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6월 20일, 네덜란드의 항해사이자 탐험가 빌럼 바런츠 (Willem Barentsz, 1550년경 ~ 1597) 별세
빌럼 바렌츠 (Willem Barentsz, 1550년경 ~ 1597년 6월 20일)는 네덜란드의 항해사이자 탐험가였다.
유럽의 북쪽을 탐험하는 데에 많은 일을 했다.
바렌츠 해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북쪽 항로개척의 기초 마련
아시아와 무역하고 싶었으나 포르투갈에 막혔던 16세기 상황에서 네덜란드와 영국 탐험가들은 끊임없이 새항로 개척에 나섰다. 영국 왕실과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보조금과 상금을 내걸었다. 영국은 캐나다 쪽에서 북극을 통과하는 북서항로를, 네덜란드는 북해에서 계속 북쪽으로 항해해 북극에 이르는 북동항로를 노크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는 당연지사고 실종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혹독한 추위 탓이다.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이며 탐험가·무역선장 출신 빌렘 바렌츠 (Willem Barrents)의 1596년 3차 탐험도 그랬다. 따뜻한 계절의 항해를 위해 5월 중순에 출항, 북위 74도 선까지 비교적 순항했으나 7월 초순께 배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빙하와 유빙에 걸린 배는 시간이 갈수록 얼음에 조여들었다. 결국 바렌츠 선장은 얼음에 갇혀 쪼개지는 배를 포기하고 육지로 짐과 필수품을 날랐다.
네덜란드 (북부 7개주 연합)에서도 바렌츠의 항해는 명운을 건 프로젝트였다. 바렌츠 선장은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제도 (諸島)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이듬해인 1595년 2차 항해에서는 마우리츠 총독의 지원 아래 5척의 선단을 지원받기도 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와중에서도 국가적 지원을 받았던 2차 탐험은 이상 저온 현상으로 실패.
국가의 지원 없이 암스테르담 상인들의 후원으로 2년 만에 재개된 3차 탐험에서도 바렌츠는 확신이 있었다.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에 따라 북극해 어디인가에 얼지 않는 바다가 있다고 여겼다. 굳이 북위 90도, 즉 북극점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중국의 동쪽에 도달할 항로의 존재를 믿었던 것. 막상 바렌츠 일행 앞에 나타난 겨울과 추위는 모든 걸 얼렸다. 바다는 물론 배까지.

바렌츠 선장 일행은 육지의 동토에 올랐다. 배의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지은 일행은 식량이 떨어지자 1년여 동안 북극 곰 3마리와 여우 26마리를 잡아 먹으며 버텼으나 대원 2명을 잃었다.
바다의 얼음이 풀린 이듬해 초여름, 4m짜리 소형 보트 두 척에 나눠 타고 귀로에 나선지 일주일 만인 1597년 6월 20일, 쇠약해진 바렌트 선장도 숨을 거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5·10·20유로짜리 동전에 영원히 살아 있다.
덮개도 없는 소형 보트에서 북극해를 떠다니던 바렌츠 선장의 남은 일행은 8월 중순, 러시아 어부들에게 구조돼 11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항해 도중에 3명이 추가로 죽어 바렌츠와 한 배에 올랐던 17명 중에 12명만 돌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바렌츠 탐험대는 네덜란드에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줬다고 한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목숨을 버려도 화물은 지켰다’는 것이다.

바렌츠 선단의 선원들은 위탁화물을 온전한 상태로 화주에게 돌려줬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가면서도 투자자들이 맡겼던 옷과 약품 등 위탁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
○ 바렌츠, 북극항로 실패했지만 신용사회 개척
.북극해에서 극한 겨울 보내며 고객 위탁물 보호…네덜란드 무역에 신뢰 심어
16세기초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열었지만, 그 길은 멀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조금더 빠른 길이 없을까.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북극 항로는 유럽에서 시베리아 북쪽으로 지나 동쪽 베링 해협까지 가는 북동항로와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가는 북서항로로 나뉜다.

