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논단(22)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G2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연구
세계 지도자 역할에 관하여
| 목 차 I. 서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 연구 III. G2국가로서 중국 IV. G2국가 중국민족의 세계관 V. 100년간 G1 국가의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청교도 정신 VI. 중국의 G2 역할과 수행 능력 VII. G2국가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1. 중국의 기독교 전래와 그 역사 2. 중국의 선교정책과 하나님의 섭리 3.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 기독교의 역할 IX. 결론 |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1. 중국의 기독교 선교 전래 역사
중국은 일찍부터 서방 기독교의 관심을 받고 선교사들은 중국에 찾아왔다. 중국의 역사를 볼 때 기독교 선교는 모두 네 번에 걸쳐 찾아왔다. 첫 번째는 당나라 시대의 경교(景敎), 두 번째는 원나라의 야리가온(也里可溫), 세 번째는 명말 청초의 천주교 (天主敎), 그리고 네 번째는 청나라말기 아편전쟁 이후 개신교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래되어 한 때는 부흥하기도 하였지만, 연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되풀이 하여야만 했다.
첫 번째 시대에 기독교가 중국에 처음 전파된 것은 AD 635년 당 태종(唐 太宗, 李世民 626-649년 통치) 왕조 때 페르시아의 시리아 교회(Syriac Church)의 알로펜(Alopenzz) 선교사가 무역 루트인 실크로드의 교류를 통하여 수도인 장안에 선교를 했기에 기독교를 실크로드 기독교(Silk-Road Christianity)로 통칭하게 되었다. 428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교부직을 임명되어 수행하던 안디옥학파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였다.
AD 612년경 새롭게 성장하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피해 동방으로 건너왔으며, 당시 당나라는 문호개방 정책으로 인해 이들이 선교활동에 쉽게 정착하여 정관 12년에는 장안에 대진사(大秦寺)라는 교회들을 건축하도록 윤허하였다.
경교(景敎)는 고종(650-683년)의 재위 시에는, 전국 각처에 경교 교회당을 짓도록 허락하였다. 그 결과 중국에서 기독교는 부흥할 수 있었다. 덕종(德宗) 2년 781년 이사(伊斯)는 덕종에게 윤허를 받아서 경교 기념비를 장안 대진사 안에 세웠다. ‘대진경교 유행중국비’(大秦景敎 流行中國碑)는 높이 3m, 너비 1m, 두께 30cm 거대한 비석에 한자 1,870자 시리아어 40단어 60명 이상의 경교사 이름들이 비석 좌우와 전·후면에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을 박해 당시 경교 신자들이 땅에 묻고 도망갔기에 오늘까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1625년 우연히 출토되었고 지금은 섬서성 서안 시 비림에 보관중이다.
그 후 열렬한 도교신자로서 외래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당 무종(唐武宗 841-846년 통치)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그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중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중국에서 경교는 12대 황제와 210여년 동안 13도 358주마다 경교사원인 대진사 사원을 하나씩 건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교사업에 있어서는 번역사업, 문화사업, 구제사업 등 성공리에 진행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 무종은 경교 신도들을 한 명도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탄압하라는 명으로 인하여 많은 신도들이 이웃나라로 피신해야 했다. 경교는 황실의 특권을 누리며 정치적 영향력에 치중하여 민중속의 종교로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신학적으로 바른 신학을 번역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현지 지도자 들을 세워서 현지 언어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많은 선교사들을 페르시아에서 들어와 예배를 외래어로만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써 중국에서 외래 종교로 남게 된 것도 원인중에 하나이다.
당나라 무종 (武宗)은 왕위에 오른 후 회창(會昌) 5년 4월 칙사부(勅祠部)에 명령하여 외래종교의 사원과 거기에 종사하는 승(僧)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사 결과 당시 당나라 내에 있는 사원이 경교 사원이 4만 여개이며, 불교가 6천 여개, 4만 6천개의 외래 사원이 있었으며, 성직자는 26만 5백여 명으로 보고되었다. 무종은 그 해 7월에 명을 내렸다. “오늘날 천하에 일하지 않는 승(僧)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지만 양식이 필요하고 누에를 치지 않지만 의복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들의 사원과 회당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구름같이 높으며 그 구조와 장식은 궁전 건축만큼이나 호화롭다. 사회와 인심이 전부 외래 종교가 조성하고 있다. 선조들이 그들을 대우하던 그 조치는 이제부터 없을 것이다.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쫓아내고 소용없는 제도는 철폐한다.”
그러나 이렇게 극심한 박해를 받은 후에도 경교 신자가 남아 있었을까? 200여년 동안에 20만여명의 경교 신자가 한 명도 없이 경교를 포기하지 않고 모두 순교를 했을까? 아니면 이웃 나라로 피신을 했을까? 아니면 당 나라가 섬기는 도교로 개종했을까? 그러나 중국의 변방의 지역과 벽촌 지방에 흩어져 있던 경교 신도와 지하 회당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경교 신앙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흔적들은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경교 신도들은 이웃주변 나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경교를 박해하고 40년 후 멸망했다.
