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5년 12월 2일, 스페인을 군사강국으로 만든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Gonzalo de Córdoba, 1453 ~ 1515) 별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Don 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Duke of Terranova and Santangelo) 간단하게 알려진 이름은 곤살로 데 코르도바 (Gonzalo de Córdoba, 이: Consalvo di Cordova, 1453년 9월 1일 ~ 1515년 12월 2일)는 산탄젤로와 테라노바 공작이다.
스페인 왕국의 장군으로 반세기 만에 스페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대장군이라 불리는 존칭을 받았다.

–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Gonzalo de Córdoba)
.출생: 1453년 9월 1일, 스페인 몬티야
.사망: 1515년 12월 2일, 스페인 로하
.묘지: 스페인 그라나다 산 제로니모 수도원
.국적: 스페인
.부모: 엘비라 드 헤레라, 페드로 페르난데즈 드 코르도바
.배우자: 루이사 만리케 드 라라 (1489년–1515년)
.자녀: 엘비라 페르난데즈 드 코르도바 등
곤살로는 1507년까지 나폴리의 총독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공적이 매우 컸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의 질시와 의심을 초래했다.
1504년 이사벨 1세의 죽음은 곤살로에게 있어 신뢰할 수 있는 후견인의 상실을 의미했다.
곤살로는 공공기금에서 군대와 자신의 급료를 위해 꺼내 썼지만, 그 관리는 등한시했다.
페르난도 2세는 이것을 절호의 구실로 삼아, 곤살로를 해임시키고, 그 후 어떠한 직책에도 임명하지 않았다.
1515년 곤살로는 스페인의 로하에서 사망했다.
역사학자의 일부는 1503년 체리뇰라 전투에서 보인 화력과 참호의 조합을 평가해 그를 “참호전의 아버지” (the Father of Trench Warfare)라고 불렀다.

○ 생애 및 활동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공동으로 재위하고 있는 에스파냐 중흥기의 명장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때 이사벨 측에서 종군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때의 커리어를 시작해서 레콘키스타 말기에 당시 무어인들의 마지막 남은 거점인 그라나다를 공략하는데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엘 그란 카피탄 (El Gran Capitán)이라는 칭호도 수여 받았다. 이후에도 1499년에 에게 해의 패권을 두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스페인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해 오스만 제국의 에게해 해안 요새였던 세팔로니아를 기습 공격하여 탈취하여 이미 전쟁에서 크게 지고 있었던 베네치아가 그나마 남아 있는 발칸 반도 서부의 거점들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성기는 바로 1494년 부터 1559년 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를 두고 터진 합스부르크 가문과 발루아 왕조의 이탈리아 전쟁 중 1503년에 일어난 체리뇰라 전투이다.
체리뇰라 전투는 근대 유럽 전쟁사의 패러다임 변화를 제시한 중요한 전투였다. 파비아 전투가 밀집 창병대와 총병대가 적절히 조합된 부대가 중세의 중갑기병대를 격파할 수 있다는걸 입증해주고 총의 가치를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린 의의가 있다면, 그보다 20년 전에 스페인은 체리뇰라 전투를 비롯한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의 전장에서의 경험으로 적의 군대 자체를 격파하는것 보다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여 군세를 흔들어 놓는 전략적 게릴라전, 화약무기 중심의 군 편제 개혁, 참호나 터널을 비롯한 야전 축성과 전투 공병의 전술적인 기용, 그리고 보병, 총병, 포병, 기병의 유기적 연계를 성립했으며, 아직 대규모 기사단 중심의 중세적 전술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유럽 군대보다 한층 더 세련 되고 복합적인 전술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탄생하게 되었다. 1502년,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은 남부 이탈리아라는 거대한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을 같이 침공하여 분할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 분할 약속이 당연하단 듯이 깨지면서 당시 실제로 현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일한 스페인 야전군의 사령관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본국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1502년에서 다음 해 봄 까지 이탈리아 반도 동남부의 바를레타 성에서 농성을 벌였다. 가을과 겨울 내내 스페인군을 성 밖으로 끌어 내어 야전에서 궤멸 시키기 위해 프랑스군은 코르도바를 도발하였고, 자신의 병사들도 성 안에만 처있으며 불만에 차 있었으나 코르도바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성 밖에 나가지 않는 대신 레콘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나 동유럽의 발칸 전역에서는 흔했으나 나머지 유럽에서는 생소한 전략이었던 소수의 경보병이나 경기병만 데리고 번개 같이 야습을 걸어 보급 물자를 훔치거나 파괴한 뒤 다시 요새로 돌아오는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가볍고 경쾌한 기동성을 지닌 병력을 중심으로 대규모 회전보다 지속된 기습, 약탈, 방화, 농지나 물자 파괴를 통해 전략적 차원에서 적의 전쟁 지속 능력을 뒤 흔드는 유격전이 이베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두 지방 모두 유럽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세력과 직접적인 땅을 맞대고 있어 적대적인 현지 무슬림 주민들과 기독교 유럽인 주민들 사이에 본격적인 전면전이 아니라도 이런 식으로 끝임없이 서로의 마을을 습격하고, 농작물을 약탈하다가 기회가 되면 순식간에 쳐들어가 싹 다 죽이거나 불태운 뒤 돌아 오는 식으로 전쟁과 일상이 깊게 연결 되어 있으며 현지 사회상은 일종의 영구 전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상대편의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사보타주 하는 식의 전술이 크게 발달했다 [다만 이베리아 반도는 레콘키스타의 확장과 종결로 이런 모습이 점차 사라졌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헝가리, 우크라이나, 발칸 반도 일대의 평야 지방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권이 결정적으로 약화될 때까지 200년에 가까운 영구 전쟁 상태에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코사크 또한 이리하여 원래 구체적인 구심점이 있는 민족, 정치 집단이 아니라 저런 장기적 어려움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상호 보호의 차원에서 반 군사화 된 유목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생겨났다}.