런던에서 이 뱃길을 거치면 1만2,8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만3,600㎞이다. 파나마 운하는 생각하지도 못한 시절이었으므로 이 항로는 꿈같은 항로였다.
유럽인들의 북극항로 개척은 대항해시대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497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가 존 캐벗에게 북서 항로를 찾으라고 명한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자크 카르티에 (1534년), 마틴 프로비셔 (157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1578년), 존 데이비스 (1585년)가 대서양, 혹은 태평양 쪽에서 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다가 모두 실패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비해 신대륙과 대양 항로 개척에 뒤늦은 네덜란드는 북극 항로에 논독을 들였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네덜란드 항해가이자 지리학자인 빌렘 바렌츠 (Willem Barentsz, 1550~1597)였다.
바렌츠는 1594년, 1595년, 1596년 세 차례에 걸쳐 북극항로 개척에 나섰다. 그는 북극해가 24시간 햇볕이 내리 쬐기 때문에 바다가 얼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시베리아 북쪽의 바다를 항해하면 인도로 갈수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탐험은 1594년 6월에 시작되었다. 3척의 배는 네덜란드를 출발해 노르웨이를 지나 시베리아 북쪽 카라해 (Kara Sea)로 들어갔다. 7월, 그들은 북극곰을 만나 쏘아 죽였다. 곰을 암스테르담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곰 한 마리를 생포해 배에 실었다. 하지만 배에 갇힌 곰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총살해야 했다. 일행은 노바야젬랴 (Novaya Zemlya) 섬 서쪽 해안에서 커다란 빙산에 막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탐험은 네덜란드 왕족 오렌지 공작이 적극 추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공작은 바렌츠의 1차 탐험에 흥분해 자금을 대며 배에 물건을 가득 실어 중국에 가서 교역하고 오라고 했다. 6척의 배로 구성된 탐험대는 우랄산맥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카라해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를 만나 되돌아가야 했다. 두 번의 항해 모두 노바야젬랴 섬을 넘어서지 못했다.
두 번째 항해가 실패하자 네덜란드 국가수반은 더 이상 북극항로 개척에 정부 지원이 없다고 못 박았다. 다만, 북극항로를 개척한 자에게는 엄청난 보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이번엔 암스테르담 상공인들이 돈을 대서 배 2척을 구입해 바렌츠를 탐험대장으로 임명했다.
1596년 6월에 출발한 3차 원정에서 바렌츠는 노르웨이 북부에서 동쪽으로 돌지 않고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의 해안을 따라 올라가니 얼음덩어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항해해 노바야젬랴 섬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앞서 두 번의 항해에서 이 섬의 북쪽을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배를 이끌던 얀 라이프 (Jan Rijp) 선장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노바야젬랴의 남쪽을 돌았다. 둘은 갈라서 다른 길을 항해하기로 했다.
바렌츠는 노바야젬랴 섬 북쪽을 돌아 나아갔지만,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에 갇히게 되었다. 선원수는 16명, 심부름하는 소년 사환까지 모두 17명이었다.
움직일수 없게 된 바렌츠 일행은 배에서 내려 섬에 상륙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지었다. 식량은 배에서 날라 왔다. 식량이 모자랄지도 몰라 그들은 북극여우를 사냥해 고기를 보충했다. 물은 얼음을 녹여서 해결했다.
북극해의 겨울은 살인적이었다. 북위 75°가 넘는 곳에서 바렌츠 일행은 오두막에서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난로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어도 등에 서리가 하얗게 덮였다. 난로에 발을 올려 놓으면 양말이 탔지만, 발은 데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돌을 달구어 등을 녹이면서 정말 용케도 2명만 빼고 살아 남았다. 사환도 죽었다.
그들은 기나긴 겨울을 보냈다. 봄이 왔지만, 배는 부서져 항해를 할수 없었다. 이듬해 6월이 다가왔는데도 얼음이 녹지 않아 배는 움직이지 못했다.
1573년 6월 13일 살아남은 자들은 두 대의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갇혀 있던 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바야 젬랴를 탈출한지 1주일 때 되던 6월 20일 바렌츠튼 끝내 운명을 다했다. 영양 부족으로 쇠약해진 바렌츠는 이름도 없는 한 얼음 섬에서 눈을 감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식량을 바다에 잃고 몇 주일을 추위와 굶주림과 괴혈병에 시달리다 러시아 어부들을 만나 식량을 구했다. 그 뒤로 그들은 1,000km 가까운 거리를 노를 저어 무르만스크 근처 콜라 반도에 있는 한 대피소에 이르러, 네덜란드 구조대를 만났다. 그 구조대의 선장은 3차 항해을 떠나 다른 길로 떠난 얀 라이프 (Jan Rijp)였다.
빌렘 바렌츠는 북극항로 개척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무역거래에 신뢰라는 것을 안겨주었다.
바렌츠 일행은 빙하에 갇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8개월을 버텼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선원들이 죽어 가는데도 바렌츠는 고객들의 화물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부하 선원들은 선장의 명령을 따랐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소문으로 네덜란드 배의 수요가 폭증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양무역대국으로 성장하며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 네덜란드는 바렌츠가 보여준 신뢰를 토대로 성공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상설시장과 거래소를 열었고, 영국보다 먼저 자본주의를 꽃피웠다.
바렌츠 일행이 겨울을 보낸 나무오두막집은 170년이 지난 1871년에 노르웨이 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오두막집에서 발견된 지도에는 그들이 지난 뱃길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고, 기상학 자료들이 꼼꼼히 수집되어 남겨져 있었다.
그후 헨리 허드슨 (1607), 세멘 데즈네프 (1648) 등이 바렌츠가 만든 해도와 기상 자료를 토대로 북극 항해에 나섰다.
북동 항로는 바렌츠가 죽은 뒤 280여 년이 지난 1879년 스웨덴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처음 개척했다. 그후 1920년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북동 항로 두 번째로 통과했다.
바렌츠 일행이 1596 ~ 1597년 겨울을 보낸 바다를 바렌츠 해 (Barents Sea)라고 명명되었다. 최근 러시아가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노력이라기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 바다가 녹았기 때문이다. 바렌츠의 시대는 소빙하기 (Little Ice Age)였다. _ 2019.6.18 (아틀라스)

참고 = 위키백과, 아틀라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