의 핵심을 이룬다. 상벌의 주요한 수단은 爵祿과 刑罰인데, 그것은 인간의 좋고 싫어하는 감정에 기초해 설치된 것이다. 賞罰論은 신하와 백성들 모두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법과 술의 정치 논리를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
철저히 능력과 업적을 중심으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인사제도를 운영하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형벌을 집행하는 권한을 군주가 독점하여, 중신의 상벌권 독점을 통한 君權 위협을 근원적으로 봉쇄함으로써 군주는 실제적인 정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상벌의 원칙으로 매개될 뿐이다.
이것은 새로운 관리 선발제도의 도입을 통해 특권 귀족의 붕당을 통한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벌권의 독점에 의한 군주의 신하제어는 능력과 업적에 따른 객관적인 원칙에 입각한 인사제도 운용방법으로서, 특권귀족의 세습과 賣官에 의한 인사 제도의 운영에 제동을 걸어 그들로부터의 君權 침략을 막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다음으로 군주가 신하를 제압하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刑名이론이 있다. 이것은 신하들이 비실제적인 이론을 무기 삼아 君權을 제한하려는 논리에 대응하여 君權을 유지하려는 유력한 수단이다.
刑名이란 말과 일이다. 신하가 진언하며 말하면, 군주는 그 말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오로지 그 임무의 완수여부에 따라 그 功을 평가한다.
공이 그 임무와 일치하고, 그 임무가 그의 말과 일치하면 상을 내리고, 공이 그 임무와 일치하지 않고, 그 임무가 그의 말과 일치하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 群臣중에 말만 크고 공이 작은 자는 벌을 내리는데, 공이 작기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이 그가 한 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다. 群臣중에 말은 작고 공이 큰 자도 역시 벌을 내리는데, 큰 공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이 그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의 害惡이 큰 공보다 더 심하기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임무에 따라 관직을 수여하고, 말에 따라 실제 일의 성과를 살펴 독책하여, 생사여탈권을 쥐고, 群臣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名과 實은 역시 군주의 신하 제어술로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즉 신하의 말과 실제 업적을 비교․ 평가함으로써 신하들의 허언과 그로 인한 논리만으로 군주를 비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법가의 術論에 대한 인상은 사기적인 요소가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편으론 정치적 신뢰를 결여한 이론으로 비쳐지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면 법가만큼 정치적 신뢰를 중시하는 학파도 없는데, 信賞必罰論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신상필벌은 군주가 완전히 가슴에 담아 두고 은밀히 신하를 제어하는 기술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賞罰의 원칙은 臣民 모두에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術의 항목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賞罰을 통해서 구귀족의 專橫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術은 법치가 그 실현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군주에게 요구되는 정치방식에 관한 내용이자 법치실현을 위한 현실적 실천가능성을 목적으로 하는 군주의 정치기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법은 술의 전제가 되며, 술은 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Ⅴ. 한비자 통치론의 진보성과 한계점
한비자는 전기법가사상을 집대성하여 법, 술, 세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중앙집권국가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군주전제의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법가적 통치체계를 수립하였다.
한비자가 말하는 “法”의 의미는 官이 民을 통제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민이 중시되는 법치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한비자가 말하는 법은 “정치가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정치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한비자의 통치론은 관리를 다스리는 의미로서의 법, 부국강병의 수단으로서의 법, 특권층 제거의 의미로서의 법의 상태로 크게 나룰 수 있다.
결과적으로 법을 통한 한비자의 통치론은 왕의 정치이념을 관리를 통하여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특권의 관리에 의해서 남용되는 것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자연스레 강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비자 통치론은 군주 일인에게 법제정과 관련된 권한을 지나치게 부여하고 있고, 게다가 군주의 법제정과 관련된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으
며, 일시적인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중국을 통일하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전 중국 역사를 통해 법가의 이상대로 법이 臣과 民의 구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 정치 질서가 성립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한비자에서 완성된 법가의 통치론은 도덕적 인간이해보다는 현실적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원대한 이상보다는 사회정치적 현실상황의 변화에 힘있게 대응할 수 있는 능률적 사고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법가적 통치론은 진시황의 통일에 가장 중요한 기본통치이념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유교 도덕론과 결합하여 2000여 년 동안 중국 전제군주제를 끌어온 힘이 되었다. 그 뒤 현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기에 과거 중국사상의 흐름을 유가와 법가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법가 진영에 속한 사상들은 유물론의 입장에 선 진보적 사상으로 평가하였다.
