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년 7월 9일, 1만5천명의 굶주린 제1차 십자군 (First Crusade, 1096 ~ 1099)이 예루살렘에 입성
제1차 십자군 (First Crusade, 1096년 8월 15일 ~ 1099년 7월 15일)은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이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쟁쟁한 군웅들을 앞세우고, 총사령관으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데마르 주교가 있었고 은자 피에르도 따라갔다.
제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먼저 니케아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입성이 어려운 상황에서 파티마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었다. 다급해진 십자군은 절망했지만 레몽의 수행원인 페트루스 데시데리우스란 사제가 아데마르의 영혼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십자군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만약 에루살렘의 성벽을 한바퀴 돌면 9일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십자군들은 순례자의 복식으로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돌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 꼴에 황당해하며 화살을 쏘아댔다.
예루살렘 성벽은 안디옥 성벽보다 더 높고 더 견고했다. 남은 군사들도 기사 1200명에 보명 1만2천 정도이며 지칠대로 지친데다 식량도 거의 떨어져갔다. 그래서 7월 8일 금식을 선포한 후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성을 돌았다. 그리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 또 은둔자 피에르의 사기 돋구는 연설을 듣는다. 그런 후 고드프리의 공격 명령에 따라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성문을 열 수 있었다. 출정한지 5년만에 얻은 승리였다.
그 동안 성지를 더럽혔다는 생각으로 그 성안의 주민들을 모두 학살했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환희에 찬 광신도 십자군은 당연히 사흘간 약탈을 벌였다. 사가들은 말 고삐까지 피가 닿도록 사람을 죽여 예루살렘이 피바다가 되어 무릎까지 피가 차올랐다 하지만 재물에 더 욕심이 많았던 십자군이 그 정도로 광기에 빠졌을 것이라 믿기는 어렵다. 많은 숫자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몸값을 받고 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엄청나게 많았고, 학살이 일어났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최대한 적게 잡아도 1만, 많게는 4만에서 7만까지라고 이야기하니 중세 도시의 인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사흘간의 광기를 생각해보면 농성 준비 기간 동안 성에서 쫓겨난 현지 기독교도들은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그나마 레몽은 학살을 어느 정도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는 가장 존재감 없고 중립적인 고드프루아가 되었으나, 얼마 못되어 죽었다. 보에몽은 아데마르의 후임인 다임베르트와 짜고 예루살렘을 노렸으나 다임베르트는 일찌감치 온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에게 밀려나고, 보에몽은 무슬림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며 공식적으로 끝이난다.
십자군 전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했던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이 1099년 7월 9일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