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년 7월 7일,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Edward I, 1239 ~ 1307) 일명 ‘다리 긴 왕’ (Longshanks) 타계
에드워드 1세 (Edward I, 1239년 6월 17일 ~ 1307년 7월 7일)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왕 (재위 1272년 11월 16일 ~ 1307년 7월 7일)으로 키가 188cm여서 ‘다리 긴 왕 (Longshanks)’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동안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정복해 다스렸다.
헨리 3세의 장자로, 노르만 정복 이래 잉글랜드 최초의 국민적인 왕이라 불린다. 왕세자 시절에 가스코뉴와 아일랜드의 영주로서 활약했으며, 1258년∼1265년의 내란에는 부왕을 도왔다.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1271년 십자군에 참가, 부왕의 사후 원정 중에 왕으로 선출되어, 1274년에 귀국하여 대관하였다.

– 에드워드 1세 (Edward I)
.별호: 긴다리왕 (Longshanks), 스코트인 잡는 망치 (Hammer of the Scots)
.출생: 1239년 6월 1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
.사망: 1307년 7월 7일 (68세), 컴벌랜드 브러프바이샌즈
.매장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왕조: 플랜태저넷
.부모: 부) 헨리 3세, 모) 엘레오노르 드 프로방스 백작영애
.배우자: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왕녀 (1254 ~ 1290),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 왕녀 (1299 ~ 1307)
.자녀: 바르 백작부인 엘레노어, 글로체스터 백작부인 조안, 체스터 백작 알폰소, 브라반트 공작부인 마거릿, 우드스톡의 메리, 러들런의 엘리자베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 제1대 노퍽 백작 브라더턴의 토머스, 제1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형제: 마거릿, 베아트리스, 에드먼드, 캐서린
*잉글랜드 국왕, 아키텐 공작, 아일랜드 영주
.재위: 1272년 11월 16일 – 1307년 7월 7일
.대관식: 1274년 8월 19일
.전임: 헨리 3세 / 후임: 에드워드 2세
* 가스코뉴 공작
.재위: 1249년–1307년
.전임: 헨리 3세 / 후임: 에드워드 2세
* 퐁티외 백작
.재위: 1279년–1290년
.공동재위자: 엘레오노르 드 퐁티외 여백작
.전임: 잔 드 다마르탱 / 후임: 에드워드 2세
* 군사 경력
.참전: 제2차 남작 전쟁 – 에베섬 전투; 제9차 십자군 – 웨일스 정복,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폴커크 전투
아버지 헨리 3세 때부터 있어 온 외국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썼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 등 부동산의 양도 및 상속에 관한 중요한 법률을 만들어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 불리었다. 재판 행정 제도를 확립하고 일련의 제정법을 발포, 봉건사회의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다. 또 산업에 주력하고 1285년 상인법을 발령, 양모와 가스코뉴의 술 생산을 장려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에게 신종하여 대륙에 있어서 나바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 아라곤의 국왕 페로 3세와 교황·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조정 (1291)에 활약이 컸다. 1295년 성직자와 귀족, 각주에서 2명의 기사 및 도시의 대표를 모아 ‘모범 의회’를 열어 잉글랜드 의회의 기초를 쌓았다. 말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격을 받아 1303년 파리 협정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또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조달 때문에 국내의 반란을 유발하였다.
그는 1307년 그가 정복하였던 스코틀랜드가 로버트 1세를 중심으로 독립하자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던 도중 그해 7월 7일 칼라일 근방에서 장남 웨일스 공 에드워드를 불러 “나를 화장하여 뼈를 가죽 부대에 넣어 군사들과 함께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장악했을 때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사망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태자 시절
그 유명한 존 왕의 손자이자 헨리 3세의 장남으로 헨리 3세 때에는 할아버지 존 왕이 치세 시절에 일으킨 갖은 사고로 인하여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가 수립된 이후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던 시대였다. 게다가 해외의 국가들과의 사정도 좋지 못했고 내분도 심하게 일어나 잉글랜드의 국력은 무척 쇠약해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부왕 헨리 3세를 도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위기는 귀족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가 일으킨 2차 바론 전쟁에서 부왕을 도와 국왕군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던 일이었다.
