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킬링 필드 : The Killing Fields
감독) 롤랑 조페 / 주연) 샘 워터스톤, 행 S. 응고르 / 제작) 1984년
캄보디아, 많은 서구인들에겐 그것은 낙원이요, 또는 하나의 숨겨진 세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웃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 이곳으로까지 번졌고,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는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1973년, 난 이 보수적인 싸움을 취재하기 위해 뉴욕 타임즈 특파원으로 이곳 캄보디아에 왔다. 그땐 이미 정부군과 공산 크메루즈 반군간의 치열한 격전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어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난 내 인생을 바꿔놓은 한 인물, 통역관 디스 프란을 만났다. 프란 덕분에 난 사랑과 동정심을 배웠다.
1973년 8월 7일, 캄보디아 (Cambodia). 캄보디아 주재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 쉔버그 (Sydney Schanberg: 샘 워터스톤)는 1972년 캄보디아 사태에서 크메르군을 섬멸하기 위해 미국 공군이 니크루움에 잘못 폭격하여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인 1973년 8월 현지 취재차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알려질까 봐 보도진을 따돌리려 하고 시드니는 뉴욕 타임스지 현지 채용 기자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 (Dith Pran: 행 S. 노어)과 함께 어렵게 현지에 가서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상황은 시시각각 캄보디아 정부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시드니와 프란 일행은 미국 대사관의 도움을 얻어 가족을 탈출시키고 자신들은 남아서 마지막까지 취재를 하는데..
킬링필드는 1984년 개봉한 영국 영화로써 1980년 플리처상을 수상한 뉴욕 타임스 기자 Sydeny Shanberg (시드니 쉔버그)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 :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와 현지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 놓았다.

○ 출연/스탭
롤랑 조페 (Roland Joffe) 감독
샘 워터스톤 (Sam Waterston) 시드니 샌버그 역
행 S. 응고르 (Haing S. Ngor) 디스 프랜 역
존 말코비치 (John Malkovich) 알 락코프 역
줄리안 샌즈 (Julian Sands) 존 스웨인 역
.제작: 데이비드 퍼트냄 (David Puttnam), 이아인 스미스 (Iain Smith)
.각본: 브루스 로빈슨 (Bruce Robins)
.촬영: 크리스 멘지스 (Chris Menges)
.음악: 마이크 올드필드 (Mike Oldfield)
.편집: 짐 클락 (Jim Clark)
.미술: 로이 워커 (Roy Walker), 스티브 스펜스 (Steve Spence)
.의상/분장: 주디 무어크로프트 (Judy Moorcroft)
.수상: 제5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수상작 /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후보작
1984년 영국에서 만든 영화인데 오랫동안 미국영화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감독은 프랑스계 영국 감독인 롤랑 조페 (Roland Joffé)인데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프랑스계 유태인이다. 1,440만 달러로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3,760만 달러를 벌어들였는데 한국에선 1985년 6월 1일에 개봉. 반공 영화로 간주하여 학교 단체관람을 주도하면서 서울관객 92만 5천명을 기록했다.
영화의 주연배우였던 ‘행 솜낭 응오’ (Haing S. Ngor)는 실제로 가족과 약혼자를 캄보디아에 남긴 채 탈출한 인물이며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살아생전 캄보디아 난민들을 위해 기부를 많이 했고 이 작품 이후 간간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인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출연료를 기부하기도 했다.
