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브레이브하트 : Braveheart
감독) 멜 깁슨 / 출연) 멜 깁슨, 소피 마르소, 패트릭 맥구언 / 1995년
‘브레이브하트’ (Braveheart)는 1995년 미국에서 만든 멜 깁슨 감독의 전쟁 휴먼 드라마 영화이다.
13세기 스코틀랜드 영웅 윌리엄의 사랑과 투쟁을 그린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때에 윌리엄 (멜 깁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에 맞선다. 순종적이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윌리엄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결국 잉글랜드는 윌리엄을 잡기 위해 계략을 쓰게 되는데…
– 1995년 멜 깁슨 감독이 만든 시대극, Braveheart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뜻은 줄거리에서 “용감한 마음”임을 알 수가 있다. 이 뜨거운 마음을 준 사람은 브레이브 하트 실화의 실존인물인 ‘윌리엄 월리스’다. 그는 처참한 죽음의 고통을 견디며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고, 그 영향으로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멜 깁슨
.각본: 랜들 월러스
.제작: 멜 깁슨, 앨런 라드 주니어, 브루스 대비, 스티븐 매케비티
.출연: 멜 깁슨, 소피 마르소, 패트릭 맥구언, 앵거스 맥페이든, 브렌던 글리슨
.촬영: 존 톨
.편집: 스티븐 로젠블럼
.음악: 제임스 호너
.제작사: 파라마운트 픽처스
.배급사: 파라마운트 픽처스 (미국), 20세기 폭스 (전 세계)
.개봉일: 1995년 5월 24일
.시간: 177분

– 출연진
멜 깁슨 – 윌리엄 월리스
소피 마르소 – 이자벨 공주
앵거스 맥페이든 – 로버트
캐서린 매코맥 – 머론
패트릭 맥구언 – 에드워드 1세
제임스 코스모 – 캠벨
브렌던 글리슨 – 해미시
토미 플래너건 – 모리슨
브라이언 콕스 – 아길 월리스
숀 롤러 (Sean Lawlor) – 맬컴 월리스
숀 맥긴리 (Sean McGinley) – 매클랜노
스티븐 빌링턴 (Stephen Billington) – 필립
데이비드 오하라 – 스티븐
피터 멀런 – 베터란
이언 배넌 – 로버트 브루스 시니어
– 수상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분장상, 아카데미 감독상, 골든 글로브 감독상, 아카데미 촬영상 등

○ 내용
13세기 말엽,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잉글랜드는 왕권을 요구하며 스코틀랜드에 폭정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윌리엄 월레스는 폭정을 피하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장한다.
그가 장성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월레스는 조국 스코틀랜드가 여전히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 생크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월레스는 그의 운명적인 사랑 머론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나 잉글랜드의 폭정으로 머론은 잔인하게 처형된다.
그 과정에서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모아 용맹과 투지로 무장한 저항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잉글랜드는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오고 스털링 전투에서 월레스의 군대는 잉글랜드에 큰 승리를 거둔다.
월레스 군대의 용맹함에 당황한 롱샹스는 휴전을 제의하게 되고, 롱샹스는 왕자 에드워드의 무기력함에 공주 이사벨을 화해의 사절로 보내게 된다.
비록 정략적인 만남이었지만 이사벨은 월레스의 애국심과 용맹함에 매혹되고, 그녀는 잉글랜드의 침공 사실을 월레스에게 알려준다.
폴커크 전투에서 두 왕조는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기사들의 충성심은 이미 잉글랜드에 돈으로 매수된 빛바랜 충성심으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고, 목숨만 건진 월레스는 다시 군대를 정비하려 하나 롱 생크의 계략에 결국 월레스는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히게 된다.

결국 월레스는 런던으로 보내지고, 잔인하게 공개처형의 운명을 맞는다.
이사벨 공주 조차도 월레스를 구할 수 없었으며, 위대한 영웅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월레스의 죽음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윌리암 월레스의 숭고하고 의로운 정신을 마음 속에 새기며 베노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시킨다.
스코트랜드는 많은 희생을 치룬 대가로 소중한 자유를 얻게 된다.