프랑스 혈통의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있어 당대 최고의 정적으로 헨리 3세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왕을 압박하여 옥스퍼드 조례를 인정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킬 생각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를 번복하려 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분노하여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헨리 3세는 국왕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루이스 전투 (Battle of Lewes)에서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에게 패아고 말았다. (…)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으며 결국 옥스퍼드 조례가 통과돼버리고 잉글랜드 의회가 소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여 글로스터 공과 함께 국왕군을 결성, 이브샴에서 다시 한번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과 싸웠으며 마침내 이브샴 전투 (Battle of Evesham)에서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고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큰 굴욕을 주었던 그의 시체를 찾아내 오체분시하고 난자해 복수를 마쳤다.
이브샴에서 승리한 이후로 에드워드 1세는 왕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왕이었던 헨리 3세 이상의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쥠으로써 잉글랜드의 실권은 사실상 에드워드 1세의 것이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자 1271년에 제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으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을 선언해버렸다.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 측에서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귀국하였다. 그 와중에 헨리 3세는 잉글랜드에서 병사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다.

– 내정
태자 시절부터 대담한 활약을 보인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였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이전의 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덕분에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는 별명도 얻을 정도였다고.
기존의 관습법을 정비하여 국법의 불합리하던 점들을 해소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법령을 통해 강력한 교회의 권력을 억눌렀으며 영주들이 지닌 땅을 재분배하여 그 권력을 분산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양모와 와인의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시키는 등 잉글랜드의 중앙 집권화를 착실히 이루어 나갔다. 사실상 잉글랜드 봉건 제도의 종말을 알린 왕으로, 봉건시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영주들과 교회를 끝없이 견제하고 약화시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봉건제는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또한 노르만 귀족 계급과 앵글로색슨족 평민 계급을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의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제법 공을 많이 들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영어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태자 시절에 꺾었던 정적 시몽 드 몽포르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회 운영법만큼은 적극적으로 본받았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상하 정치 계급의 화합을 이루어 강력한 결속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특히나 의회를 통해 지속적인 과세징수를 추구했는데 특히 1295년에 연 모범의회에서는 다수의 귀족, 모든 주교와 대주교, 각 주에서 기사 2명, 소도시들에서 대표 2명이 참석하는 등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에서 대표를 보내도록 하여, 중앙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의회의 권위를 높혔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통해 후에 있을 하원, 상원 체제 역시 어느 정도 구축했다. 오늘날 오랜 의회 전통으로 유명한 영국의 의회정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 외정
에드워드 1세는 내정으로 잉글랜드의 통치력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 웨일스를 제후로 두었지만 그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권은 거의 없었고, 잉글랜드의 왕들도 웨일스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웨일스의 통치세력에게 그리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웨일스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놀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그곳에서도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친히 원정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스의 토착 영주들과 싸워 이겼고 이들을 복속시켜 잉글랜드 국왕이 웨일스에서도 실권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한편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던켈드 왕조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3세가 1286년 3월 18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 그날 밤 알렉산더 3세는 연회를 베풀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말을 타고 갔다가 신하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낙마사했다. 알렉산더 3세는 원래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거릿 하나 외에는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다.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가렛이 노르웨이 왕 에이리크 2세와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거릿이 있었고 마가렛을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마가렛이 갑자기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존 발리올이라는 영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다.
1293년, 어린 조카를 대신해 파이프 백작위의 계승권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귀족 맥더프가 잉글랜드 왕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잉글랜드인 재판관이 심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 1290년 버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멋대로 위반한 것이라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1292년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하고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표하여 그에게 신서를 한 시점에서 이전의 조약은 무효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해 에드워드 1세가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결국 1295년 2월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친 신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격노한 에드워드 1세는 반역자 발리올을 왕국으로부터 추방한다는 판결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의 몰수를 공표했다. 그리고 1296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던바 전투에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다음 그에게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도륙했고, 발리올을 사로잡아 폐위시킨 다음 그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그리고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임을 선포하며 스코틀랜드를 합병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거릿의 검은 십자가상마저 1296년에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버렸다. 이 때문에 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다. 특히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 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잔혹한 학살에 증오심을 품게 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에게 호의적인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등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해당 지역 사람들을 귀족 시민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등 더욱 잔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잔혹한 학살은 역효과를 불러와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원한과 증오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나타난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군을 조직하여 수차례 잉글랜드 군대를 패퇴시켰다. 특히 월레스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와 마을들까지 공격하여 약탈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에드워드 1세는 토벌군 1만 5천명을 파견하여 폴커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 6천명을 격파했으며 윌리엄 월레스도 붙잡아 그의 사지를 찢어죽여서 본보기를 보였지만 끝내 스코틀랜드 저항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 사망
비록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 죽이긴 하였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날로 심해졌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추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래서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와 싸우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나가 매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저항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패배한 로버트 1세는 아일랜드로 도주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이 원정 도중에 병을 얻어 진중에서 68세로 일생을 마쳤다. 사후 그의 시신은 장례를 치른 다음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된다.