두 번째 시대의 기독교인 야리가온(也里可溫)은 경교에서 개칭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원 왕조 수립 후 16년 1240년에 경교 신자인 고관 안마길사(安馬吉思)가 단양관(丹陽館)의 남방에 경교사인 대광명사(大光明寺) 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세리길사(笹里吉思) 7개의 경교사를 건립하였다. 서독안사(西瀆安寺), 자리파사(慈利派寺), 십자사(十字寺), 고안사(高安寺), 대흥사(大興寺), 감천사(甘泉寺), 대보흥사(大寶興寺), 일곱 경교교회는 중국 중원의 서북쪽 십여 만리 밖에 야리가온 교회가 펴져 있는 곳이다. 이 사료에서 경교가 야리가온으로 개칭되었음을 볼 수 있다. AD 845년 당 무종 탄압 때 장안과 10도로부터 아주 변방으로 추방하였기에 중국 변방에서 기독교 명맥을 원나라 초기까지 유지하였으나 점점 쇠퇴하여 야리가온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소멸하여 갔다.
원나라는 초기부터 종교정책이 비교적 관대하여 경교와 천주교가 함께 야리가온 이라 불렸다. 그리고 원나라와 로마 교황청 천주교간에 왕래가 빈번하였고 1245년에는 교황이 중국에 천주교 대사를 파견하여 원나라의 정종(定宗) 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1269년에는 원나라의 세조는 이탈리아에서 원나라에 상업차 방문한 2명의 상인들을 통하여 교황에게 과학자와 종교 전문가 100명을 중국에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중국으로 오는 도중에 전쟁을 만났는데, 수도사들은 중도에 돌아가고, 상인들만 중국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의 상인의 아들이 동방견문록을 쓴 마코 폴로이다. 1294년 요한 몬테코르비노(John Montecorvino) 신부는 교황의 명을 받아서 중국의 북경에 도착하여 원나라 성조(成祖)의 환영을 받았으며, 북경에 3개의 성당을 세웠는데 1305년에는 6,000여명의 세례 교인들이 되었다. 1300년에 중국에는 이미 3만 여명의 신도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숭복사(崇福司)라는 기구를 만들어 종교 사무를 모두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기독교는 몽고인들과, 서역인들의 외국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중국의 한족들에게는 전파되지 못하였다. 특히 권력층으로 왕족과 귀족들의 비호아래 위로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었기에 원나라가 멸망하여 몽고인들이 중국에서 쫓겨나게 되자 원나라의 권력과 함께 성장했던 기독교 역시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중국선교에서 얻었던 선교적 교훈이다.
세 번째 중국에서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던 시기이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지역에서 상실한 교권을 회복하려고 천주교내에서 일어난 개혁이 1534년에서 1538년 사이에 예수회(耶蘇會, The Society of Jesuit)라는 선교 단체가 창립되었다. 명나라 말기인 1552년, 예수회의 수도사인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중국에 입국하려 시도했지만, 관동성 태산(台山) 밖의 상천도(上川島)에서 질병으로 서거했다. 1552년 이탈리아인 루기어리(Michele de Ruggeri)가 광동성에 도착하여 전도하여 성당을 건축하여 선교했다. 1582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년)는 청년의 몸으로 마카오에 도착하여 1601년에 북경에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20 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습득하고, 사서오경을 연구하고, 서방의 천문, 지리, 역법 등을 번역하여 조정에 헌상했다.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록(天主實錄)과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천주교 교리의 분석 으로 중국의 유교문화의 이해에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책으로 평가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의 자연 이성을 높이 평가했고 자연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와 신앙을 이해시킬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마테오 리치도 이성이 신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약속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신앙과 계시가 개입되어야 할 일임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성이 신앙의 초입이라는 사실을 그의 전교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는 중국인들이 신의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연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신앙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런 믿음은 ‘천주실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기독교적 신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하기위해 택한 본격적인 방법은 ‘천주실의’를 집필한 것이다. 그의 ‘천주실의’는 동서양의 만남에서 대단히 상징적 기호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천주실의’ 만을 기독교의 동양 전래에 따른 사상적 영향의 전모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선교를 위한 마테오 리치의 작업은 복잡한 성격을 가진다. 일단 그의 작업은 최초가 아니라 기존 호교서를 수정하는 보안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천주실록’이 예수회가 중국선교에서 초기에 부딪혔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종합적으로 노정된 저작임을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이다. 중국 문화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인 조력자의 번역을 통해 쓰여졌기 때문에 예수회가 천국에서 온 불 승으로 묘사되어 있는 등 여러 가지 오류와 문제점이 있었다.
