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년 9월 22일, 중국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 (李自成, 1606 ~ 1645) 출생
이자성 (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은 중국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군 지도자이다. 아명은 이홍기 (李鴻基)이며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 영창제 (永昌帝)
.휘: 이자성 (李自成)
.별호: 아명은 이홍기(李鴻基), 불교 법호는 순틈(順闖)
.출생: 1606년 9월 22일, 명나라 산시성 미지현
.사망: 1645년 5월 17일(38세), 청나라 호북성 통성현
.왕조: 순나라
.가문: 순나라
.부모: 이수충
.배우자: 황후 1명, 후궁 1명
.자녀: 적출 아들 이자경(李自敬)
.종교: 불교
*제1대 대순 황제
.재위: 1644년 3월 13일~1645년 4월 24일
중국 명나라 말기와 명청교체기에 활약한 반란군 수장이자 순 (順)의 초대 황제이다. 별명은 틈왕 (闖王). 명나라와 청나라측에서는 역적이라는 뜻의 “틈적 (闖賊)”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집필한 명사에서는 틈적이라고 표기된다.
중국에서는 성을 합쳐 이틈왕 (李闖王)이라고 부른다. 별명을 해설하자면 틈이란 문 사이로 말이 뛰쳐나온다는 뜻으로 거칠고 용맹하다는 의미다.
장헌충과 함께 명말 민란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자성의 난으로 대순국을 세워 중원과 하북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청나라와 청에 투항한 오삼계의 반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산시성 출신으로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금 징수 역을 맡게 된 부친 이수충이 세수 부족을 메꾸다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명나라 조정에서 운영하는 역관에 들어가 역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나라 정부의 재정 악화를 이유로 역관들을 대거 폐쇄해버렸고, 실업자가 되어버린 역부들은 도적떼가 되어 약탈을 일삼았다.
이자성도 속해있던 역관이 폐쇄되어 실업자가 되었고, 군에 입대하였다. 하지만, 이때 명나라는 이미 극도로 쇠락하여 청과 대치중인 국경을 막기에도 급급해 이자성과 다른 비슷한 신세의 사람들이 속한 후방 부대들에 대한 보급을 할 수 없었으며, 봉급 또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서북 변경의 병사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대거 탈영하고, 소요사태를 일으키다가 나중에가면 도적이나 반란군이 되었다.
이자성의 이런 인생 역정은 명말 당시 민생의 파탄과 유적화라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때 이자성은 반란군 무리 중 하나인 틈왕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훗날 고영상이 죽자 그 세력과 “틈왕”이라는 별명을 계승받게 된다.

- 이자성의 난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청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명의 장군 원숭환이 청군을 늘 방어하여 왔으나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죽인 탓에 청군을 방어할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 틈왕 (闖王)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 (大順, 순나라)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하였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 (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 (煤山)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숭정제는 당시 향년 33세였다.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북경에 진입해 천명을 선포하였다.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철수한 이자성의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군은 청에 동관 (潼關)마저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 (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도중 갑작스레 병사하여 기회는 무산되었다.
- 말년
우창과 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군은 현재 호북 통산 (通山)인 통성 (通城)으로 퇴각하였다.
구궁산 (九宮山)에서 명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청세조실록》 (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탈출하여 호남성 상덕인 석문 (石門)에 소재한 협산사 (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평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반란수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한국,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자성의 난을 높이 평가하기 이전부터 이자성은 농민 출신 영웅, 한족민족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았다. 대만, 홍콩에서도 이자성이 주인공이 된 드라마-영화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이자성과 그의 군대인 대순군에 대한 전래설화가 상당히 많다. 틈왕 (闖王)이라는 칭호도 “관제”로 불린 관우나, “악왕”이라로 불린 악비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그를 영웅시하는 호칭인 것이다. 다만 실제 사후 황제로 추숭된 관우와 왕으로 추증된 악비와 달리 틈왕이라는 호칭은 별명에 가깝다.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이 인기의 주 요소 중 하나인데, 이런 점을 보면 명나라의 창업 군주인 주원장과 비슷하다. 망해가던 명나라를 끝장낸 성공한 반란군 지도자라는 점, 얼마 안되어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에게 패해 최후를 맞았다는 비극적인 행적도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기의 인물이라는 점도 있다.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에 반감을 가진 한족 민족주의, 청나라 관점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에 대한 비하 의식, 그리고 부패한 명나라에 대항해서 새나라를 만들어보자는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영웅으로, 마치 전봉준 같은 인물로 높이 평가된 것이다. 같은 단명 왕조인 신나라의 시조인 왕망과는 다른 평가다.
더욱이 대륙에서는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민중사관에 따라 농민반란이 대부분 높이 평가되었는데, 이자성은 홍승주의 관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고작 7명만이 남아 산속으로 도주했으며, 마오도 장제스에게 큰 타격을 입고 고난의 행군, 장정을 해야 했다. 또한 이자성의 거점은 섬서성이었으며, 마오의 홍군도 섬서성 연안에 자리잡았다. 이자성이 홍승주군이 숭정제의 명으로 요동으로 이동한 사이 부활한 것처럼 마오도 시안 사건으로 한숨 돌린후 농촌지역으로 파고들어 세력을 확장했다. 게다가 이자성군의 부대는 홍군의 삼대기율 팔항주의와 비슷하게 민폐를 못끼치게 하는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계 일본인 역사가 진순신은 이점을 이자성의 성공요인으로 보았다. 중국공산당 및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절로 이자성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북경에 입성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훗날 본인들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 “우리는 절대 이자성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마오쩌둥도 이자성을 존경했고, 본인의 재산으로 거액의 인세를 선불하여 소설가 야오쉐친으로 하여금 대하소설 ‘이자성’을 집필하게 했었다.
이자성은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와 중국 한족의 민족주의를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이자성에 관한 자료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 탓에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하여 신화화되고 윤색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도 부정하긴 어렵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