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아리랑
감독) 나운규 / 주연) 나운규, 신일선, 남궁운 / 1926년
1926년 10월 1일,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영화는 개화기 시절 서구문물이 쏟아저 들어오는 가운데 한국에도 들어왔다. 최초로 상영한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에는 움직이는 사진이란 뜻의 활동사진으로 불렸다.
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1919년작 ‘의리의 구투’인데, 다만 이 작품은 100% 영화가 아니라 연극 중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의 일명 연쇄극이었다. 이후 1923년에 조선총독부의 저축 장려 캠페인으로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나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시금석이라 평가되는 것은 그 유명한 춘사 나운규의 1926년작 ‘아리랑’이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에 10월 1일 개봉된 나운규 감독의 영화 대표작이다. 나운규가 각본 · 감독을 맡았다. 흑백 35밀리 무성 영화이다. 당시 민족적 저항의식을 작품 저면에 깔아, 전국적인 규모로 갈채를 받았다. 이때 신일선이 처음 이 영화로 데뷔하였다.
나운규는 이 영화에서 실성한 대학생 ‘영진’으로 출연한다. 극중 그의 친구인 현구와 영진의 여동생은 사랑에 빠지지만 친일파 기호가 여동생을 겁탈하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영진이 낫으로 기호를 죽이고 일본 경찰에 잡혀간다. 잡혀가는 영진을 보내며 사람들은 아리랑을 부른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은 못 놓아 눈물을 쏟으면서 아리랑을 따라 부를 정도로 감동받았다고 한다.
아리랑의 모티프가 되었던 곳은 나운규의 고향인 회령에서 청진까지 철도를 부설하던 노동자들이 부르던 애달픈 노랫가락 ‘아리랑’에서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를 착상했다고 전해진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모두 3부작으로, 후편인 ‘철인도’ (鐵人都, 1930년)와 3편인 ‘오몽녀’ (五夢女, 1936년)로 이어진다.
– 영화 ‘아리랑’
.감독 · 각본: 나운규
.출연: 나운규, 신일선 (申一仙), 남궁운 (南宮雲)
.제작: 전
.제작사: 조선 시네마 프로덕션
.개봉일: 일제 강점기 1926년 10월 1일
.언어: 무성 영화 한국어 해설
.흥행수익: 1만 5천원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처음 상연된 무성 영화로 국내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통해 영화계에 뛰어든 춘사 나운규가 주연 겸 감독 겸 제작 겸 각본으로 참여하였다. 주연은 나운규, 신일선, 홍개명, 주인규, 이규설, 남궁운 등이며, 엑스트라만 800여명이 나왔다.
나운규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사상 (史上)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는 ‘아리랑’은, 한마디로 해서 일제에 억눌렸던 한국 민족의 잠재적인 민족애를 표방한 계몽 영화로 평가된다. ‘고양이와 개’로 상징되는 프롤로그부터가 속박당한 민족과 속박하는 민족의 대립을 암시하기도 했으며, 특히 주인공 영진을 광인 (狂人)으로 설정한 것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항심리의 간접적인 표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영화 ‘아리랑’은 일제 당시 억압을 받았던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민족의 비애와 항일 정신을 형상화함으로써 한민족의 저항 영화로 평가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걸쳐 물결쳐서, 다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감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나운규가 각본 · 감독 · 주연을 맡았음은 물론, 신일선 (申一仙)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안타깝게도 현재 원본 필름은 찾을 수가 없다.
상영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27년에는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여담이지만 나운규는 이후로 ‘아리랑’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후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며, 재정난 문제도 계속 따라다녔다고 한다. 1945년 8.15 해방 뒤에도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전국을 돌며 상영돼 서울에서만 9번이나 개봉됐고, 1952년 9월 ‘영남일보’ 광고에 따르면 만경관에서도 1주간 상영됐다고 한다.
○ 내용
주인공은 3.1 운동 당시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김영진이다. 친구 윤현구는 방학으로 고향에 돌아와 그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그는 여전히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현구와 영진의 동생 영희 간에 사랑이 싹트지만, 악덕지주 천가의 머슴이자 왜경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영희를 범하려 하자 현구와 기호는 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중 영진은 낫을 들어 기호를 찍어 버리고 그 순간 그는 정신을 되찾는다. 영진은 끌려 가면서도 ‘나는 이 삼천리에 태어나 미쳤다’고 외치고, 이 때 주제가인 아리랑이 흐르면서 영화가 끝나게 되어 있다.
나운규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해 수감된 경력이 있을 정도였던 만큼 일제강점기 민족주의가 곳곳에 들어간다. 첫 장면에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과 함께 두 동물이 투닥거리는 장면을 도입하여 일제강점기를 은유하였으며, 친일파이자 악덕지주의 하수인이 악역으로 등장하고 이를 살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영진을 ‘미치광이’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마지막 주인공의 절규와 함께 이 설정을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는 ‘미치광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대임을 암시한다.
○ 주제가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도 크게 인기를 끌며, 한국의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국민들 대다수가 잘 모르는 사실인데,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가사 ‘십리도 못가 발병난다’는 아리랑 노래는 전통 민요가 아니라 나운규가 창작한 노래이다.
○ 후속작
후속작으론 ‘아리랑 2’, ‘아리랑 3’가 있다. 물론 이 영화들도 필름과 관련 자료들이 모두 소실된 상태다.
여담이지만 폐병에 시달렸던 나운규는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아리랑 3’를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획하였으나 영화의 촬영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라는 타이틀도 먼저 개봉한 이명우의 ‘춘향전’에 뺏기고 영화의 흥행도 없었다. 거기다가 평단에서도 연일 ‘아리랑 3’에 대해 혹평을 하였다.
