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 (5)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창세기 32장 22-32절
오늘의 제목 : (5)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 32장 22~32절)
오늘은 기록된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던지신 4번째 질문을 묵상해 보고져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던지셨던 질문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민목회 초창기에 있었던 경험담입니다. 지금의 제 나이 반도 않되던 30대 후반, 하루는 교우 중 한 여자 신도가 병원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직 산달이 채 않되었는데 그만 아이를 사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RNS 병원을 찿아가 위로의 성경말씀을 읽어드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회복지사가 잠간 이야기를 하자고 하여 그분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는 제에게 말했습니다. <애기는 유산이 아니라 7개월 만에 사산을 한 것입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규정에 따라 출생증명서, Birth Certificate 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는 애기 엄마와 상의하여 먼저 애기 이름 부터 지어서 저에게 알려 주시고 장례절차를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곧 애기 엄마와 상의하여 애기 이름을 Carol이라고 짖고 그 Carol이란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망 신고도 한 다음 Macquarie Park 영아 묘역에 가서 안장예배를 드렸습니다. 알고보니 Macquarie Park에는 사산한 애기들이나 영아들이 묻혀 있는 묘역이 따로 있어서 퍽 많은 어린 생명들이 그곳에 묻혀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옆을 지날 때는 옛날 그 생각이 나곤합니다. <그래, 아무리 어린 애기요, 사산한 애기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해! 무릇 인간이란 어떤 형태로 태어나던 이 세상에 오면 반드시 이름이 붙여지고 또한 죽을 때도 반드시 그 이름으로 묻혀 묘비를 세우고 천국으로 가는 거야! 맞아! 이름 – 참 중요한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김현경교수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는 아주 옛날부터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름을 붙여주지 않거나 그냥 적당한 별명이나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첫째는 애기들입니다. 예전에는 태중에 있는 애기들은 물론이고 갖 태어난 애기라 하더라도 얼마동안은 죽지않고 살아있나 하는 것을 본 후에야 이름을 지어주곤 했습니다. 애기들에게는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여자들에게도 정식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안산댁, 춘천댁, 예천댁>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안사람>이라는 식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그외에 군인들이나 죄수들에게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보통 군번이나 수인번호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일종의 규정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전에는 애기들, 여자들, 군인들 그리고 죄수들은 사람으로 취급을 않해 주었고 따라서 그 어떤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 이쯤해 두고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익히 아시다싶이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이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중 둘째였습니다. 야곱은 태어 나기 전 엄마 태중에서 부터 형 에서와 더불어 먼저 나오겠다고 싸웠던 아이였습니다. 먼저 태어난 에서라는 이름은 그 몸의 생김새가 붉고 털이 많아서 붙인 이름이고 늦게 나온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성장한 후,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지만 야곱은 별로 특별한 재능이나 일거리도 없이 마마보이로 자랐습니다. 그후 야곱은 사냥길에서 지쳐서 돌아온 형 에서에게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고 어머니 리브가와 작당을 하여 늙고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게 돌아가는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에서에게서 미움을 받고 위기의식을 느낀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사는 메소포타미아로 도망하였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20년이 넘게 살면서 외사촌들인 레아와 라헬을 비롯하여 그들의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까지 4명의 처첩을 두고 11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야곱은 20여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 얹혀 살면서 수도 없이 라반을 속여 가면서 재산을 불여나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은 창세기 29장 부터 31장 까지 길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조카 야곱이나 그의 외삼촌 라반은 둘다 비슷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탐욕과 욕심과 야망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속여먹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어떻게든지 이길려는 승부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후 결국 그 두 사람은 서로 나쁜 관계로 헤어지게 되어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형 에서를 어떻게 만날수 있을지 무서웠습니다.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속임수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특유의 방식으로 이것 저것 잔꾀를 부려가며 선물을 보내는 등 화해의 제스쳐를 써 보았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얍복 나루터에 도착했습니다. 얍복강이라고 하지만 제가 한 30년전 가 보았던 얍복강은 강이랄 것도 없는 아주 작은 개울이었습니다. 하여튼 여기, 얍복강을 건너면 형을 만나게 되는 깊은 밤,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낸 일수 없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허벅지의 관절이 위골되면서도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만 하자. 나를 놓아라> 야곱이 말했습니다. <않됩니다.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그냥 보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다시 말합니다. <그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거라. 오늘 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다음 형 에서를 만나 서로 얼싸안고 화해하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오늘 우리의 주제인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집중해 보십시다.