월레스는 죽은 뒤 갈기갈기 찢겨서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군데 변방에 경고용으로 보내졌는데, 롱생크가 기대했던 효과는 없었다.
서기 1314년, 스코틀랜드 애국자들은 굶주림과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베녹번 전투에 임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인 답게 싸웠고 그들의 자유를 쟁취했다.

○ 연출 및 주연 ‘멜 깁슨‘ (Mel Gibson, 1956 ~ )
연출 및 주연을 맡은 멜 깁슨 (Mel Gibson)은 1956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영화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1977년 영화 <썸머 시티>에서 조연으로 데뷔했다.
1979년부터 조지 밀러 감독에 의해 <매드 맥스>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며 이름을 알리기 이후 <매드 맥스 2, 3>에 이어, 1987년부터 <리썰 웨폰> 시리즈에 출연하며 <리썰 웨폰 2, 3, 4>까지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외에도 <매버릭>, <전선 위의 참새>, <햄릿>, <컨스피러시>, <왓 위민 원트>, <싸인> 등의 작품을 통해 터프함, 섹시함, 친숙함 등 다양한 연기 변화를 보였다.
1990년대 들어 영화감독으로도 성공을 했는데, 자신이 연출 · 제작 · 주연한 <브레이브하트>로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감독상을 포함 5개 부문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5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감독상을 받았다.

○ 언론소개 : 서태호의 영화로 보는 삶
– 신념 있는 삶은 용감한 심장 (Brave Heart)에서 시작된다!
< 프롤로그>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 1995>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오직,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높은 이상과 정의로움이 가득한 용감한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다 죽는다.
개인의 행복과 안락함이 우선시되는 현실 사회에서는 그런 용기의 발휘는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먼 훗날 역사에 남는 위인들은 당장의 안락함에 타협하지 않고 뜨겁게 뛰는 심장의 소리를 따라 사사로운 속셈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가끔은 심장에서 보내는 뜨거운 소리 (Brave Heart)를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신념 있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숭고하고 고결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 영화 줄거리 요약>
13세기 말엽(128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포악한 이교도로 악명 높던 잉글랜드 왕’롱생크’가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롱생크는 작위와 영토라는 욕망의 미끼로 그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생크’는 서서히 스코틀랜드 백성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폭정을 시작하게 되고,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반항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종자를 몰살시키기 위해, 결혼 첫날밤 신부를 잉글랜드 지주가 차지할 권리를 주는 “프리마 녹테(초야권)”라는 제도를 부활하여 스코틀랜드 백성에게 큰 치욕과 좌절감을 주게 된다.
이러한 금수만도 못한 제도를 피해 마을 청년 ‘월레스(멜 깁슨 분)’는 사랑하는 처녀 ‘머론(캐서린 맥콤맥 분)’과 비밀 결혼을 올리고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월레스는 자신의 신부를 욕보이려는 군인을 죽이고 달아나게 되고, 급기야 신부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릴 적 아버지와 형을 잉글랜드 군인에게 잃은 월레스는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월레스는 “타탄 격자무늬 킬트(Kilt:스코틀랜드의 남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한 치마형 하의) 복장”과 얼굴에는 파란색의 물감으로 강인한 전사의 의지를 채색하고 용감하게 돌격하여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잉글랜드군을 파죽지세로 누르며 점점 ‘롱생크’왕을 압박해 나간다. 롱생크왕은 무능한 자기 아들 대신 뛰어난 프랑스 출신 세자빈 ‘이사벨 공주(소피 마르소 분)’를 파견하여 월레스와의 협상을 시도하라 명한다.
이때 영특한 이사벨 공주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반군 지도자 월레스의 애국심과 뜨거운 열정에 사랑을 느끼게 되고, 잉글랜드의 간교한 계략(앞으로는 협상을 뒤로는 야습)을 알려준다. 잉글랜드의 계략을 알게 된 월리스는 협상 대신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귀족인 ‘부르스 백작’은 나환자인 자신의 교활한 정치인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백작들을 회유하여, 월레스를 잉글랜드에 바치는 대가로 자신들은 권력과 영토를 나눠 가지게 된다.