마테오 리치의 중요한 선교 전략은 유교의 진리를 함께 인정하면서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결과적으로 유교를 초월하는 기독교의 탁월성을 나타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사회에 뿌리가 내린 유교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 유교 사상에서 하늘(天)의 개념 사상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늘(天神)에 있는 하나님과 같은 사상으로 해석한다. 중국인들이 드리는 하늘에 있는 상제(上帝)를 제사드리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같은 하늘의 신으로 설득하고 있다. 이러는 결과는 성경의 독특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말기에는 천주교 역시 경교 시대와 같이 황실과 궁정의 권력 중심의 관료들과 지식인들 위주의 사대부들의 선교전략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민중과 백성들 에게 전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던 마테오 리치신부는 1610년 51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 선교에 성공한 원인은 힘써 중국의 풍습을 따르고 중국의 자존심인 유교의 도를 인정하며 기독교와 융합하여 전도하며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중국의 풍습을 이해하고 따르며 유교의 법도를 열심히 지키며 자문화 우월주의나 기독교를 이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중국화하여 살아갔던 것이 선교의 비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선교할 당시 그는 천주교의 중국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인의 풍습과 전통속에서 조상과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우상 숭배로 보지 않고 관습화된 예의 행사로 보고, 천주교 신자라 할지라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심지어 비석을 세우고 향을 피우는 것까지도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은 종교적 의미는 없는 전통적 문화 행사로 인정하고 허락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 사후에 도착한 천주교 방제격화(프란체스코 파)와 천주교 도명회(도미니코파)의 선교사들은 이를 부정하였다. 이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서 성공적으로 보이려고 중국의 전통과 예식과 풍습과 타협한 것이다. 조상에게 복을 비는 것과 짐승을 잡아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예식이다. 따라서 제사는 우상 숭배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천주교 선교사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쟁이 일어났고 로마 교황이 개입되고 중국의 강희제 황제와 로마 교황과의 대립까지 발생하여 결과는 중국에 있는 모든 천주교 선교사들이 추방해야 하는 비참한 사태가 일어났다. 1704년 11월 13일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성직부회의를 개최하여 9명의 추기경들이 표결해, 1704년 11월20일부로 모든 제사는 금하는 명령을 중국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1645년 교황 이노센트(Innocent) 10세는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제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1656년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중국의 제사문제는 중국의 예의 문제이며 예의 문제는 순수한 문화행사에 속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중국 천주교인들에게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명을 내렸다. 중국의 천주교 선교사들은 제사를 금하는 것도 합법적인 처사이며 제사를 금하지 않은 것도 합법적으로 생각했다. 중국의 제사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발전하였다.
1724년 7월 말까지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퇴거 명령을 받고 떠나야 했다. 그후 중국 선교는 잠정적으로 중단되는 시대로 접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 등 많은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명, 청의 황제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중국의 계몽과 선교에 헌신했지만, 1736년 4월 22일 천주교 선교를 중단하라는 양광선의 보잘것없는 상소문이지만, 건륭황제는 예부에서 접수하여 처리하라는 명으로 인하여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는 막을 내려야 하는 수모와 푸대접을 당해야 했다.
네 번째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아편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세계적 식민지 정책으로 부를 누리며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은 18세기 말엽에는 미합중국의 독립으로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까지 완전히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대영제국은 특히 중국 대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산업혁명과 기계문명의 결과로 급격한 생산품의 증가로 인해 생산되는 제품들을 판매하기 위하여 그 동안 잊어버렸던 저 개발 지역의 아시아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상실로 상품의 판로가 제한된 대영제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광대한 아편 농장을 개척하고 아편을 재배하여 막대한 아편을 홍콩과 마카오 사이에 있는 청의도(靑依島)로 운반하여 밀수 거래로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로 공공연하게 거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 판매된 아편은 1800년 30,000파운드, 1825년 10,443,150파운드, 1830년 2,814,000파운드, 1836년 3,902,700파운드, 그리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해체된 천주교 예수회 신부 출신의 선교사들이 주로 통역 업무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아편의 범람은 중국인의 생활에 너무나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되었고, 나아가 아편의 범람은 중국인의 건강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가져다주어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어 갔다. 이는 엄청난 사회문제를 유발시켰고, 아편은 청나라의 사회질서와 수많은 범죄로 인하여 청 왕조의 국가통치에 어려움이 더욱 심하게 작용했다. 1838년 도광제는 아편 금지를 발표하고, 그는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1839년 3월 광주에 도착하여 영국 상인의 아편 2만여 상자에서 230만근의 아편을 바다에서 모두 소각시켜 버렸다. 결국 영국 정부는 배상을 요구했고 중국의 거절로 인하여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이것이 아편전쟁의 근원이 되었다.(다음호에 계속)

강호생 선교사
Dr.강호생 Missionary Pastor
Iona Columba College 겸임교수
Mental Health CPE 과정수료
M.Div, M.Th, D.Ics
jhskang@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