히브리어에서 야곱이란 <아카브>라는 단어의 원형에서 <야코브>를 거쳐 <야곱>으로 변형된 단어입니다. <아카브>란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대부분의 이름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는 모습을 따라 <울보>라고 짓기도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예쁜이>라고 짓기도하고 똑똑하게 보인다고 해서 <똘똘이>라고 짓기도했습니다. 야곱이란 이름도 아마 아이가 태어날 때, 형의 발뒷꿈치를 잡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붙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이름에다가 어떤 문자적 의미를 새기거나 소망 같은 것을 담아서 작명을 하는 것으로 발전이 되었고 오늘날은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의 정체성, 그의 ID, 그의 Identification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천보영, 최정복, 김석호, 손종란, 김기완, 전승호란 이름에는 제각각 깊은 뜻도 있고, 이름을 지어주신 조상들의 소원도 담겨있고, 더 나아가 그의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신부증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 그를 천사라고 하던, 하나님의 사자라고 칭하던, 어쨋던 그날 밤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만났던 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질문은 하나님이 직접 야곱에게 물으신 것이라 할수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 그의 이름을 물으신 것은 아니지요. 이 질문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이며 존재론적인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아, 너 라고 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냐?> <야곱아, 너라고 하는 인간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온 인간이냐?> 지금까지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하여 지낸 지난 20여년의 세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수도 없이 속고 속이며, 사기와 거짓과 위선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인생살이를 반성하고 깨우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만약 제가 뻔히 잘 알고 있는 전승호목사님에게 어느날 갑자기 <목사님, 이름이 무엇이지요?>하고 묻는다면 여기에는 <승>자 <호>자에 대해 케묻는 굉장히 깊고 도전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아는 사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감히 이름이 무엇이냐고 잘 묻지를 않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만 던질수 있는> 굉장히 특수하고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난 40여년이 될지, 아니면 60년, 80년이 될지 알수 없는 인생길에서 끊임없이 다투고, 싸우고, 이기려고 몸부림 치며, 거짓말하며, 속이고 살아온 야곱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도전적 질문입니다. 이렇듯 오직 탐욕의 종이 되어 그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악하고 불의하게만 살아온 야곱을 가르쳐서 이사야는 41장 14절에서 이렇게 부릅니다. <너 버러지 같은 야곱아!> 예전 구역성경에서는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고 불렀습니다. 맞습니다. 진짜로 야곱은 버러지 같은 인간이었고 지렁이 같은 존재였습니다. 참 슬프고 안된 이름이라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자기 이름을 물어보시는 하나님의 이 아프고 쓰라린 질문에 대해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예, 제 이름은 찐짜 야곱이 맞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저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인간입니다. 형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고 꼭 이기고 싶어한 사람입니다. 저는 복받고 잘먹고 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이제까지 살아온 사람입니다. 늙고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여 먹은 사람입니다. 외삼촌에게도 수십 가지도 더 되는 사기를 쳤습니다. 장가가고 재산을 늘리고 처자식들 거느리는데만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저 야곱이란 인간은 글자 그대로, 문자 그대로, 정말 남의 발뒷꿈치를 잡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거짓말쟁이요, 사깃꾼이요, 이기주의자요, 탐욕의 노예입니다. 저는 지렁이 같은 인간입니다> 이는 야곱이 자신의 정체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한 대답입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이름 중 야곱이라는 이름처럼 부끄러운 이름은 별로 없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야곱> –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거짓말을 일삼으며 남들을 속이고 오직 탐욕에만 찌들어 살아온 자신의 인생, 자신의 정체성, 자기가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야곱에게 일생 일대의 반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지가 말했습니다. <야곱아!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이라고 하여라. 왜냐하면 오늘 밤 너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야곱아, 너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마! 너는 이제 이후로 이스라엘이라고 하거라!>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이름을 고쳐주신 케이스가 여러번 나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하시고 사래를 사라라 하시고 사울을 바울이라고 개명해 주셨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명들은 모두 다 본래부터 좋은 뜻의 이름들이었으나 좀 더 의미 있는 이름으로 고쳐주신 것인데 반하여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신 것은 아주 나쁜 이름, 몹쓸 이름, 천한 이름에서 좋은 이름, 아름다운 이름, 고귀한 이름으로 개명해 주신 케이스에 속합니다. <너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거짓말쟁이, 속이는 인간, 사깃꾼이 아니다. 너는 이제 이 순간 부터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요,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요, 따라서 이제 이후 부터 네가 진정으로 겨루고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안 사람이 되었다>는 확인이었습니다. 이렇듯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주 분명합니다. <이제 이후 너는 너의 인생관을 바꾸어라. 육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거듭나라. 사람들과 경쟁하고,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않된다. 너는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살지 말아라. 