이런 계략에 속아 평화적 협상을 위해, 귀족 회의에 단신으로 참석한 월리스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체포되어 런던의 롱생크 왕에게 압송된다. 충성서약을 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갖은 고문 속에서도 “Freedom(자유)”을 외치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월레스의 죽음에 정신을 차린 ‘브루스 백작’과 백성들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잉글랜드와 ‘베노번 전투’에서 대승리를 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 관전 포인트>
A. 스코틀랜드 저항군 지도자 월레스가 ‘스털링’ 전투에서 백성들을 이끈 연설은?
‘스털링’ 전투에 앞서 수적으로 열세인 상태에 기가 죽고 겁이 난 스코틀랜드 반란군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귀족들의 싸움에 죽을 수 없다고 뒤돌아서서 집으로 가려고 하는 상황에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자손이여! 난 윌리엄 월레스요. 여러분은 폭정에 도전하고자 정의의 칼을 뽑았소. 여러분은 자유인이요! 자유인으로서 싸우러 온 거요. 저 훈련된 잉글랜드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소, 하지만 도망치면 당분간을 살 수 있겠지만 세월이 흘러 죽게 되었을 때, 오늘부터 그때까지의 시간을 맞바꾸고 싶을 거요. 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어 다시 적에게 외치고 싶을 거요. 목숨을 빼앗을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진 못할 거라고!”라고 외친다. 이 연설에 감동한 백성들은 칼과 창을 높이 들고 환호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전투에 임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B. 월레스가 부패한 귀족들에게 한 얘기는?
욕망의 부패에 빠진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윌리엄 월레스에게 작위를 주고 잉글랜드와 타협하자고 하자, 월레스는 “우리가 비록 이번 전쟁에서 이겼지만, 여러분들이 뭉치지 않는 한 그들은 다시 올 거요. 나는 잉글랜드를 공격해서 그들을 무릎 꿇게 할 거요. 롱생크 왕이 주는 작은 은혜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더 좋은 것을 못 보고 있는 거요.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요. 당신들은 우리가 뭔가 해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오히려 당신들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뭔가 해야 하오. 난 그 자유를 위해 싸울 거요!” 라며 단호히 귀족들의 회유를 거절하고 전장 속으로 달려간다.
가증스럽게도 스코틀랜드의 귀족” 모네에, 로클란, 브루스”는 윌리스를 돕는 척하다가 함정에 빠뜨려 잉글랜드 왕에게 바치게 된다.

C. 월레스가 사형 직전 이사벨 공주에게 한 말은?
월레스의 애국심과 용맹함을 존경하던 이사벨 공주는 사형 집행 전 찾아와 롱생크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비를 얻어 목숨을 구하라고 애원하자, 월레스는 “롱생크에게 맹세하면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요. 사람은 언젠가는 죽소.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살아있는 것 아니요”라며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신념을 꺾지 않고 죽어간다.
공개처형 후 그의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서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군데 변방에 경고용으로 걸리게 되나, 이를 계기로 분노한 스코틀랜드의 백성들은 더욱 뭉쳐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D. 월레스를 사랑했던 잉글랜드의 세자빈이 롱생크 왕에게 전한 얘기는?
병상에 누워있던 롱생크왕에게 세자빈 이사벨은 “지금 내 배 속에 자라고 있는 건 월레스의 아이이며, 당신의 핏줄은 당신 아들과 함께 끊긴다. 당신 아들도 왕좌에 오래 있진 못할 거다”라며 잔혹한 고백을 하게 된다.
결국 포악했던 롱생크 왕은 충격으로 사망하게 된다.