○ 필름의 행방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필름이 소실돼 현재 필름이 없으며, 남아 있는 것은 1987년에 문헌학자 김종욱이 월간 ‘로드쇼’ 지를 통해 공개한 시나리오와 스틸사진 5장, 1995년에 신나라레코드가 KBS를 통해 공개한 음반만 있을 뿐이다. 영화의 내용도 주연인 신일선의 증언 등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각종 기록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국 영화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라서 많은 영화인들이 국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자료센터까지 찾아가 필름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NHK의 한 프로듀서가 ‘아리랑 산하를 가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일본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의 산기슭 허름한 집에서 필름더미에 묻혀 부인과 함께 거주하던 영화수집가 아베 요시시게 (安部善重)가 ‘아리랑’의 필름을 가지고 있는데 공개를 안 한다고 언급하면서 아리랑 원본 필름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고, 1993년에 ‘선데이 마이니치’지에 아베가 아리랑 필름을 가진 사실을 밝힌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게 국내 언론에 일파만파 퍼지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아베의 주장에 따르면 이 영화 필름은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라 하며, 실제로 목격한 때가 1935년과 1946년이라 밝혔다. 전자는 어렸을 적 영사기를 갖고 놀며 이 영화를 보다가 부친이 ‘좌익분자들의 눈으로 본 위험한 영화’라며 보지 못하게 한 적 있었고, 후자는 필름 정리 당시 다른 일제하 조선기 영화들과 함께 우연찮게 발견했으나 이후 필름더미에 섞여 들어갔다고 한다.
아리랑 필름 찾기 시도를 먼저 한 쪽은 북한인데, 1970년대 초반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을 시켜 아베를 만나 북한 우표 세트와 개성 인삼, 시가 천만엔짜리 소니 영상 편집기 등을 들고 가 필름 반환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한국측도 1980년경 정수웅 감독이 아베를 찾아온 이래 나운규의 차남 나봉한 감독, 호현찬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 아리랑 연구회, 아리랑 되찾기 100인회, 우리 민족영화 발굴 모임 등 여러 민간단체와 언론사들이 찾아왔으나 아베는 ‘김대중 대통령이 덴노에게 반환을 요청하면 돌려줄 수도 있다’, ‘통일이 되면 주겠다’, ‘내가 죽고나서 주겠다’며 ‘아리랑’이 적힌 필름 소장 목록만 넘겨주는 등등 차일피일 시간만 끌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1992년에는 남북간 필름찾기 경쟁이 치열해지자 아베는 정수웅-여운각-신기수를 남-북-재일동포 대표로 하고 아베의 식민지 때 필름을 찾도록 협정을 맺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굴한 게 1930년대 후반 무성영화 ‘인인애’ (隣人愛) 정도였다.
그리고 아베는 1995년에 필름을 찾으러 온 아리랑 보존회장 김연갑에게 반환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은 미국에 패전했지만 적대적이지 않는데, 한국은 왜 일본에 유독 적대적이냐?” 느니, “나운규는 너희 (한국)에는 영웅이었겠지만, 우리 (일본)에게는 한 사람의 반일분자일 뿐이다.” 등 보수 우익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베의 이런 능구렁이 같은 행태에 분개한 나머지 한때 재일동포 청년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으며, 한국의 한 방송국 취재팀은 허락 없이 멋대로 필름더미를 뒤지다가 아베를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또, 1998년 시사저널 전화 인터뷰 당시 아베는 “<아리랑> 필름을 발견하더라도 ‘일제 시대에 수탈해간 전리품’이니까 돌려 달라는 한국측에는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다. <아리랑> 필름이 발견되면 즉각 불태워 버리겠다”라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렇게 양국간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흐지부지 된 채로 결국 2005년 2월 11일에 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고 나서 필름들은 일본 문화청에 귀속됐고, 일본 국립필름센터로 넘어가고 난 뒤 소장품을 조사해 봤으나 조사 결과 아베의 자택에서 필름이 발견되지 못했고, 이후 2010년에 김연갑 씨가 일본 국립필름센터를 다시 방문한 결과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김연갑은 아베가 나봉한에게 “오사카 인근 섬 3~4곳에 필름이 있을 것”이란 말과 아베와 같이 필름을 가진 사람이 고베에 있다는 주장으로 보아 제3의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게다가 북한에도 아리랑 필름이 남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었으며 2016년에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아리랑을 보았다는 미국군인 테프로의 증언이 나오면서 미군정기 미군이 아리랑 필름 복사본을 가져갔을 것이란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 감독 ‘나운규’ (羅雲奎)
나운규 (羅雲奎, 1902년 5월 4일 ~ 1937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영화인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본관은 나주 (羅州)이며 호는 춘사 (春史)이다.
– 나운규 (羅雲奎)
.출생: 1902년 5월 4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
.사망: 1937년 8월 9일 (35세), 일제 강점기 경성부
.국적: 대한제국
.다른 이름: 호 (號)는 춘사 (春史)
.직업: 영화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독립운동가, 영화 기획가, 영화연출가, 영화 각본가,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색가
.활동 기간: 1924년 ~ 1937년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학력: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룽징 명동중학교 중퇴
.부모: 부) 나형권
.형제: 누나 3명, 형 2명
.배우자: 조정옥
.자녀: 나종익 (장남), 나신자 (딸), 나봉한 (차남)
.수상: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여년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 폭파미수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에 출감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인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일본인 관리 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출연하였다. 《농중조》라는 작품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1926년에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대한민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이 있다. 1937년 8월 9일, 안타깝게도 향년 36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차남 나봉한도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한 바가 있다.
그가 고인이 된 후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