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2월 14일,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8번째 왕 리처드 2세 (Richard II, 1367 ~ 1400) 타계
리처드 2세 (Richard II, 1367년 1월 6일 ~ 1400년 2월 14일)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8번째 왕 (재위 1377년 6월 22일 ~ 1399년 9월 30일)으로,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다.

– 리처드 2세 (Richard II)
.휘: 보르도의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of Bordeaux)
.출생: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 보르도
.사망: 1400년 3월 14일경, 잉글랜드 요크셔 폰테프랙트 성
.매장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왕조: 플랜태저넷
.주모: 부) 에드워드 흑태자, 모) 켄트의 조안
.형제자매: 에드워드 오브 당굴렘, John Holland, 1st Duke of Exeter 등
.배우자: 안네 폰 뵈멘 왕녀 (1382 ~ 1394년), 이사벨 드 프랑스 왕녀 (1396 ~ 1400년)
*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재위: 1377년 6월 21일 ~ 1399년 9월 30일
.대관식: 1377년 7월 16일
.전임: 에드워드 3세 / 후임: 헨리 4세
* 아키텐 공작
.재위: 1377년 ~ 1390년
.전임: 에드워드 3세 / 후임: 존 2세
* 웨일스 공, 콘월 공작
.재위: 1376년 6월 8일 ~ 1377년 6월 22일
.대관식: 1376년 11월 20일
.전임: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 후임: 몬머스의 헨리
* 군사 경력
.참전: 백년전쟁 – 캐롤라인 전쟁, 와트 타일러의 난

○ 생애 및 활동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인 보르도 대주교 궁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를 이끌고 아키텐 공을 역임한 흑태자 에드워드였고, 어머니는 에드워드 1세의 막내아들인 초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인 켄트의 조앤이었다. 어머니 조앤은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의 오촌 고모이기도 했다.
어머니 켄트의 조앤은 1340년 14살 연상인 젠트리 출신의 토머스 홀랜드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홀랜드가 전장으로 떠난 지 1년 후인 1341년 가족들의 권고에 따라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결혼했다.
하지만 1347년 토머스 홀랜드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앤과 결혼했던 사실을 알리며 조앤과 윌리엄 몬타구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1349년 11월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조앤은 홀랜드와 무사히 재결합하여 3남 2녀의 자녀들을 낳으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 후 토머스 홀랜드가 1360년에 사망한 뒤 흑태자 에드워드의 청혼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 왕비는 조앤의 처지는 신분과 복잡한 과거사 때문에 이를 꺼렸지만, 에드워드가 자기 뜻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1361년 10월 10일 윈저 성에서 에드워드와 조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조앤은 토머스 홀랜드와의 사이에서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존 홀랜드, 조앤 홀랜드, 모드 홀랜드를 낳았고, 흑태자 에드워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앙굴렘의 에드워드와 보르도의 리처드를 낳았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장남 에드워드를 무척 총애했지만, 1370년 9월 리모주 공방전을 치르고 보르도로 귀환했을 때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비탄에 잠겼다.
게다가 1367년 카스티야 원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질에 걸린 뒤 지속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371년 1월 잉글랜드로 이주해 버크햄스테드 성에 은둔했다. 리처드는 아마도 1376년까지 버크햄스테드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왕자는 신체적 특성이 전사로 크기엔 좋지 않아서 아버지 에드워드의 실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어떻게든 아들을 전사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강도 높은 신체 단련을 강요했고, 가정 교사로 하여금 아들에게 전쟁 기술을 가르치고 힘과 지구력을 키우게 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버지가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들었다. 특히 이부형제 토머스 홀랜드가 훌륭한 전사로서 명성을 날리고 아버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을 보고 더욱 더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1376년 6월 8일, 이질에 시달리던 아버지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아들보다 오래 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이때 이미 중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곧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이로 인해 누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왕위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장남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어린 아들만 남겼을 때 다른 아들들이 왕위를 주장하는 게 가능했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흑태자 에드워드 외에 6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1368년에 사망했고 외동딸 필리파를 남겼다. 필리파의 남편인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왕실의 일원으로 간주되었으며, 왕위 계승 경쟁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경쟁자는 단연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곤트의 존이었다. 그는 랭커스터 공작으로서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많은 영지를 다스렸으며,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큰형 에드워드가 중병에 시달려서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던 1370년대에 국정을 총괄했다. 에드워드 3세의 다른 두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존에 비해 큰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곤트의 존이 조만간 조카를 제치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은 인기가 별로 없었다. 백년전쟁 지속을 원하는 여론과는 달리 프랑스 왕국과 어떻게든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 반감을 샀고, 잉글랜드 성직자들과 심한 마찰을 벌이고 있던 존 위클리프를 옹호해 종교계의 지탄을 받았으며, 아버지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즈의 전횡을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자기가 아직 살아있을 때 손자 리처드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로 마음먹었다.