E.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족에게 어떻게 각인되고 있나?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실존 인물로, 그의 사후 556년이 된 1861년 6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스털링에서는 그를 기리는 90m 높이의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기록과 일기 등은 스코틀랜드의 ‘그래스고’에 사는 윌리엄 기사의 후손들에 의해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이 후손들은 영화 촬영 기간에도 제작진과 동고동락하며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조언했으며, 전투 장면에서는 직접 엑스트라로 출현하기도 했다.F. 영화의 촬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1994년 6월 6일 시작한 영화의 촬영은 스코틀랜드의 가장 높은 벤네비스산, 유럽에서 최고의 강우량을 기록하는 글렌네비스계곡, 아일랜드의 중세 유적지인 트림성 등에서 이루어졌다. 트림성은 목조 건축물로 훼손되었는데 제작진이 약 12주에 걸쳐 공사하여 웅장한 성으로 변신시켰다. 멜 깁슨이 감독, 주연을 동시에 맡아 화제가 되었다.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픽처, 감독, 촬영, 분장, 특수효과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 에필로그>
잉글랜드 왕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자비(Mercy)’라는 말로 구차하게 생명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용감한 심장(Brave Heart)이 이끄는 대로 스코틀랜드의 ‘자유(Freedom)”를 갈구한 ‘윌리엄 월레스’는 죽어서도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신념을 주어 결국 잉글랜드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쟁취하게 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개인의 속셈보다는 심장이 전하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신념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_ 서태호 칼럼니스트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지도자 윌리엄 월리스 / 윌리엄 월레스 (William Wallace, 1272 / 1276년 ~ 1305) 사형
윌리엄 월리스 / 윌리엄 월레스 (스코틀랜드 게일어: Uilliam Uallas, 1272 / 1276년 ~ 1305년 8월 23일)는 스코틀랜드의 기사이자 독립영웅으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실존 모델이기도 하다.
앤드루 머레이 (Andrew Moray)와 함께 스털링 다리 전투 (Battle of Stirling Bridge)에서 잉글랜드 군을 패퇴시킨 공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임명되어, 폴커크 전투 (Battle of Falkirk) 때까지 이 직을 유지하였다. 폴커크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한 후, 7년간 숨어 지내다가 스코틀랜드 귀족의 배신에 의해 발각되어 글래스고 (Glasgow)의 부근 로브로스톤 (Robroyston)에서 포박당하고, 잉글랜드의 런던으로 넘겨져 처형되었다.
월리엄은 시인이었던 눈먼 해리 (Blind Harry)가 쓴 15세기 소설 The Acts and Deeds of Sir William Wallace, Knight of Elderslie로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전기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우며, 역사 자체보다는 전설에 기반한 것이었다. 1995년 영화 ‘브레이브하트 (Braveheart)’는 이 소설에 기초한 것이다.

– 윌리엄 월리스 / 윌리엄 월레스 (William Wallace)
.출생: 1270년, 영국 엘더스리
.사망: 1305년 8월 23일, Smithfield, London
.배우자: 마리온 브레이드후트
.부모: 마가렛 크로포드 부인, 말콤 월레스
.형제자매: 말콤 2세 월레스, 존 월레스
○ 배경
월레스의 출생지나 출생일은 확실치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1272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1276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전해지기를 그는 렌프루샤이어 (Renfrewshire)의 페이즐리 (Paisley) 근방 엘더슬리 (Elderslie)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아이샤이어 (Ayrshire)의 킬마녹 (Kilmarnock) 근처에 있는 더웬트 파크 (Derwent Park)의 다른 이름인 로랜즈 길 (Rowlands Gill)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엘더슬리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월리암의 아버지인 로우 펠 (Low Fell)의 데이빗 새빌 (David Saville, 말콤 새빌 (Malcolm Saville)로 알려졌지만 데이빗 새빌의 인장이 발견된 이후 데이빗 새빌로 정정됨)이 청지기 제임스 (James the Steward)의 봉신이자 기사였다는 것을 근거로 말하지만 확실치 않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의 젊은시절 행보가 아이샤이어 근방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전설에서는 월레스가 평민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동향인이었다는 로버트 더 브루스 (Robert the Bruce)는 상류 귀족계층이었다. 월레스의 혈통에 대한 정확한 단서는 없지만 그는 웨일즈인 리처드 월레스의 자손으로 (월레스는 웨일즈인이라는 의미) 훗날 스코틀랜드의 왕족이 된 스튜어트 (Stuart) 가문의 봉신이자 하급 귀족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1999년 재발견된 윌리암 월레스의 인장은 그의 어린시절을 더욱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해내려오는 바는 말콤 월레스 경의 세 아들 말콤, 존 (John), 그리고 윌리암의 셋 중 그가 바로 막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인장에 새겨진 바를 따르면 윌리암은 아이샤이어의 알란 월레스 (Alan Wallace)의 아들로, 알란은 1296년 ‘넝마주이 이야기 (Ragman Roll)’에 ‘아이샤이어의 왕관 점유인 (crown tenant of Ayrshire)’ 자격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피오나 왓슨 박사(Dr. Fiona Watson)는 1999년 3월 출판된 ‘윌리암 월레스 경과 아이샤이어의 연관성에 대한 보고 (A Report into Sir William Wallace’s connections with Ayrshire)’에서 마찬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02년 ‘윌리암 월레스’를 저술한 역사가 앤드루 피셔 (Andrew Fisher)는 만일 애국자의 아버지 알란이 ‘넝마주이 이야기’의 알란과 동일인이라면 렌프루샤이어보다는 아이샤이어 쪽에 비중을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다.

