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굳건한 신앙으로
깊은 흑암이 우주를 덮고 있을 때
침묵을 가르고 들려온 “빛이 있으라”
그것은 거대한 진동의 소리 말씀,
비로소 질서가 혼돈을 눈 뜨게 했습니다.
투박한 연결에 불과했던 나의 삶 속으로
뜨거운 하늘 숨결이
가슴을 파고들던 날,
비로소 나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지웠습니다.
몸의 세포와 영혼의 골짜기마다
창조주의 지문이 선명해지기에
유일하게 빚어진 존재인 나는,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미완의 걸작품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별들이 멀게만 느껴지고
삶의 찬바람이 살결을 에일지라도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늘 발자취를 봅니다.
찰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의 신비
임마누엘, 이는 단순한 교리를 넘어
함께 하시는 나지막한 숨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나무 한 그루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한마디가
나의 모든 빚을 탕감하셨기에
오늘도 유일한 본향을 앙망하며
절망의 풍랑 앞에서도 주님만을 붙잡습니다.
죽음의 빗장을 부수고 나온 부활의
그 새벽처럼,
찢긴 역사의 틈새에서도
주신 약속의 불이 타오르길 기다리며
세상 소음 속에서도 하늘 음성을 듣습니다.
공의를 세우고 소망을 주시는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나, 묵묵히 광야의 세월 속에서
세상의 단맛과 짜릿한 미혹이 밀려올지라도
순전한 신앙으로 하늘의 집을 짓고 싶습니다.

일본의 참 양심 신앙인 우찌무라 간조
우리는 현재 세계적인 이념 갈등과 대립으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과 기존의 질서가 마구 파괴되고 있는 현상을 직시하게 된다. 서구 문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기독교 신앙의 변질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에 참 그리스도인 일본의 우찌무라 선생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일본 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신앙과 양심, 그리고 민족에 대한 사랑을 한 몸에 실천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애국자로서, 교육자로서 일본 사회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특히 제국주의와 전쟁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일본의 패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언한 일로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시대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예언자였다.
1861년, 도쿄에서 무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우찌무라는 일본의 전통 유교적 교육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과 기독교가 일본에 유입되며 그는 새로운 사상의 문을 열게 된다. 1877년 삿포로 농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클라크는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과 함께, 우찌무라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평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서양 기독교 문명과 성경 연구에 몰두했지만 서양식 교단 중심의 신앙 방식에 한계를 느꼈다. 귀국 후 그는 일본인의 정신과 문화에 맞는 자생적 기독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1891년, 우찌무라는 제국대학 부속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10월, 메이지 정부는 학생들에게 천황의 덕을 칭송하는 교육칙어를 낭독하고 경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우찌무라는 양심에 따라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나는 천황보다 하나님께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우찌무라의 행동은 당시 천황을 거의 신처럼 여기는 분위기에서 신앙과 권력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사건 이후, 우찌무라는 일본 전통사회와 제도권 기독교 양쪽 모두에서 배척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무교회주의無教会主義’라는 새로운 신앙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는 건물과 조직 중심의 교회나 목사 없이도 오직 성경과 양심에 따른 개인 신앙 삶을 중시하는 운동이었다.
그는 잡지 <성서지연구聖書之研究>를 창간하였다. 여기에 수많은 성경 해석, 시대 비판, 사회 평론을 실었다. 이 잡지는 40년 가까이 지속되며 지식인과 일반 독자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말과 글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신 앞에서의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며, 서구 열강과 경쟁하기 위해 아시아를 침략하는 현실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일찍부터 국가의 군사주의적 팽창과 천황숭배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설파했다. 특히, 그는 러일전쟁(1904-1905) 중 일본의 승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전하는 일본 기독교계에 분노했다.
그는 그 전쟁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은 칼로 얻은 국토를 반드시 칼로 잃게 하신다”, “불의한 전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며 예언자처럼 외쳤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서 고독한 목소리를 내며 끝까지 침묵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그는 일본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 전쟁으로 인한 패망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수차 경고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망이라는 역사 속에서 예언처럼 실현되었다.
우찌무라는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하나님의 나라와 일본>에서는 일본의 운명을 신의 관점에서 조망하며 민족의 회개를 촉구했다. 특히 <무교회주의>는 그의 신앙 노선이 집약된 대표적 저작이다. 그의 사상은 일본을 넘어 한국의 신앙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교신, 함석헌, 장준하, 김재준 등 한국 무교회 및 민족주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우찌무라 간조의 삶은 단순한 종교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가 잘못될 때, 신앙인은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다”는 그의 신앙 신념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강한 메시지다. 그가 외쳤던 ‘불의한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다.
“그대는 신앙의 이름으로 권력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대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는 않는가?”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말한다. 신앙은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으로 시대를 직면하는 용기라고. 삶이 예배가 되고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불타는 암울한 시대를 믿음으로 건너간 사람, 우찌무라 간조는 격랑의 시대를 살면서도 신앙과 양심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일본을 비판했고, 신앙인이면서 교단을 거부했으며, 학자이면서 민중의 고통에 귀 기울였다. 전쟁과 국가 숭배, 전체 독재주의가 만연한 시대 속에서도 그는 ‘불의한 국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고 담대히 외쳤다. 그의 삶과 글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권력과 신앙, 국가와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예언적 경고이며, 동시에 양심을 따라 살아갈 용기를 주는 등불이다.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smha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