사실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는 킬링필드 실상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당장 크메르 루주는 외국인 기자들을 다 쫓아내고 학살을 은폐하는 정책을 폈고, 미국은 크메르 루주 정권 수립 직후에 크메르 루주 정권의 대규모 학살을 주장했지만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의 신뢰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친미 국가의 정부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당시 대규모의 캄보디아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태국이 그나마 주장하긴 했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거기에 80년대 초에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게 엿먹이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학살 주장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본격적으로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면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물론 베트남이 순수한 의도로 이런 악행을 알린 건 아니였고,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를 침공했다는 반대여론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자 국제 여론을 달래기 위해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베트남은 S-21수용소 뚜올 슬랭에 박물관을 만들고 이것을 소련과 동유럽은 물론 서방에도 공개했고, 프놈펜 외곽의 다른 킬링필드도 찾아내서 공개했다. 서방기자들은 원하면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필드를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었고, 이 취재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들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 줄거리
1972년 캄보디아 사태에서 크메르군을 섬멸하기 위해 가한 미국의 폭격이 잘못 폭격되어 수많은 민간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캄보디아가 크메르루즈 정권에 함락되기 직전인 1973년 8월 7일.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 쉔버그 (이하 시드니)가 프놈펜에 도착한다.
미국은 이 사건이 알려질까 봐 시드니를 따돌리려 하지만 현지 통역가 겸 기자인 디스 프란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사건 현장에 가는데 성공하게 되고,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로 담는다.
당시 캄보디아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론놀 괴뢰정부였는데, 미군의 잘못된 폭격으로 인해 캄보디아 국민들의 증오심이 매우 증가하게 되고 이는 곧 크메르루즈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1975년 4월 17일. 결국 크메르루즈가 론놀 정권을 함락하는데 성공을하고 프놈펜을 점령하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시드니와 프란은 미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가족을 피신 시키지만 본인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취재를 강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다가 결국 크메르루즈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기 직전, 프란의 설득 덕분에 시드니와 프란은 무사히 풀려나게 된다.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궁지에 몰린 시드니와 프란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캄보디아인 전원을 대사관에서 내보내라는 크메르루즈의 강압에 프랑스 대사관은 결국 굴복한다. 대사관 밖으로 쫒겨난 프란은 크메르루즈군에게 붙잡히게 되고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다.
뉴욕으로 무사히 돌아간 시드니는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전쟁을 보도하여 엄청난 주목을 받는 한편, 프란의 소재를 파악하고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소용 없었다.
프란은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혁명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들이 짓밟히고 집단 학살을 당하는 걸 목격한다. 그는 기자 신분을 숨긴채 기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크메르루즈 일원의 도움을 받아 태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1979년 10월 9일 시드니와 재회를 하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재회를 할 때 존 레논의 “Imagine”이 은은하게 흐르고 시드니가 용서해달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이때 프란의 대사가 담백하고 참 좋았다.
용서할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Nothing to forgive. Nothing “

○ 배경
1969년~1979년 동안 캄보디아에서 ‘농경 유토피아 건설’을 내세운 크메르루주의 학살과 기아, 미군의 폭격으로 최대 170만 명이 사망한 사건. 킬링 필드는 ‘죽음의 들판’을 뜻한다. 당시 캄보디아는 초대 수상인 노로돔 시아누크의 철권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미국이 폴 포트를 필두로 시아누크를 쫓아내고 정권을 잡게 했다. 폴 포트는 집권 후 바로 나라를 ‘개조’하는 데에 몰두했고, 권력을 가진 크메르루주는 지식인과 성직자를 포함한 대규모 숙청을 시행했다. 이로 인한 희생자는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최소 15만 명에서 최대 170만 명까지 수치가 다양하며 170만 명의 경우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킬링필드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좁은 의미의 ‘킬링필드’는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더해 1969~1973년 미군이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는다며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60~8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1차 킬링필드’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약 1만 7,000명의 시신을 매장한 수도 프놈펜 인근의 쯔응아익 (Cheung Ek)을 비롯해 캄보디아 전국에서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 캄보디아 내전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캄보디아 초대 수상이 된 옛 왕가의 후손 노로돔 시아누크는 비밀 경찰을 앞세운 철권통치를 해왔다. 1963년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제공하는 미국에 대해 비동맹노선을 내세워 거부하고,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군수물자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론 놀 장군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냈다. 론 놀 정권 (크메르공화국)은 극심한 좌익탄압을 벌였다.