월레스는 사제가 된 두 삼촌으로부터 라틴어를 배웠다. 눈먼 해리의 소설에는 월레스가 언제 스코틀랜드를 떠났는지, 1297년 전에 그가 전투에 참여했었는지의 여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월레스가 태어난 시기에 왕 알렉산더 3세 (King Alexander III)는 20년 이상 통치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치하에는 평화롭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시기였으며 계속되는 잉글랜드인들의 침공도 잘 막아냈었다고 한다. 1286년 알렉산더는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은 알렉산더의 4살난 손녀 마가렛 (Margaret, “노르웨이의 소녀 (the Maid of Norway)”)을 여왕으로 선포했다. 여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영주들은 그녀의 나이가 다 찰때까지 임시정부를 세워 스코틀랜드를 관리하였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King Edward I)는 불안정한 스코틀랜드의 상태를 이용하여 영주들과 협정 (Treaty of Birgham)을 맺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마가렛을 약혼시켰다. 그러나 1290년 마가렛은 고향인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여행하는 동안 병에 걸려 8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자라 주장하는 자들이 잔뜩 나타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코틀랜드가 왕위계승 전쟁 상태로 떨어질 것은 자명하였고, 지도자들은 에드워드 왕의 중재를 청했다. 중재에 앞서서 에드워드는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최고영주 (Lord Paramount of Scotland)로 대우해줄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유력한 계승후보자 존 발리올 (John Balliol)이나 로버트 브루스 등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1292년 11월 초 베릭-어폰-트위드 (Berwick-upon-Tweed)의 봉건법원은 존 발리올에게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결정하였다. 이는 17일 에드워드에 의해 공포되었다.
왕위 계승 과정은 겉보기엔 공정하고 정당하였지만, 에드워드는 중재 과정에서 얻은 정치적 특권을 이용하여 존 왕의 입지를 자꾸만 어렵게 하였다. 발리올은 1296년 3월 에드워드와의 약조를 깨고 더이상 그를 최고영주로 대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의 버윅-어폰-트위드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반대세력을 학살했고, 4월에는 로디언 (Lothian)의 던바 전투 (Battle of Dunbar)에서 스코틀랜드인에게 크게 이겼다. 에드워드는 7월 킨카딘 성 (Kincardine Castle)에서 발리올을 퇴위시키고 8월 버윅으로 돌아가 2천여 명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모아놓고 다시금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상징하는 운명석 (Stone of Destiny)을 스콘 궁에서 들고 나와 런던 (London)으로 가져가버렸다.

○ 군사 경력
– 초기 공적
아이샤이어의 전설에 따르면, 루낙 (Lanark) 시장에서 2명의 잉글랜드 병사가 낚시를 하고 있던 월레스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싸움이 일어났고, 월레스는 두 잉글랜드 병사를 죽였다. 눈먼 해리는 얼바인 (Irvine) 강가의 싸움에서 월레스가 5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을 죽였다고도 한다. 곧 월레스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던디 (Dundee)에 위치한 성 바울 성당 (St. Paul’s Cathedral)의 장식판 내용에 따르면 월레스는 그와 그의 가족을 모욕한 던디의 잉글랜드인 지배자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그의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월레스는 던디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고, 한동안 근처 킬스핀디 (Kilspindie)에서 성장했다는 추측이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조금 사실성의 비중이 있다.