끝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했던 에드워드 1세는 최후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시체를 화장해서 남은 잿가루와 뼈를 부대 자루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도 한다.
○ 평가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된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대단히 완고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다 못해 잔혹하였다.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나 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정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로 냉혹하여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술한 유언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지독했다고도 한다. 상술한 내용처럼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 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삼킬 뻔 했고, 역사학계에서도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여전히 입지가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도 격파하고 진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다.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먼 훗날 동군연합에 먼저, 그 다음에 광범위한 자치권과 동등한 대표권을 인정받으며 연합왕국에 서서히, 스코틀랜드 고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지키면서 통합된 것과 달리 일찍부터 상당히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숙적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이렇게 자국 역사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이 왕을 공포와 경외심을 같이 담아 스코트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고 부른다.
다만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몇 차례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다. 때문에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잉글랜드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잉글랜드 경제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에도 큰 실책으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에드워드 1세의 개입 탓에 분쟁이 생겼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의 문제로 만들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은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 때로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무수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왕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편이다. 그야말로 잉글랜드의 초석을 다진 왕으로 평할 만하다.

– 기타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들 대부분이 프랑스의 왕족들과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단적인 예로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만 해도 잉글랜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잉글랜드에는 단 6개월 정도만 머물렀으며 영어는 능숙하지 못했고 주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잉글랜드 소유의 봉토가 크게 줄었으며 자연히 잉글랜드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점차 현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도 프랑스어를 멀리하고 영어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으며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장 이 사람의 이름부터가 노르만 정복 이후로 처음으로 사용된 게르만계 고유어 이름이다.
가정사는 불우한 편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레오노르를 일찍 잃었는데, 당시에 에드워드 1세는 너무도 깊은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레오노르는 에드워드와 10대 중반에 결혼해 40대가 될 때까지 무려 16명 (4남 12녀)의 아이를 낳아주었으며, 전쟁터에도 남편을 따라나섰고 에드워드가 자객의 독검에 중독되었을 때도 간호해준 충실한 아내였다. 사망 이유는 평생에 걸친 다산과 노산 (43세 출산)의 후유증일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는 레오노르 외의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 16명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에드워드 2세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갓난아기일 때 죽었다.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는 에드워드가 죽고 나서 1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1284년, 45세가 되어서야 후계자인 에드워드 2세를 얻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와는 성격차가 심해서 부자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에드워드 2세가 세자 시절에 친구인 가베스턴을 지나치게 감싸고 돌자 분노하여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손찌검을 하고는, 가베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금욕적인 성격으로 음식을 절제했고 물 외에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
비록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의외의 사실이 있다면, 에드워드 1세가 평생 동안 십자군 전쟁에 대단히 집착했다는 점이다. 이는 에드워드 1세 또한 중세시대 유럽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1세는 이미 태자 시절에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병사하고 에드워드 본인도 자객에게 죽을 뻔하는 등의 악재에 부딪혀 큰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틈만 나면 중동으로 돌아가 다시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원은 평생토록 이루지 못하였다.
사후에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가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죄다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받고 있다.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해 확실히 왕으로서의 능력이 뒤쳐졌으며 결국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다. 결국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 공주 출신의 아내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녀가 데려온 프랑스 출신 가신들의 손아귀에 잉글랜드가 놀아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이들을 무찔러 다시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
웨식스 시대에 이미 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왕국 성립 이후로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로 에드워드 왕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1세라는 넘버링은 이쪽이 가져갔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노르만 왕조가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 왕들의 넘버링이 초기화되었는데, 아마도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의 지배로 앵글로색슨 (웨섹스) 계통이 끊어져 당대의 사람들이 웨식스 왕조와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왕국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