폴 포트는 1968년 1월 바탐방 부대 습격을 시작으로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크메르루주 세력은 점점 커져 1973년 크메르루주가 국토의 3분의 2를 점령한다. 이 내전 동안 론 놀 군대와 크메르루주 군 양측 모두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른 탓에 사망자수가 엄청났다.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병력을 철수하자 론놀 정권도 무너졌다. 4월 17일 크메르루주군이 수도인 프놈펜으로 입성했다.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 난민 신세가 된 사람들은 향후 벌어질 학살은 예상하지 못한 채 폴 포트가 이끄는 군대를 해방군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 크메르루주 도시 소개
폴 포트는 집권하자마자 ‘개조’에 착수했다. 그는 도시를 자본주의와 친미 권력의 온상으로, 농촌은 순수한 사회주의 평등사회로 간주하고 200만 명에 달하던 프놈펜 시민을 단 사흘 만에 모두 도시 밖으로 내몰았다. 프놈펜에서 밀려난 이들은 걷거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길게는 한 달까지 걸려 크메르루즈가 정해주는 농촌 지역으로 이동했다.
크메르루즈 집권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망자가 도시 소개 정책에서 생겨났다. 수많은 이들이 이주 도중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고 크메르루즈는 노약자들을 방기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적’을 색출하여 즉결 처분하기도 했다.
농촌으로 옮겨진 이들은 집단 농장에서 하루 두 끼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농사일은 물론, 둑을 쌓고 논과 길을 만드는 강제노역을 수행했다. 공동취사를 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서로 분리되어 다른 지역이나 작업장에 배치됐다.
이들은 점령 한 달 후인 5월 20일 ‘긴급 현안 8개항’을 발표했다. △도시 인구 소개 △시장 폐지 △통화 철폐 △승려직 폐지 △론 놀 정부 고위관료 처형 △공동취사 및 협동농장 설치 △베트남인 추방 △모든 병력 국경 배치 등이었다. 크메르루주는 1975년 5월 ‘민주캄푸치아’ 수립을 선언하고 폴 포트를 총리로한 15인 내각을 결성한다.
– 지식인·성직자·소수민족 학살
크메르루주는 집권 기간 대규모 숙청을 쉴새 없이 진행했다. 론 놀 정권과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는 물론 전문가, 지식인도 압살 대상으로 간주했고, 교수 의사 등은 투옥되거나 처형됐다.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다는 이유로도 처형당했다. 성직자도 처형 대상에 올랐고 불교사찰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창고로 쓰였다.
특히 이들은 국내에 오랫동안 살아온 소수민족들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2만 명 정도로 추산되던 베트남인들이 몰살됐고, 25만 명의 참족 중 9만 명이 살해당했고, 상업에 주로 종사하던 43만 명의 화인들은 그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소수에 지나지 않던 타이인, 라오인, 고산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됐다.
크메르루주는 학교 건물을 감옥으로 개조해 숙청에 이용했다. 뚜옹 슬렝 감옥에는 크메르루주 조직원이었으나 내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거나 스파이로 몰려 끌려온 이들이 많았다. 이 감옥에 끌려운 1만 6000여 명 중 단 10여명 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잔인한 고문, 구타, 학대 끝에 자백한 이들은 쯔응아익으로 끌려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은 총알을 아낀다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얼굴을 비닐백으로 덮어 질식시켰다. 심지어 엄마를 따라온 갓난아이들도 죽였다. 특히 크메르루주 정권은 이러한 학살범죄에 10대 중반의 소년소녀들을 앞세웠는데 뚜올슬렝 감옥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던 자들의 80%가 21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 사망자 수 논란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기간 동안 숨진 이들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연구에 따라 최소 15만명에서 120만 명, 200만 명 등이 수치가 엇갈린다. 200만 명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자 벤 키어넌은 크메르루주 집권 기간에 기아, 질병, 과로, 고문, 처형 등으로 목숨을 잃은 캄보디아인은 약 176만 1,000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핀란드 정부의 공식 조사보고서는 크메르루주의 집권 기간 처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핀란드의 보고서는 크메르루즈 집권 전인 1969~1973년 사이 미군의 폭격으로 약 60여 만명이 학살됐다며 이 시기를 ‘1차 킬링필드’로 부르고 있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이던 당시 미군은 베트남 군의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끊는다며 선전포고 없이 캄보디아 북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1999년 공개된 미 공군의 폭격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23만 여회 출격해 네이팜탄, 고엽체, 집속탄 등 각종 폭탄 약 275만 톤을 쏟아부었다.