월레스의 1294년부터 1296년까지의 활동을 논하고 있는 문헌은 없지만, 눈먼 해리는 월레스가 아이샤이어의 치안대장이자 그의 삼촌인 로날드 크로포드 (Ronald Crawford)의 보호하에 있었다고 한다. 월레스는 삼촌을 믿고 한때 약간의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듯 하다. 1291년부터 1297년 사이에 월레스는 잉글랜드가 패배한 몇차례의 저항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레스와 40인의 동료는 눈먼 해리가 월레스의 아내였다고 하는 레밍턴 (Lamington) 출신의 마리아 브레이드풋 (Marion Braidfute)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1297년 5월 라낙 (Lanark)의 잉글랜드 치안대장 윌리암 헤셀릭(William Heselrig)을 살해하고 그의 사지를 절단하였다. 이어서 그는 아이어 (Ayr) 근방 로우던 언덕과 아이샤이어에서의 매복작전을 성공시키고, 스콘의 윌리암 더글라스 (William Douglas)와 힘을 합하여 잉글랜드의 법무장관 윌리암 옴스비 (William Ormesby)를 패주시켰다. 에버딘 (Aberdeen), 퍼스 (Perth), 글래스고우 (Glasgow), 스콘, 던디, 그리고 이북 지방이 모두 해방되었다. 그러나 7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잉글랜드와 얼바인에서 연대하자 폭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시도는 좌절되었다. 8월 월레스는 동료들을 데리고 셀커크 숲 (Selkirk Forest)을 떠나 스털링 (Stirling)에서 앤드루 모레이 (Andrew Moray)와 연합하였다. 모레이는 또다른 저항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 이들은 스털링에서 힘을 합해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눈먼 해리에 따르면 월레스의 치고 빠지기식 전략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1297년 6월 아이어의 농장에 남작회의를 소집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논했다고 한다. 이 회의는 렌프루샤이어에서도 있었다고 하지만 증거는 없다. 결국 잉글랜드는 로날드 크로포드를 교수형에 처했고, 뒤늦게 삼촌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월레스는 삼촌의 주검에 분노하여 아이어 지역의 잉글랜드 주둔군을 밤에 기습,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러 모두 죽였다. 월레스는 안전을 위해 셀커크 숲으로 다시 돌아갔고, 삼촌 로날드의 아들 윌리암은 월레스의 저항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월레스의 존재감이 점차 커지면서 존 그레이함 (John Graham)은 숲을 떠나 고원지대로 이동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동중에 스털링에서 앤드루 모레이와 다시 연합한 월레스는 이 시기부터 게릴라 전술을 벗어나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 스털링 다리 전투
월레스와 모레이의 연합군은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 (Battle of Stirling Bridge)에서 잉글랜드의 중기병대와 조우하여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슈레이 (Surrey)의 백작이 이끄는 정규군 300 기병대와 일만 보병대는 강 복쪽을 건너다가 재앙을 맞았다. 기껏해야 3명이 건널 수 있는 좁은 다리로 인해 한번에 건너갈 수 있는 부대의 수는 제한적이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이 다리를 건너는 중도에 후미를 쳐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부대를 격파하고, 재빠르게 강 건너편의 다리를 건넌 부대를 패퇴시켰다.
월레스의 부대장중 한명이 이끈 후미에서의 돌격이 잉글랜드군 일부를 도주하게 만들면서 잉글랜드군은 전방으로 밀려났고, 다리를 건너려는 잉글랜드군들이 밀어닥치면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다리가 붕괴되어 많은 잉글랜드군이 수장되었다. 눈먼 해리는 다리를 무너뜨린 것은 스코틀랜드군 이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이 승리로 한껏 사기가 올랐다.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재무담당 휴 크레싱햄 (Hugh Cressingham)을 비롯한 많은 잉글랜드군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크레싱햄의 가죽을 벗겨내고 벨트와 가죽치마를 만들어 전승을 기념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군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윌리암 크로포드는 400인의 중기병을 지휘해 패주하는 적을 쫓았다. 그해 겨울 앤드루 모레이는 전장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삼촌인 보스웰 (Bothwell)의 윌리암 모레이 (William Moray)는 1300년 11월 버윅에서 기록하길 앤드루 모레이는 왕에 반역을 일으킨 죄로 스털링에서 처형되었다고 하였다.