1376년 11월 20일, 리처드 왕자는 웨일즈 왕자, 체스터 백작, 콘월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에드워드 3세는 성탄절 행사에서 리처드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왕국의 모든 귀족, 기사, 주교들에게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곤트의 존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거행된 성대한 잔치에서 모든 고문과 함께 리처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왕좌의 상속자로 인정했다.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는 리치먼드 궁전에서 사망했고, 7월 16일 켄더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의 주관하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리처드 2세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리처드 2세는 즉위 당시 10살의 소년이어서 스스로 통치할 수 없었다. 어머니 켄트의 조앤이 후견인이 되었고, 왕국은 공식적으로 12명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곤트의 존은 이 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곤트의 존의 영지는 잉글랜드의 1/3을 차지했고, 125명의 기사와 132명의 종자를 상시 거느렸으며, 그의 궁전인 템즈 강의 사보이 궁은 리처드 2세가 살았던 궁전보다 더욱 화려했다. 존은 아버지 에드워드 3세, 큰형 에드워드와 함께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면서 군사적 재능과 경험이 충만했다. 이렇듯 강대한 힘을 가진 그였기에, 원한다면 리처드 2세에게 충분히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형 에드워드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그는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축출하려는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켄트의 조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그녀가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걸 보장해줬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136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1360년 브레티니 협약으로 확보한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보르도에서 바욘 까지의 좁은 해안 지역 만이 잉글랜드의 통제를 받았다.
1375년 브뤼헤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2년간 휴전이 이어졌지만, 리처드 2세가 즉위한 직후인 1377년 7월 브뤼헤 휴전이 만료되자마자 프랑스 왕국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브르타뉴와 기옌에서 잉글랜드군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가론 강변의 베르주라크, 리부른, 생테밀리옹, 블라예를 공략했다.
여기에 프랑스 해군 제독 장 드 비엔은 120척에 달하는 전함을 이끌고 1377년부터 1380년까지 플리머스, 와이트 섬, 라이 등 잉글랜드 남부 해안과 10개의 잉글랜드 항구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런던은 여러 차례 적 함대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경보를 발령해야 해 민심의 동요를 초래했으며,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플란데런 백국간의 물자 교류는 매우 악화되어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일련의 공세로 인해 왕국의 위신이 실추되자, 1379년 하원에서 이에 반격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두세를 도입했다. 1380년에는 인두세가 3배로 늘어나면서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381년 봄부터 시작된 농민 봉기는 그 해 여름에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햄프셔, 서머셋, 노샘프턴셔, 요크셔 등지로 확산했다. 이중 켄트 반란군은 지붕 수리공이었으며 과거에 전쟁에 투입된 적이 있었던 와트 타일러의 지휘하에 런던으로 진군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거주지를 약탈했다. 그들은 재무관 로버트 헤일스, 세금 징수관 존 레지의 처형을 요구했다. 이후 런던 동부 교외의 블랙히스에 도착한 반군은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 허용, 코르비 (Corvée: 지주의 농장에서 개인 장비를 가지고 일하는 부양 농민의 무료 강제 노동) 폐지, 1에이커 당 표준 임대료 4펜스 확립, 현물세를 현금세로 대체, 자유 무역 도입, 반군에 대한 사면 등을 요구했다.
당시 런던 탑에 살았던 14세의 리처드 2세는 그리니치에서 그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1381년 6월 13일, 그는 배를 타고 템즈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군중을 두려워 해 왕이 바지선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돌아오도록 했다. 이에 격분한 농민 반란군은 런던 교외를 황폐화시킨 후 런던 브리지를 건너 런던 시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곤트의 존의 뉴 탬플과 사보이 궁전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와 동시에, 잭 스트로우가 이끄는 에식스 반군과 헤러퍼드셔의 반군과 연합하여 런던에 도착한 뒤 하이버리와 밀 앤드를 점령했다.