이러다가 1503년 봄, 오트란토 해협에서 스페인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사이의 해로를 확보하여 바를레타의 그란 카피탄에게 2,000명의 독일산 란츠크네히트 지원군이 도착하자, 농성 내내 게릴라전에 시달렸던 프랑스군이 군세를 못 추스리고 있을 사이 재빠르게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와 인근의 체리뇰라 마을을 점령했다. 당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이 죄다 후퇴했다는 걸 알고 추격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군대를 배치하기 위해 그란 카피탄은 기병들에게 모두 보병들을 가능한 한 많이 같이 말에 태워 이동하라고 명령했는데, 기마전을 여전히 귀족의 전유물로 여기는 기사도가 전장의 문화를 지배했던 당시 군대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모욕적인 주문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란 카피탄은 아예 본인이 말 없이 솔선수범하여 걸어 가던 보병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자기 말 위에 같이 태운 뒤 행군을 계속 하자 나머지 병사들도 군말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전술적인 차원을 넘어 전쟁 기계로서의 군대와 이를 지배하는 군사 문화의 차원에서 시대를 앞서나간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쨋든 발에 불 붙게 움직여 프랑스군을 따돌리고 체리뇰라 마을 앞에 도달하자마자 그란 카피탄은 전선 중앙에 긴 참호를 파고 여기에 뾰족한 나무 꼬챙이를 박아 대기병 야전 진지를 구축한 뒤 군대의 주력이었던 총병들을 집어 넣었고, 스페인군이 자리 잡은 고지의 정상에 페드로 나바로의 대포들을 배치한 다음, 파이크로 무장한 란츠크네히트와 스페인 보병들은 참호 뒤의 예비대로 깔고, 본인은 중기병을 이끌고 후방에 자리를 잡은 뒤 마지막으로 경쾌한 기동력과 끈질김, 투지로 이름 높았던 히네테 투창 경기병을 미끼로 본진 앞에서 적을 유인하게 했다.
그란 카피탄이 가까스로 방어진을 다 구축하기가 무섭게 프랑스 군은 급히 좇아 와 스위스 용병과 프랑스 기사단을 중심으로 스페인군에게 정면 공격을 가했다. 육중한 갑옷에 랜스를 끼고 돌격을 준비하던 프랑스 기사들은 갑자기 땅 아래에서 스페인 총병들이 튀어나와 언덕 위의 대포들과 함께 일제 사격을 퍼부어버리자 당황하여 퇴각하였고, 다시 스페인군의 우익, 중앙, 우익을 이리 저리 찔러 보았으나 프랑스 기병들이 접근 할 때 마다 스페인군은 사격을 퍼 부은 후 뒤에 있던 파이크와 검으로 무장한 보병대를 전방으로 내세워 프랑스 기사들의 공격을 완전히 방어해냈고, 이 과정에 프랑스군의 지휘관이었던 네무르 공작 루이 달마냑이 총격을 맞고 전사하여 현존하는 기록 중 최초로 화약 무기를 맞고 전사한 유럽의 고급 지휘관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사단의 공격이 모두 좌초되고 사령관 마저 죽어버려 군대 자체가 와해 될 위기에 처하자 스위스 용병대장이 지휘권을 잡아 스위스 장창병과 남아 있는 가스코뉴 보병대의 일제 진격을 명했는데, 스페인군의 대포 20문 보다 두배 많은 40문의 대포를 비롯, 잘 무장된 프랑스군 후방 예비대가 미쳐 도착하기 전에 공격에 나서버린 것이 되어서 일이 제대로 틀어졌다. 스위스 장창병들이 요새화 된 스페인 군 중앙에 쇄도하자, 그란 카피탄은 총병대를 모두 빼내고 스페인 보병과 란츠크네히트 창병들을 전면에 보내 스위스 용병들과 교전하는 사이, 참호에서 나온 총병대들을 스위스 보병 양 측면으로 보내고 다시 일제 사격을 가하며 포위하고, 마무리로 본인이 직접 이끌던 스페인 기사단으로 남은 프랑스군을 덮치자 전의가 완전히 무너진 프랑스군은 그나마 정예병의 뚝심으로 어느 정도 질서정연하고도 신속하게 퇴각한 스위스 용병대를 제외하고는 무질서하게 전장을 이탈하다가 뒤따라온 히네테 경기병들에게 도륙되었다. 그 와중에 저 뒤늦게 도착한 나머지 프랑스군의 후방 부대도 목전에서 혼비백산하게 도망치는 아군과 쇄도하는 스페인 추격대 사이에 섞여 와해 돼 버렸다.