이 폭격은 60만 여명의 사망자와 20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곡물수출국이던 캄보디아의 농업 기반을 무너뜨렸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집권할 당시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20%를 밑돌았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총 40만톤의 쌀이 부족했음에도 국제 원조는 중국의 1만 6000톤이 고작이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 ‘붉은 크메르’, 크메르루주
크메르루주라는 이름은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공산당 (CPK)을 ‘붉은 크메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됐다고 알려진다. 크메르는 캄보디아인의 90%를 차지하는 민족의 이름이자, 앙코르왕조를 포함해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제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캄보디아어로 상부조직을 뜻하는 ‘앙카’라고만 불렸다.
크메르루즈의 지도부는 비밀 코드명으로 형제 제1호 (Brother Number 1)으로 불리던 폴 포트와 당 상임위 위원장이던 누온 치아, 이엥 사리 부수상 겸 외무부 장관, 따 목 서남지구 당비서, 키우 삼판 국가 수반, 이엥 사리의 아내로 사회부장관이었던 키우 티릿, 국방부 장관이었던 손 센, 문화교육부 장관이었던 윤 얏 등이 핵심 인물이었다. 폴 포트와 이엥 사리는 동서지간이었고 카우 삼판도 먼 친척관계에 있다.
폴 포트와 이엥 사리, 키우 삼판, 키우 티릿, 손 센은 모두 프랑스 유학 중에 만났고, 키우 삼판은 파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땄다. 국내파인 누온 치아와 윤 얏 역시 학교 선생으로,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최고의 엘리트와 지식인으로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속했다.
– 크메르루즈의 몰락
1976년 12월 폴 포트가 베트남을 주적으로 지적하고, 포병 지원 속에 캄보디아 군대가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자 1977년 베트남은 캄보디아 공습을 시작한다.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군의 힘을 빌려 헹 삼린과 훈 센이 이끄는 세력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운다.
크메르루주는 태국 접경 밀림 지대로 퇴각했다. 크메르루주는 폴 포트, 시아누크, 손산 등 3개의 반군파로 이루어진 게릴라 조직이 되어 중국의 지원 하에 내전을 벌였다. 폴 포트는 1985년 크메르루주 지도자를 공식 사임하나 여전히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한다. 1988년 베트남군이 전면 철수 한후 유엔의 중재로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고 휴전과 총선 실시에 합의해 캄보디아 내전이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협정을 파기한 뒤 훈 센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재개했다. 이들은 1994년 7월 키우삼판을 총리로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오랜 게릴라 전에 지친 병사들이 투항하기 시작했고, 조직내 변절과 내분이 표면화됐다. 폴 포트가 사망한 1998년 4월부터는 하급 지휘관들이 반기를 들어 타 목 군 사령관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제2인자였던 누온 체아의 투항으로 크메르루주는 완전히 해산됐다.