스털링에서의 대승으로 인하여 월레스와 부대장 존 그레이함, 3번대장 윌리암 크로포드는 로버트 브루스에게서 기사 서훈을 받았다. 또한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이자 부대 지휘관 (Guardian of Scotland and Leader of its armies)’ 칭호를 받게 되었다.
스털링 전투 이후 6개월간 월레스는 부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였다. 이것은 전에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서 했던 것을 이제는 스코틀랜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분노했지만 이에 굴하지는 않았다.

– 폴커크 전투
1년 후인 1298년 4월 1일, 월레스는 폴커크 전투 (Battle of Falkirk)에서 패배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록스버그 (Roxburgh)를 침공하여 몇 개의 성을 재점령했지만 월레스를 전장으로 끌어내는데는 실패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농지를 불태우며 후퇴하였고, 잉글랜드군 병참담당은 시원스러운 대책을 세우지 못하여 사기는 떨어지고 식량은 부족해졌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폴커크에서 월레스를 찾아냈다.
월레스는 창병들을 모아 ‘스킬트론 (schiltron)’이라고 부르는 뾰족한 나무 장대를 꽂아놓은 방벽을 구축했다. 잉글랜드 기병이 돌격하여 스코틀랜드 궁병들을 분쇄하였고 스코틀랜드 기병은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이후 에드워드는 비로소 스킬트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보병들이 직접 석궁이나 활, 투석기 등으로 스킬트론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고, 아마도 에드워드의 궁병들이 그 작업을 대신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스킬트론은 점차 파괴되었고 영국군은 남은 저항군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많은 수를 잃었으며 월레스는 겨우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이 전투에서 부대장 존 그레이함이 전사하고 3번대장 윌리암 크로포드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월레스는 퇴각중에 캘런더 (Callendar)의 덤불에서 잉글랜드 성당기사단 (Templar)의 단장 브라이언 드 제이 (Brian de Jay)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1298년 9월 월레스는 캐리크 (Carrick) 백작 로버트 브루스, 쫓겨난 왕 존 발리올의 사촌동생 베이드녹 (Badenoch)의 존 코뮨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칭호를 박탈당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브루스는 1302년 월레스를 쫓아내고 에드워드와 만나 화평을 도모하였다.
눈먼 해리에 따르면 1298년 후반 월레스는 윌리암 크로포드와 함께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들의 배는 중간에 붉은 돛과 노략질로 악명높은 해적 리처드 롱고빌 (Richard Longoville the Red Reiver)의 배와 맞닥뜨렸다. 월레스는 크로포드가 배를 지휘하는 동안 숨어있다가 리처드가 배에 오르자 뛰쳐나와 공격하였다고 하며, 이 해적을 사로잡아 프랑스로 데려가서는 필립 4세의 사면을 받도록 해주었다.
월레스는 프랑스의 스코틀랜드인 근위병으로 근무하여 잉글랜드군과의 두 번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의 처지를 호소하기 위하여 로마로 잠깐의 여행을 떠났다. 1303년 종자 거스리 (Squire Guthrie)가 프랑스에 파견되어 월레스의 귀환을 권유하였으며 월레스는 그 해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들은 엘코 숲 (Elcho Wood) 근처의 윌리암 크로포드 농장을 되찾기 위해 갔다가 함정에 빠졌다. 월레스를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잉글랜드군은 농장 주변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월레스는 영국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배반자로 추정한 부하를 죽이고 도주하였다.

○ 월레스 체포와 처형
월레스는 1305년 8월 5일까지 숨어다녔지만 에드워드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 (John de Menteith)는 글래스고우 근방의 로브로이스턴(Robroyston)에서 월레스를 잡아 잉글랜드군에게 넘겼다. 월레스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웨스트민스터 홀 (Westminster Hall)에서 범죄자들의 왕이라는 의미로 나무관을 쓴 채, 양민 학살과 반역죄의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반역이라는 죄목에 대하여 ‘나는 한번도 에드워드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반역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자리에 없는 존 발리올이 그의 공식적인 왕이었다. 월레스에겐 유죄가 선고되었다.