이것은 법가의 현실적 인간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 현실의 모순해결에 나타난 실천적 지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당연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법가의 이론이 비교적 과학적 인식을 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법속에는 군주의 무한 권력에 의존한 정치술의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었고, 인간관 또한 오직 정치대상으로만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자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가 합법적으로 독재를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마천도 史記에 한비자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韓非子는 도덕을 법률에 맞추되 마치 먹줄을 친 것처럼 일정하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사정에 비추어 생각할 때는 절박한 일이요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자는 것은 좋으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따뜻한 아름다움을 없앤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합리적 정치를 위해 규격화하고 객관화한 법가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한비자의 통치론은 그 專制的인 성격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대로 법가를 비판한 주체가 臣權의 강화를 기반으로 했던 유가였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유가의 이론은 漢 이후에 정식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한 이후의 중국의 정치질서가 기본적으로 신권의 강화에 기초를 둔 유가적 지주-관료제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법가는 표면적으론 2000년 이상 멸시되었다. 이것은 서양 문명에서 법이 영광의 하나로 받아들여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법가의 법과 서양의 법 개념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중국에서 법은 주로 군주의 엄격한 명령을 나타내는 형법 혹은 행정법인 데 반해, 서양의 법은 신이나 자연의 보다 높은 질서를 인간 사회에 구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통치론은 군주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객관적인 통치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법이라는 매개를 통해 군주의 恣意的 통치 행위에 일정 정도 제한을 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법가 이론의 공정성과 형평성에 어느 정도의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Ⅵ. 結 論
법가사상은 ‘법’․ ‘법치’에 기반한 정치사상과 구세관을 제시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성문법에 기반한 법치를 최초로 시행하였으며 ‘법’‘․법치’에 기본한 변법, 개혁을 통해 진나라를 단기간 내에 군사강국으로 발전시키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통일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법가사상은 한 무제 시대에 유학의 국학채택 이후 중국의 사상계와 지식인사회에서 2000여 년 이상 무시, 도외시되어 왔으며 우리나라에는 아예 소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陽儒陰法’ ‘外儒內法’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역대 왕조는 표면적으로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법’에 기본한 ‘법치’를 통치의 실질적 기반으로 하였으며 이 같은 상태는 2000여 년 이상 장구히 계속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법’을 기반으로 한 법가사상은 실제로 중국역사의 형성과정에서 유가사상, 도가사상에 못지않은 공헌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법가의 통치론은 그 자체로 볼 때 당시의 중국뿐만 아니라 후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즉 법가사상 발흥이전의 儒. 道 등 관념주의적 사상이 지녔던 결점을 보완하였을 뿐만 아니라, 治國과 平天下에 이르는 실천적 방안의 구체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비자의 통치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를 이용하여 富國强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군주는 덕이 아니라 “법”과 “세”와 “술”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옛 성인을 기준 삼을 것이 아니라 현실의 효율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가의 이 같은 입장은 다른 학파들의 복고적 역사관을 반대하고 발전적 역사관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한비자는 法․勢․術사상을 통해 정치에서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유가에서의 禮나 仁義에 의한 정치를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法源의 문제에 있어서 법은 군주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는 측면은 법 제정 뿐만 아니라 법 시행에 있어서도 군주의 독단으로 흐를 현실적 위험성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비자의 법․세․술 사상에 있어 그 목적상 군주의 이익과 民意수렴에서 民의 이익은 배제된 채 군주권 강화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볼 때, 결국 이것은 지배층과 일반 백성 사이의 불평등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비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상을 반대한 것과는 달리 도가에 대해서는 거의 비판하지 않았다. 도가는 인간의 본성을 순박한 것으로 보고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한 반면, 한비자는 인간을 악하다고 보고 사회적인 통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가와 한비자는 “無爲”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한비자가 法術과 賞罰의 운용을 신뢰하고 있음을 볼 때, 생명을 중히 여기고 득실을 가벼이 여기는 도가의 가치관과 일치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도가가 “무위”를 말한 것은 “觀照”의 지혜 그 자체를 긍정한 것이지만, 한비자는 정치를 건립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여 “無爲”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기묘한 결합이다. 법가는 극단적인 통제주의의 입장에 있는 것에 대해서 도가는 무위자연을 역설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양극단에 있는 사상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면, 한비자는 노자의 말을 자기의 입장에 유리하게 해석해서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비자는 군주는 “虛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정”하면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물을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또 군주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스스로를 욕망의 밖에 두어버리면 신하가 이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군주는 無爲어야 한다. 군주는 “刑名參同”이라는 무기가 있으므로 정치의 실무는 모두 신하에게 맡기어 조용히 이것을 관찰하면 된다.
“명군이 위에서 무위하면 群臣은 아래에서 두려워 긴장 한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이 허정무위라는 말은 노자와 똑같지만 그 내용은 훨씬 법가적이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법가 특유의 음험함이 살펴진다. 따라서 한비자가 이용한 노자의 사상은 노자 본래의 성격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그의 통치론은 군주 일인에게 법제정과 관련된 권한을 지나치게 부여하고 있고, 게다가 군주의 법제정과 관련된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으며, 일시적인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중국을 통일하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전 중국 역사를 통해 법가의 이상대로 법이 臣과 民의 구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 정치 질서가 성립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비자의 통치론은 군주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객관적인 통치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법이라는 매개를 통해 군주의 恣意的 통치 행위에 일정 정도 제한을 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법가 이론의 공정성과 형평성에 어느 정도의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법가사상의 興隆이 비록 단기간에 끝났다고 할지라도 사상적 측면에서 법가가 후대에 끼친 영향과 오늘에 주는 교훈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한비자의 법가적 통치론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實事求是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정치와 관련지어 볼 때 가장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具聖姬 (淑明女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