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 10월 6일,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혁명가 삼봉 (三峯) 정도전 (鄭道傳, 1342 ~ 1398) 별세 (이방원이 암살)
정도전 (鄭道傳, 1342년 ~ 1398년 10월 6일 / 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본관은 봉화이다. 자는 종지 (宗之). 호는 삼봉 (三峯), 시호는 문헌 (文憲)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 (신유학) 이념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인 조선 왕조 성립에 핵심적인 공헌을 하여 왕조의 설계자로 불린다.

– 정도전 (鄭道傳)
.별호: 삼봉 (호), 종지 (자), 문헌 (시호), 봉화백 (작위), 해동장량 (별칭)
.출생: 1342년, 고려 양광도 단양 (現 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군)
.사망: 1398년 10월 6일 / 음력 8월 26일 (향년 57세), 조선 한성부 의성군 남은 사가에서 암살
.학력: 1360년 진사시 합격, 1362년 문과 급제
.경력: 문관, 유학자, 사상가, 정치인
.정당: 무소속
.부모: 정운경(부), 영주 우씨 부인(모)
.형제: 정도존(아우), 정도복(아우)
.배우자: 경숙택주 경주 최씨(최습의 딸)
.자녀: 슬하 3남 – 정진(장남), 정영(차남), 정유(삼남)
.친인척: 정균(할아버지), 우연(외조부), 황유정(매제), 최습(장인)
.종교: 유교 (성리학)
* 조선 판삼사사(朝鮮 判三司事)
.임기: 1393년 9월 26일 ~ 1398년 8월 26일
.군주: 조선 태조 이단
*고려 전교시주부 (高麗 典敎寺主簿)
.임기: 1363년 5월 11일 ~ 1364년 8월 11일
.군주: 고려 공민왕 왕기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아버지와 이곡 (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 (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 (鄭夢周) · 박상충 (朴尙衷) · 박의중 (朴宜中) · 이숭인 (李崇仁) · 이존오 (李存吾) · 김구용 (金九容) · 김제안 (金齊顔) · 윤소종 (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 해 동료 사우의 추양 (推讓)을 받았다. 1360년 (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 (忠州司錄) · 전교주부 (典校注簿) · 통례문지후 (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 (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 (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 (우왕 1) 권신 이인임 (李仁任) · 경복흥 (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 (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 (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三角山) 밑에 초려 (草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 (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 (王某)라는 재상이 별업 (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 (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 (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 (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 (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 (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 · 심덕부 (沈德符) · 지용기 (池湧奇) · 정몽주 · 설장수 (偰長壽) · 성석린 (成石璘) · 조준 · 박위 (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 (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 (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 (三司右使) · 지경연사 (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 (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 (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 (尹彛) · 이초 (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 (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 (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 김진양 (金震陽) · 서견 (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 (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 (不正)하고 파계 (派系)가 불명 (不明)하다.”든가, “천지 (賤地)에서 기신 (起身)해 당사 (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 (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 · 남은 (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 (門下侍郎贊成事) · 동판도평의사사사 · 판호조사 (判戶曹事) · 겸판상서사사 (兼判尙瑞司事) · 보문각대학사 (寶文閣大學士) · 지경연예문춘추관사 (知經筵藝文春秋館事) · 겸의흥친군위절제사 (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 (태조 2) 「문덕곡 (文德曲)」 · 「몽금척 (蒙金尺)」 · 「수보록 (受寶籙)」 등 3편의 악사 (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 (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 (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 · 전라 · 양광삼도도총제사 (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 (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 정총 (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 (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 (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 (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 (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 (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 (地界)를 획정하고 성보 (城堡)를 수선하며 참호 (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 권근 (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 (儒士)들에게 경사 (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 (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이방석 (李芳碩)에 당부 (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 (恭昭難) · 무인난 (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 활동사항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 (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 (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 (群書)를 박람해 의론 (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 (漢)나라 장량 (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漢高祖)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 (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 · 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 (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 (延安車氏) 공윤 (公胤)의 외예 얼속 (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 (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 (趙英珪) · 함부림 (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 (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 (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 · 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 · 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 · 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 · 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학자지남도 (學者指南圖)』 · 『심문천답 (心問天答)』 (1375) · 『심기리편』 (1394) · 『불씨잡변』 (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 (實學)이요 정학 (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 (社倉制) · 향약 (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 (漢唐)의 공리적 사상 (功利的 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 · 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 (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 (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 · 도교 · 참설 (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 (經世論)은 『조선경국전』 (1394) · 『경제문감』 (1395) · 『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 (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 (府兵制) · 군현제 (郡縣制, 守令制) · 부세제 (賦稅制) · 서리제 (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 (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 · 농 · 공 · 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 (嫡庶)나 양천 (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 (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 (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 (工) · 상 (商) · 염 (鹽) · 광 (鑛) · 산장 (山場) · 수량 (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 (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 (經濟議論)』 · 『감사요약 (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 (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 · 『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 · 『강무도 (講武圖)』 · 『진법 (陣法)』 등이 있다. 의서 (醫書)로는 『진맥도결 (胗脈圖訣)』, 역산서 (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 (樂詞)를 지어 「문덕곡」 · 「몽금척」 · 「수보록」 · 「납씨곡 納氏曲」 · 「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 · 부평 · 김포 · 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 (錦南雜詠)』과 『금남잡제 (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 (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 (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 (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 (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 (文憲)이다.