전투가 시작 했을 때 스페인은 6,000명 정도, 프랑스군은 그 9,000명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군의 손실은 200 명정도 밖에 안 되었고, 프랑스군은 전군의 반에 가까운 4,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의 세력은 이 전투로 인하여 완전한 수세로 전환해야 했으며, 그해 말 12월의 가릴리아노 다리 전투에 다시 한번 그란 카피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대패를 당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당했다. 이후로도 프랑스는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계속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충돌을 반복했으나, 1550년대 펠리페 2세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며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 당한 이후 18세기 까지 나폴리와 시칠리아라는 지중해 복판에 있는 부유하기 그지 없는 노른자위가 스페인에게 일방적으로 넘어 가는걸 지켜 봐야했다. 당시 유럽에 생소했던 게릴라성 유격전, 유리한 거점을 점거하여 적에게 불리한 공격을 강요하는 진지전, 화약 무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 참호나 대기병 바리케이드 등의 야전 축성과 전투 공사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이걸 모두 묶어 주는 기병, 보병, 총병, 포병의 유기적인 배치와 운용, 즉 중세 전장의 모습을 영원히 바꾸어 버린 근세 유럽의 군사적 혁신 중 상당수가 이 전투 하나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체리뇰라 전투를 두고 현대 유럽 군사학계는 이 사람을 참호전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게다가 비단 전술적인 면을 넘어 체계적인 보급 체계, 장교단 육성, 장병 복지, 야전 공병대의 중용 등 당시 유럽에서는 여전히 미비했던 전략적 차원의 군 지원 체계의 바탕을 닦아 놓아 16 ~ 17세기를 걸쳐 스페인이 자국의 통치령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밀라노에서도 1,000킬로나 떨어진 플랑드르 전역에 5 ~ 8만 가량의 대규모 상비군을 항상 주둔 시켜 놓고,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라는 걸출한 적들을 상대로 삼면 전쟁을 80년 동안이나 지속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파리를 위협하거나 신생 네덜란드의 운명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게 한 스페인의 군사적 인프라의 초석을 놓았다.
단적으로, 단순히 해당 원정 때만 쓰고 버리는 임시 주둔지가 아닌 장기적인 군대의 거주를 위한 막사를 포함하여 야전 병원, 민간들이 사는 도시와 가깝게 연계된 전략적 군 기지, 전근대 군대의 행군 속도를 끔찍하게 느리게 했던 기나긴 보급 행렬을 대신해 현지 상인들에게 그때 그때 재보급을 받는 선불 지원 체계 등이 이 당시 스페인군에서 처음 개발하여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게도 퍼진 것이다.

○ 평가
곤살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당대 초일류의 장군이었다.
패배를 겪었던 것은 세미나라 전투 한 번 뿐이지만, 거기서 그는 교훈을 얻어 다음 전투에 반영했다.
체리뇰라 전투는 야전축성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중장기병을 야전에서 화력으로 격파한 초기의 전투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를 화력전의 선구자로 보는 견해는 정확하지는 않다.
체리뇰라에서 곤살로가 중시한 것은 포병의 일제사격이었고, 총병에게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아르케부스 병사가 막시밀리안 1세가 파견한 독일인 용병이란 사실이 이를 나타낸다.
승리의 원인은 야전축성에 의해 적을 공성전으로 끌어들인 것에 있고, 이것은 레콩키스타에서 공성전의 경험을 쌓은 스페인 군에 있어서 최적의 전술이었다.
공성전에서 화기는 이미 일반적인 무기가 되었고, 화기는 아니지만 크로스보우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체리뇰라 이후, 스페인군에서 중간을 차지하던 총병의 비율은 증가했으나, 이것은 적인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전술면에서도 야전축성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16세기 전장은 참호를 끼고 양군이 서로 바라보는 광경이 여러 차례 보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는 것은 17세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등장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곤살로의 개혁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코로넬리아는 이윽고 테르시오로 변화했고, 테르시오는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최정예의 집단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가 장교의 숫자를 늘린 것도 중요했다.
장교 숫자의 증가로 부대의 유연성을 높이는 방법은 유럽에서 일반화되었을 때 각국에서 사관학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건설한 카를 5세의 군대를 이끌던 장교들은 이런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곤살로는 16세기 스페인 번영의 씨앗을 뿌렸던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