6월 13일 저녁, 리처드 2세는 런던 탑 성벽 위에 올라 반군에게 진정하라고 연설하면서, 다음날 밀 앤드 공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그는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와 함께 반군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왕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읽었다. 리처드 2세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고 반군이 해산되기를 바라면서 런던 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런던 탑을 떠난 사이, 반군은 수비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난 덕분에 런던 탑을 손쉽게 접수하고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 사이먼 테오발드,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켄트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했던 의회 집행관 존 레그 등 여러 장관을 잡은 뒤 타워 힐에서 참수했다. 이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런던 브리지에 전시했다. 조앤은 반군이 자기 방까지 침입해 위협하자 깜짝 놀라 플랙프라이어스의 베이나르 성으로 피신했고, 리처드 2세도 나중에 그곳으로 이동했다.
6월 15일, 리처드 2세는 켄트 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를 만났다. 와트 타일러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귀족의 권력을 제거하고, 모든 주교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왕이 이 요구에 망설이다가 가능한 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와트 타일러는 왕이 성실하게 준수할 것 같지 않다고 여겨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이에 타일러가 왕에게 오만하게 군다고 여긴 왕의 호위병들이 타일러와 말다툼을 벌였다. 이때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타일러를 덮쳐서 말에서 끌어내려 죽였다. 농민 반란군은 눈앞에서 지도자가 살해당하자 격분해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리처드 2세가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나는 너희의 주군이다! 나를 따르라!”
농민 반란군은 왕을 차마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월워스가 군대를 모아 농민군을 포위했지만, 리처드 2세는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윌리엄 월워스와 2명의 저명한 런던 시민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그 후 인두세가 폐지되었지만 농민 반란군의 다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처드 2세는 6월 23일 에식스에서 자신이 한 약속을 확인하기를 거부했고,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 등이 반란군을 자발적으로 진압하는 걸 허용했으며, 7월 2일 체름스퍼드에서 사면령을 취소했다. 그는 존 볼을 포함한 반군 지도자 15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세인트 올번스 재판을 직접 주재했다. 다만 많은 반군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며, 리처드 2세는 8월 30일 체포와 처형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재위 중에 와트 타일러의 난 (1381)을 진압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회와의 불화는 심화되었다.
의회와의 마찰은 1386년 양 세력을 중재하고 있던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계승 문제로 떠난 시기에 표면화 되었는데 의회는 국왕의 최측근 중 하나인 서퍽 백작 마이클을 탄핵하고 11인 위원회를 개설하여 ‘당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물론 리처드 2세는 이러한 결정을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의회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의회파의 우두머리격인 5인의 청원파 중 한 명이자 곤트의 존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 우드스톡 역시 리처드의 측근들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은 1388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리처드 2세가 일시적으로 의회에게 굴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1397년까지 양 측은 표면상으로는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
1397년, 8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추종자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데 성공한 리처드 2세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5인의 청원파 중 토머스 우드스톡을 투옥, 살해하고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반역죄로 처형해 버렸으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해 9월 남은 2인의 청원파 중 한 명이였고 곤트의 존의 아들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헨리 볼링브로크가 청원파들에 대한 처분이 부당함을 주장하자 그 역시 추방한다.
얼마 후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는 헨리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의 영지마저 몰수하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해 5월 정국이 아직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방문계획을 세웠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렸다.
이는 반란의 기회만을 엿보던 의회파에게 결정적으로 틈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그가 추방하였던 헨리 볼링브로크를 필두로 하는 반란군이 잉글랜드로 침입하여 왕좌를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1399년 8월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오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헨리에게 항복한다.
그는 9월 30일 폐위당하고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약 4개월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일설에는 그는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도 한다.
○ 인물
리처드는 옷차림은 물론 외모와 머리모양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고, 손수건을 고안하기도 했다.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이며 발작적으로 폭력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가족, 측근 등에게는 관대했다.
○ 역사적 중요성 및 유산
리처드 2세는 1377년부터 1399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사촌인 헨리 볼링브루크 (훗날 헨리 4세)에 의해 폐위되고 감금되었으며, 결국 1400년에 별세했다.
리처드 2세의 폐위는 이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분쟁인 장미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 희곡 《리처드 2세》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리처드는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캔틸레버식 지붕으로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홀 재건축을 명령하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