– 폴 포트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끌었던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스 사 (Saloth Sar)이다. 1925년 5월 19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포디아 북부 캄퐁 통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불교사원에서 6년 간 교육을 받았고, 1940년대 초 프놈펜의 기술학교에 진학해 목공을 배웠다. 이때 그는 호치민 휘하에서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가하고 1946년 캄보디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9년 무선전자공학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1951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숙청’을 강조한 스탈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다.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는 1963년까지 10년간 프놈펜의 사립학교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며 동시에 지하조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했고, 1963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했다.
시아누크 정권의 비밀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크메르족이 거주하는 북동부 산악지대로 피해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폴 포트는 이 때 크메르족의 자급자족 생활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4월 17일부터 3년 8개월 10일 동안 캄보디아를 자신이 생각하는 농경 유토피아로 개조하며 ‘킬링필드’를 일으켰다.
폴 포트는 1997년 11월 타 목 군사령관 등 반대파에 의해 종신 자택감금형을 선고받았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북부 안롱 벵 인근에서 가택 연금 중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크메르루주는 다음날 그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했으나, 자살이나 타살 가능성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 킬링필드가 캄보디아에 남긴 것
크메르루즈 이후 캄보디아는 30년간 훈 센 총리의 독재 하에 있다. 1993년 9월 총선 당시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제 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 (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훈 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했다. 1997년 훈 센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왕자를 축출하고 1998년 선거를 통해 단독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훈 센은 30년 간 킬링필드의 공포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며 독재를 해왔다.
캄보디아 곳곳에서는 킬링필드의 현장이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집단 매장지 중 하나인 쯔응아익 (청아익) 대량 학살센터에는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이 있다. 뚜올 슬랭 감옥은 고문박물관으로 전시 중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또 오랜 내전은 캄보디아 전역에 지뢰를 남겼다. 특히 1970년 내전 당시 전국에 1000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2011년 기준 약 400~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지뢰와 불발탄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 명에 가깝고, 3만 여명이 목숨을 건졌으나 9,000명 가량은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 킬링필드 주역 재판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를 자행한 이들의 처벌을 위해 유엔과 공동으로 ‘캄보디아 법원 내의 특별 재판부’ (ECCC)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과 훈 센 정권 사이에 협상 끝에 설치된 이 법정은 ‘국제전범재판소’가 아니라 캄보디아 국내법에 따른 특별 재판소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2003년 설립을 합의한 후 2006년에야 구성을 완료했고 2007년 심문을 시작해 2009년 첫 재판이 열렸다.
법정 설치에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기소 내용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다. 기소 대상을 크메르루즈 지도자로 한정해서 단죄 대상도 좁고, 그마저도 이미 고령이 되어 핵심인물이 다수 사망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폴 포트는 1998년 숨졌고, 군 사령관 타 목은 재판이 열리기 전인 2006년 사망했다.
가장 먼저 재판을 받은 것은 투올 슬렝 형무소장 카잉 구엑 이우로 2010년 말 종신형이 선고됐다. 두 번째 재판은 이엥 사리-티릿 부부와 누온 체아, 키우 삼판 등 4명을 대상으로 2011년 11월 시작됐으나 이엥 사리-티릿 부부는 각각 2013년과 2015년 사망했다.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2014년 8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항소했다.
훈 센 정권이 재판부 구성에서부터 재판 절차 내내 ECCC 활동에 비협조적인 것은 훈 센 총리 자신도 크메르루즈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소 대상이 확대되면 자신이 이끄는 집권 캄보디아인민당 간부들마저 법정에 서는 상황을 우려해 이미 기소된 6명 외에 추가 기소를 반대했다. 이에 2011년 기소를 전담하는 독일 출신의 지크프리트 블룬크 판사가 “캄보디아 정부의 압력으로 새 범죄사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사임하기도 했다.
○ 존 레논 (John Lennon)의 “Imagine” 가사
천국도 없고,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우리 위에 오직 하늘만 있다고 생각해봐요.
노력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봐요. 국가라는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렵지 않아요. 죽이지도 않고, 죽을 일도 없고, 종교도 없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보세요.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