– 사후 평가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 (廣州) 사리현 (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 (1622 – 1673)의 ‘동국여지지 (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반발했던 조준은 태종때 중용이 되었고, 한편 정몽주는 태종 때 가서 권근의 요구와 하륜의 지지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1865년 (고종 2년) 9월 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 (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 (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 (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년 (고종 8년)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 (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계유정난때 희생된 사람들과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 사상과 신념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의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그때부터 생각한 것이다. 또한 감찰 (사헌부)의 탄핵권을 강조하고 간관 (뒷날 사간원)의 권리를 국왕과 대등하게 설정했다. 고려 정치 제도에서 어사대 (사헌부)는 독립된 기구였지만 낭사 (사간원)는 중서문하성 산하 기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간쟁 기구를 왕과 대등한 위치에 놓은 정도전의 사상은 조선 정치 체제의 중요한 특징인 전제 왕권 통제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 경세론
그의 경세론 (經世論)은 《조선경국전》 (1394) · 《경제문감》 (1395) · 《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각국과 각 시대의 법령과 규정을 참고한 것이 주목된다. 《주례》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 (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 (府兵制) · 군현제 (郡縣制, 守令制) · 부세제 (賦稅制) · 서리제 (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을 빌려왔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 (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 (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 (工) · 상 (商) · 염 (鹽) · 광 (鑛) · 산장 (山場) · 수량 (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가 계획한 모든 계획 중 일부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 정치론과 인재 채용
《경제문감》은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봤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는 일종의 내각에 의한 정국운영론으로,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 불교 배척과 비판
그는 불씨잡변을 지어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그러나 그의 불교 비판론은 모순적인 측면이 많았다. ‘불씨잡변’을 지어 신랄한 불교 비판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서 긍정정인 시를 짓거나 승려9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삼봉집 제 2권 산사에 노닐다 [遊山寺] 와 삼봉집 제2권 백정 선사에게 기증하다 [寄贈柏庭禪] , 고헌 스님을 심방하는 도중 [訪古軒和尙途中], 삼봉집 제3권 서(序) 화엄종사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 [送華嚴宗師友雲詩序] 글들이 좋은 예이다.
○ 가족 관계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증조부 : 비서랑 동정 정영찬(秘書郞同正 鄭英粲)
조부 : 검교 군기감 정균(檢校軍器監 鄭均)
아버지 :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년 ~ 1366년)
외조부 : 영주우씨 산원(散員) 우연(禹淵)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누이 : 봉화 정씨
매부 : 황유정(黃有定, 1343년 ~ 1421년)
동생 : 정도존(鄭道存, ? ~ 1398)
동생 : 정도복(鄭道復, 1351년 ~ 1435년)
처부 : 찬성(贊城) 최습(崔濕)
부인: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장남 : 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刑曹判書 贈 右贊成 僖節公 鄭津, 1361년 ~ 1427년)
손자 : 정래(鄭來)
손자 : 정속(鄭束)
차남 : 정영(鄭泳 ? ~ 1398년)
아들 : 정유(鄭游 ? ~ 1398년)
○ 저서
삼봉집(三峯集)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의론(經濟議論)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心氣理)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진맥도결(診脈圖結)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진법(陣法)
– 편저와 역서
고려국사 (공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작품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강무도(講武圖)
궁수분곡(窮獸奮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文德曲)
신도가(新都歌)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