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 _ 5월 13일
“생채기 없는 자작나무는 없다”

“생채기 없는 자작나무는 없다”
십수년전 모스크바 장신대에 방문교수로 간 적이 있습니다. 주말에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마침 하늘에서는 솜사탕 같은 함박눈이 내려 온 땅을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차를 세우고 가까이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처음 장면 같은 환상적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보니, 그렇게 키가 크고, 하얗고, 아름답게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그 모든 자작나무에는 모두 무수한 흠집들이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엔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scratch, scar) 파여 있었습니다.
‘아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만 보이더니 가까이서 보니 모두들 상처투성이가 가득하구나’
세상에 상처 없는 아름다움, 아픔없는 감동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두 번째로 잡기장을 편집하신 분이 제호를 ‘생채기 없는 자작나무는 없다’라고 붙였던가 봅니다.
말을 다 않하고, 못해서 그렇지 우리네 일생에 생채기없는 때가 언제 있었으며, 흠집없이 매끈게 지낸 날이 몇일이나 되던가요?
몇 주전 우리 인문학교실의 귀한 서예가이신 최진 선생님께서 제 잡기장의 제호를 한자로 아름답게 다듬어서 보내주셨습니다.
“박고통금” “아불견 무백 무상흔”
– 옛것을 넓혀보니 오늘이 보이는구나! –
– 난 이제껏 보지 못했노라 상처없는 자작나무는 없으니! –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불리우는 이 생채기 역시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 가운데 아름다운 생채기로, 소중한 상흔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Carpe die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