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8년 12월 17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 (Henry VIII, 1491 ~ 1547) 파문
1538년 12월 17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 (Henry VIII, 1491 ~ 1547)를 파문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 (Henry VIII, 1491 ~ 1547)는 1534년 왕위지상령으로써 ‘잉글랜드교회를 치리하는 자’는 왕임을 선포한다.
1534년 11월에 통과된 수장령은 잉글랜드교회의 수장은 군주임을 밝혔다.
동시에 영국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국왕도 속인이라 보고 아무래도 속인이 교회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상징했던 권력이 머물 곳은 단 한 군데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잉글랜드교회의 상징적인 지도자는 영국 국왕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헨리는 수장령을 발표하여 그는 왕이 ‘정당하고 적법하게’ 교회의 수장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몇몇 법률이 더 통과되었다.

1534년 성직임명법을 반포하여 국왕에 의해 지명된 후보만이 주교로 착좌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534년에 국왕지상법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으며,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이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승인하였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왕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하고 무자비한 권리 침해이자 강요”라고 주장해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파문에 응대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종교정책 이외에도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반왕실, 반체제적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는 한편 울지,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의 공신 (功臣)들과 왕실의 시종들을 공개 처형하였으며 왕실과 왕의 왕권강화, 전쟁, 이혼, 종교 문제를 비판하는 문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성곽의 개보수와 병력 확충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몇 차례나 대륙에 출병하였다.
절대왕정을 더욱 강화하였고 지방과 조정의 대소사를 왕이 직접 결재, 관장하였다. 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 (所領, 영유하고 있는 땅)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이런 가운데 교황 바오로 3세 (라: Paulus PP. III, 이: Papa Paolo III)는 제220대 교황(재위: 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으로 비록 프로테스탄티즘 자체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그에 맞서 가톨릭 개혁의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는 평이다.

바오로 3세가 교황좌에 오른 당시는 1527년 로마 약탈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알프스 이북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존립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 개혁 운동이 한창 유행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였다.
교회 쇄신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진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실제로 교회 안의 여러 부분에서 폐해가 많아졌기 때문에 교회 쇄신이 무엇보다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바오로 3세가 교황이 되면서 당면한 최대 화두는 교회 쇄신으로 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로 3세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회를 쇄신하는 문제에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1536년 6월 2일에는 이듬해인 1537년에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알리는 교황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개신교 교도들에게도 공의회에 참석하라고 초대하였다.
그는 모든 참석자들이 이 공의회의 결론을 수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도들이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독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교황의 초대장을 개봉도 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개신교 교도들의 참석을 설득하기 위해 공의회 개최가 연기되는 동안 공의회 주최지인 만토바의 공작마저 점차 공의회 개최를 만사에 제쳐두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하여 만토바 공의회 계획은 완전히 폐기되어 버렸다.
1537년 6월 2일 바오로 3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인 인디언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유럽 군주들의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단죄하는 내용을 담은 교황 칙서 ‘하느님의 초월성’ (Sublimus Dei)을 공포하였다.
1536년, 바오로 3세는 학식으로 보나 신앙심으로 보나 뛰어난 면모를 갖춘 아홉 명의 고위 성직자를 초빙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재건을 위한 일련의 보고서를 작성케 하였다. 1537년 그들은 《교회 쇄신에 대한 의견》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바오로 3세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교황청과 교회 행정 및 성당에서 집전되는 전례 행위에서 교회 권력의 남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으며, 이러한 권력 남용을 철폐하기 위한 대담하고 솔직한 수많은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 보고서는 로마에서뿐만이 아니라, 스트라스부르크와 기타 다른 지역에서도 인쇄되었다. 이 안건들은 나중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바오로 3세는 수도회 쇄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주교의 관할 교구 상주의무를 강화시켰다.
바오로 3세는 마침내 1538년 12월 그는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파문을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에게 선고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