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7월 6일, 보헤미아 (Bohemia)가 종교의 자유 보장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Jan Hus, 1369년, 체코 후시네츠 ~ 415년 7월 6일, 독일 콘스탄츠) 순교 200년 후인 1609년 7월 6일, 보헤미아 (Bohemia)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보헤미아 종교개혁 (Bohemian Reformation, Czech Reformation, Hussite Reformation)은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보다 앞서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투쟁한 보헤미아 왕국 (체코)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었다.
200년 이상 중앙 유럽의 역사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근세의 종교적, 사회적, 지적 그리고 정치적 운동들 가운데서 중요한 하나로로 알려진다.
보헤미아 종교개혁은 로마 권위로부터 벗어난 첫번째 국가 교회를 만들었으며, 종말론적 신앙 운동과 평화주의 개신교 교회를 만들었다. ]
발도파와 롤라드 ( John Wycliffe)와 함께 보헤미안 종교개혁운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다.
가장 잘 알려진 보헤미안 종교개혁의 대표는 얀 후스였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후스를 화형에 처하자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프라하 대학교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 때에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으며 (그 전에는 성직자들에게만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후스가 살아 있을때 지지자들이 후스의 허락을 받아 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담은 성작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후스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에서 얀 젤리프스키 (Jan Zelivsky)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된다.
보헤미아 (Bohemia) 개관
보헤미아 (Bohemia, 독: Böhmen) 또는 체히 (체: Čechy)는 현재 체코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세 역사적 지방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체코의 서부와 중부 지역에 해당하며 면적은 52,750 평방 킬로미터, 인구는 약 6백 25만이다. 체코 공화국을 구성하는 또 다른 지방은 모라바와 체코령 실레시아인데, 이것은 역사적 지역 구분으로서 현대적인 행정 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보헤미아는 처음에는 체코 왕국의 정치적 중심이었고 점차 여기에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가 추가되었다.
이 지방의 명칭은 서슬라브 계통의 부족 명칭인 ‘체시’ (Češi)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코 사람을 남성은 체흐 (체: Čech), 여성은 체슈카 (체: Češka)라고 하며 복수는 체시 (체: Češi)가 된다. 이 표현은 현재 체코 공화국의 전체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보헤미아 지방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이 지역을 보헤미아 (Bohemia)라고 불렀다. 이것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 지역에 거주한 선주민인 보이오하이뭄 (Boiohaemum)이라는 켈트 계통의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