이제 부터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인생을 살아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삿밭을 잡고 늘어지면서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이 되어라. 너의 인생의 목표, 인생관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성경과 서구 기독교 역사에는 <이스라엘>이라 할 때의 그 <엘>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이름들이 아주 많습니다. <엘리야-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엘리사-하나님은 나의 구원자>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사무엘-하나님께 들었다> <라파엘-하나님이 고치신다> <미카엘-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인가> <가브리엘-하나님은 나의 힘> <브니엘-하나님은 나의 얼굴> <라엘-하나님은 나의 기쁨> <이스마엘-하나님이 응답하신다>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 <노엘-하나님은 나의 기쁨, 성탄절> <구리엘-하나님의 사자>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세례명들에는 <엘>자가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는 대단히 깊은 신앙적,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리 마다 국호, 즉 나라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름 깊은 뜻이 있습니다. 몇 나라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큰 大, 넓은 韓, 백성 民, 나라 國을 씁니다. <크고 넓은 백성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中國>은 자신의 나라가 세계의 가운데 있는 중심국이요 centre라는 뜻에서 중국이라고 합니다. <日本>은 태양, 즉 해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America>는 이탈리아 탐험가 Amerigo Vespucci가 처음으로 미대륙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美國> 즉 아름다운 나라라는 중국식 표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영국>이란 이름은 England의 “잉”을 “잉 Ying”이 아닌 “영글랜드”로 듣고, 그 첫자가”영”이라고 생각해서 <영국>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호주, 濠洲>의 원래 영어 Australia는 라틴어 Australis, 즉 남쪽이란 뜻을 지닌 국명입니다. <지구의 남쪽에 있는 나라>가 Australia입니다. 그러네 이 이름을 중국말로는 <오다리아>로 발음합니다. 한자로 <호, 濠>는 <크고 넓다>는 뜻입니다. <남쪽에 있는 크고 넓은 땅>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한 개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해 주신 것도 참 의미 있고 부럽고 탐나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후 <이스라엘 나라>가 그들의 국호, 그들의 나라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짓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시기가 나고 샘이 날 정도로 부럽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나라>라니! 아마도 이 세상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하고 빛나고 영광스런 국호를 지닌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탑게도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한번 들여다 보십시다. 정말 너무 많은 아픔와 갈등과 숙제들을 지니고 있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다윗이 세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나 1948년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국가의 의미를 넘어서야 합니다. 면적 2만 평방 킬로미터에 인구 8백만 정도라는 외적 형태를 넘어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질 못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만 두고 보자면 참 아름답고 거룩한 이름인데 그들은 아직도 야곱이라는 옛날 이름의 떼를 벗어버리지 못한 나라 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던지 이웃 나라는 섬멸시키고 자기들만 살려고 하는 나라처럼 보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생공존의 법칙을 상실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죽고 죽이고 탐내는 그 옛날 야곱의 때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이름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아픔니다.
그날 밤, 야곱은 개인적으로 속세의 이름을 떨쳐버리고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이름을 얻음으로 그의 인생관, 인생의 목표,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에 있어서 결정적 변화를 요구 받았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이제 부터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은 버려라. 이제 이후로는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아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름 문제가 아닙니다. 이름만 이스라엘이라고 고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 진짜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령님을 만나 새로운 인간이 되고 새로운 나라가 되는 것이 본질입니다. 인간이란 단순히 세례받고 세례명 하나 받는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과 국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을 만날 때 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싸워보고 다투어 보고 그분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는 거룩한 영적 투쟁의 과정을 거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나라에 참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국가와 민족의 진정한 주인으로 믿고 받아드릴 때 야곱은 마침내 이스라엘로 변화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야곱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우리는 아직도 타인의 발뒤꿈치를 잡고 살아가는 야곱의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정말 하나님과 겨루는 이스라엘이 될려면 멀고 먼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를 포함하여 우리들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생관, 인생의 목표,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어 본적이 있습니까? 겉으로만 예수 믿는 척하는 형식적 종교인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나요? 주님은 그 옛날 야곱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도 다시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냐? 이스라엘이냐?>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