1305년 8월 22일 선고 결과에 따라 월레스는 홀에서 끌어내려져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끌려 시내를 돌아 스미스필드 마켓 (Smithfield Market)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지를 묶여 네 조각으로 찢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졌다가 풀어지고, 거세된 이후에 내장이 도려져 불태워졌다. 이후 머리가 잘리고 몸은 네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의 머리는 창끝에 꼽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고, 머지않아 그의 형제인 존과 사이먼 프레이저 (Simon Fraser)의 머리가 함께했다. 그의 갈비뼈는 뉴캐슬 (Newcastle), 버윅, 스털링, 애버딘에 각각 나뉘어 전시되었다.
그의 처형지인 스미스필드 옆 성 바르톨로뮤 병원 (St. Bartholomew’s Hospital)에는 그의 추모비가 남아있다. 스코틀랜드 애국자들과 관광객들은 오늘날도 이곳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월레스가 사용했다고 하는 검은 수년간 덤바튼 성 (Dumbarton Castle)에 걸려있었으며 현재는 스털링 근처의 국립 월레스 기념관(Wallace National Monument)에 소장되어 있다.
○ 평가

– 스코틀랜드의 성웅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영웅이자 수호자였던 기사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지. 허나 무엇을 위해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오.”
윌리엄 월레스는 에어주의 지주인 말콤 월레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페이즐리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윌리엄 월레스는 3가지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교양인으로 성장했다. 이후에는 글래스고 대성당에 가서 로버트 위샤르트 주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윌리엄 월레스는 글래스고 대성당에 머무르면서 조국 스코틀랜드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의 경험이 월레스가 훗날 스코틀랜드의 투사로 거듭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자 이에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반발하였고, 결국 1296년에 이르러 에드워드 1세가 대대적인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몰살당했다. 잉글랜드 병사와 시비가 붙어 그들을 죽이는 바람에 래너크의 치안 대장인 윌리엄 헤셀릭이 체포령을 내리고 아내인 메리언을 살해하자 1297년에 그를 죽여 복수했다.
그 후 사람들을 점점 모으면서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다. 아이샤이어에서는 윌리엄 옴스비를 패주시켰고, 앤드류 더 모네이와 합류해 스털링 다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해 휴 크래싱 햄을 죽이고 가죽을 벗겼다. 스털링의 승리로 월레스는 기사 작위를 받고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잉글랜드의 요크 성을 점령하면서 요크성의 성주인 에드워드 1세의 조카의 목을 잘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1298년 4월 1일에 폴커크에서 맞서 싸웠지만 패했으며, 스코틀랜드를 빠져나가 프랑스, 로마 교황청 등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월레스는 프랑스의 스코틀랜드인 근위병으로 근무하여 잉글랜드군과의 두 번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303년에 종자 거스리 (Guthrie)가 프랑스에 파견되어 월레스의 귀환을 권유, 월레스는 그 해 스코틀랜드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들은 엘코 숲 근처의 윌리암 크로포드 농장을 되찾기 위해 갔다가 함정에 빠져 잉글랜드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1305년까지 숨어다녔지만 결국 글래스고 근방의 로브로이스턴에서 에드워드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 (John de Menteith)에게 잡혔고, 잉글랜드군에 넘겨졌다.
런던으로 압송된 월레스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은 후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사지가 찢겨졌으며,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조금 보태자면, 윌리엄 월레스가 받은 형벌은 교수척장분지형이라는 형벌로, 교수형을 시키기는 하나 그것으로 편안하게 숨을 끊어주지 않는다. 이 형벌 자체가 죄인을 최대한 오래 살려두고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이라 괴로워하며 발버둥치는 것을 적당히 놔두다 줄을 끊어 다시 숨을 쉬게 해주지만 그 대신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고 생식기와 살점을 도려내 죄인의 눈으로 자신의 신체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팔 다리를 잘라낸 뒤 마지막으로 목을 자르는데, 이때까지 숨이 붙어있을 수 있기에 상당히 끔찍하고 악독한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며 이미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는 유서까지 길게 준비했다고 한다.
유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사람은 자유롭게 의지를 가지는 게 사람이지, 가축처럼 사슬에 묶여 다른 사람을 따른다면 더 이상 그건 사람이 아니다.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중략) 너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무나.”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