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8년 9월 23일, 조선 7대 국왕 세조 (世祖, 1417 ~ 1468) 타계
세조 (世祖, 1417년 11월 2일 / 음력 9월 24일 ~ 1468년 9월 23일 / 음력 9월 8일)는 조선의 제7대 국왕 (재위 : 1455년 6월 24일 / 음력 윤6월 11일 ~ 1468년 9월 22일 / 음력 9월 7일)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휘는 유 (瑈), 본관은 전주, 자는 수지 (粹之)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즉위 전 군호는 수양대군 (首陽大君)이다.

– 세조 (世祖)
.출생: 1417년 11월 2일, 한성부
.사망: 1468년 9월 23일, 한성부
.본명: 이유 (李瑈)
.부모: 조선 세종, 소헌왕후
.형제자매: 조선 문종
.배우자: 정희왕후 (1428 ~ 1468), 근빈 박씨, 소용 박씨
.자녀: 조선 예종, 조선 덕종, 의숙공주, 창원군, 덕원군, 이서, 이세희, 이성
*조선의 제7대 국왕
.재위: 1455년 윤6월 11일 ~ 1468년 9월 7일 (음력)
.즉위식: 경복궁 근정전
.전임: 단종 / 후임: 예종
*조선의 태상왕
.재위: 1468년 9월 7일 ~ 1468년 9월 8일 (음력)
.전임: 태상왕 태종 / 후임
재위 1455년 (세조 1)∼1468년 (세조 14). 본관은 전주 (全州). 이름은 이유 (李瑈). 자는 수지 (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尹氏)이다.
왕자 시절 《월인석보》와 《역대병요》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을 즐겨 했고, 권람과 한명회를 필두로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1453년 (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얻은 뒤 일등정난공신에 녹훈되었다. 단종 대신 섭정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1455년 (단종 3년) 단종으로부터 명목상 선위의 형식을 빌어 즉위하였다. 이는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 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운동을 저지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다.
즉위 후 태종이 실시하였던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과전법을 수정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세종 때 설치한 4군과 6진의 출몰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토관제도를 실시하여 두만강 유역의 영유를 확고히 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왕실 사찰과 탑을 중수하고 법당을 찾아 승려들을 모아 불사를 자주 행하였으며 불교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반정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훈구 공신들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사림파와 귀성군과 남이 등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468년 (세조 14년) 9월 7일, 예종에게 전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 전위 다음날인 9월 8일, 수강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에 7월부터 심복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 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폭력으로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세조는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즉위한 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 (集賢殿直提學) 양성지 (梁誠之)에게 명해 우리 나라의 지리지 (地理誌)와 지도를 찬수 (撰修)하게 하였다. 11월에는 춘추관 (春秋館)에서 『문종실록 (文宗實錄)』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 (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 (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 (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 (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 (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7월에 조선단군 (朝鮮檀君)의 신주 (神主)를 조선시조단군 (朝鮮始祖檀君)의 신위 (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 (後朝鮮始祖) 기자 (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 정하였다.
1457년 정월에 비로소 원구단 (圜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이 해 6월에 상왕 (上王)이 사육신의 모복사건 (謀復事件)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 (降封),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다.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錦城大君) 이유(李瑜)가 노산군 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신숙주 (申叔舟)·정인지 (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 (奏請)에 따라 이 해 10월에 사사 (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1458년에 호패법 (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 (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 해에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수하였다.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 (治法) · 정모 (政謨)를 편집,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뒤 『동국통감 (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했는데 이는 전대 (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따라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최항 (崔恒) 등에 명해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 (一代)의 전장 (典章)인 『경국대전 (經國大典)』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 (戶典)을 반행 (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 (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 (武備)에 더욱 유의, 1462년에 각 고을에 명해 병기 (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 (諸邑) · 제영 (諸營)의 둔전 (屯田)을 성적(成籍)시켰다.
1464년에는 제도 (諸道)에 군적사 (軍籍使)를 파견해 장정 (壯丁)의 군적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1466년에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 (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 (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 (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 (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시직 (時職) · 산직 (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 (科田)을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 (職田制)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 (帥臣)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 (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 대납 (貢物代納)의 금령 (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 (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 (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또 문화 사업으로서 『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 · 『주역구결 (周易口訣)』 · 『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 · 『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 · 『대장경 (大藏經)』의 인쇄와 태조 · 태종 · 세종·문종의 어제시문 (御製詩文)을 편집, 발간하였다.
외국과의 관계로는 왜인(倭人)에게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하였다.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다. 즉, 양산군 (楊山君) 양정 (楊汀)이 정난 (靖難)의 원훈 (元勳)으로서 북변 (北邊)의 진무 (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인산군 (仁山君) 홍윤성 (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며 제 가신 (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했는데도,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정치 운영에 있어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 (下意上通)’보다는,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 (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 (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 (直啓制)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어린 단종 때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 직계제로 대체,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중신 (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고자 한 목적에서였다.
1456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학문 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다.
때문에 국정의 건의 규제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된 반면, 왕명의 출납기관 (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소관의 사무 외에도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 때문에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다. 즉, 신숙주 · 한명회 · 박원형 (朴元亨)·구치관 (具致寬) 등 정난공신 (靖難功臣)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여하였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 중심으로 운영했으므로 정부의 중요 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 (兼禮判)으로, 군사통 (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 (兼兵判)으로, 재무통 (財務通)인 조석문 (曺錫文)은 겸호판 (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 (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여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승정원 기구는 점차 강화되고 이러한 추세 하에서 1468년에 원상제 (院相制)가 설치되었다.
원상은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 (三重臣: 신숙주 · 한명회 · 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 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 (傳位)하고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조 대의 정치는 실행 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했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 정치는 왕권 강화 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만, 정치 발전 면에서는 세종 · 성종의 문치대화 정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 상훈과 추모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조 (世祖)이다. 능호는 광릉 (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 능묘
능은 경기도 양주 (楊州)의 광릉 (光陵)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 묘호 및 시호
묘호는 세조 (世祖)이며 빈청에서 세조의 묘호로 신종 (神宗), 예종 (睿宗), 성종 (聖宗)을 추천했으나,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들어 세조를 제안하였고 이대로 정해졌다.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 (承天體道烈文英武)이고,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다.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 사상과 신념
- 육조직계제
그는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서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의정부 서사제나 6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의정부 좌, 우찬성-> 삼정승을 거쳐서 왕에게 하달되던 것을 왕이 직접 6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에게 안건에 대한 결재를 받고 직접 인사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 공신 견제
사육신의 숙청과 생육신 등의 축출로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자 그는 재야에 있던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들의 월권행위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것과 홍윤성 처벌에 소극적인 것 등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 수종사 복설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접한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 발심하여 절터에 절을 복원케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종사는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만큼이나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
- 무속 신봉
유교사회에 속했으면서도 그는 무속과 불교를 신봉하였다. 왕위찬탈을 모의하고 있던 수양 대군이 하루는 시중의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글자판, 한자로 판을 놓고 글자로 점을 치는 점쟁이를 만났다. 수양대군은 아무 생각없이 밭전(田)자를 고르자 점장이가 ‘허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왕이 많은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놀란 수양대군은 무슨 얘기인지를 물어본 즉, 밭전자는 임금 왕 (王)자 두개를 수평과 수직으로 겹쳐놓은 글자라는 것이다. 얼마 후 수양 대군은 다시 점장이를 찾아 똑 같이 밭전자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점장이가 ‘첩첩산중’이라고 예언하였다. 다시 궁금증이 생긴 수양대군이 점장이에게 이유를 묻자 뫼산 (山)를 사방으로 겹쳐놓은 것과 같은 글자이므로 산중의 산, 첩첩산중이라는 것이다. 점장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의심한 수양 대군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요량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시 점장이를 찾아가 칼 끝으로 다시 밭전(田)자를 골랐다고 한다. 죽음을 느낀 점장이는 말없이 밭전자의 좌우를 치더랍니다. 밭 전 (田)자에서 좌우를 없애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 그리고 좌와 우를 치우라고 예언했는데 이에 크게 깨달은 수양대군은 좌와 우를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판단, 좌의정 김종서와 우의정 정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 논란과 의혹
- 사육신에 대한 가혹한 숙청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인 성균관사예 (司藝) 김질이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를 알리고 함께 세조를 찾아와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즉시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사육신을 친국하였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몇번에 걸쳐 공신에게 노비, 관비로 분배된 이들은 세조 말년부터 서서히 석방되었고, 중종 때에 가서는 사림파에 의해 사육신의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도 했다.
- 회유와 박팽년의 조롱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하위지에게도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것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위지 역시 그의 회유를 뿌리쳤다.
세조는 여러번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 (進賜)라 하고 상감 (上監: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 (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보니 신하 신 (臣)이 아니고 클 거 (巨)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 · 하위지 · 유성원 · 이개 · 김문기 (金文起) · 성승 · 박정 · 권자신 (權自愼) · 송석동 (宋石同) · 윤영손 (尹令孫) · 이휘 (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박팽년은 혹독한 형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에게 상감, 주상이라 하지 않고, 진사 (進賜), 나으리 (羅阿里)라고 불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 (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 (大年)과 아들 헌 (憲) · 순 (珣) · 분 (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하위지 역시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 (鞫)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산 세조는 여러번 하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하위지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한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 (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 (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 (琥)와 박 (珀)도 연좌 (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 (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 … ”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 사육신의 유래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김문기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 (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 (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 평가와 비판
- 긍정적 평가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
건국 초기라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개국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토지법을 시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밖에 호불 (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 부정적 평가
계유정난을 명목으로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문종의 의관 전순의(全循義)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다시 복귀받았으며 수양이 왕이 된 이후에 일개 의관 신분으로 일등공신으로까지 책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을 주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가지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 (단종의 어머니. 단종을 낳은지 3일만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의 능을 파헤치고 부관참시하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지나치게 공신에 의존하는 정치를 펼쳐 공신들의 무법천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의 재산을 배앗고 온갖횡포를 일삼아도 처벌받는 공신은 없었고 세조가 죽을때까지 공신견제에 실패한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무마시킨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공신들을 대부분 토사구팽하여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훈구파 세력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의상 (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과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과 관련해서 치적도 있지만 실책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 시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저자: 조선 세조)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 夜中聞松風
뚫린 창 너머로 별을 헤아려 본다 / 穿窓見天星
탄식한다. 나의 노둔한 재질을 / 歎我駑劣才
학업에 진력한들 어이 능히 이루랴? / 服業安能成
한없는 고요 속에서 박명을 알지만 / 窮靜知薄命
그 누가 이 심정을 위로해 주리 / 誰能尉此情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의 사람들을 / 我懷古之人
행하신 바가 성실 않음이 없네 / 所用無不誠
성실은 도를 행하는 방법 / 誠以履道方
옛 것을 익혀서 더욱 정진하리라 / 業故用彌精
큰 근본이 잘 정해져야 / 大原旣克定
온갖 인재들이 많은 영화를 누리리라. 百才享多榮
○ 저서와 작품
- 저서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석보》(1459)
《역대병요》 (歷代兵要)
- 작품
공주 마곡사 영산전 현판
세조 친필수결의 용문사 면세 교지(보물 729호)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현판(보물 제140호)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