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7월 18일,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 ~ 1610) 별세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이: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 (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본명: Michelangelo Merisi (미켈란젤레 메리시), Amerighi da Caravaggio (아메리히 다 카라바조)
.출생: 1571년 9월 29일, 이탈리아 밀라노 카라바조
.사망: 1610년 7월 18일 (38세), 이탈리아 Porto Ercole
.직업: 화가
.예술 사조: 바로크, Italian Baroque, 바로크 회화, 르네상스
.부모: 부) 페르모 메리시, 모) Lucia Aratori
.스승: Simone Peterzano
.후원자: Francesco Maria del Monte
.주요 작품: Supper at Emmaus, Amor Vincit Omnia, Medusa, Basket of Fruit, The Fortune Teller, The Seven Works of Mercy, Self-Portrait as Bacchus (known as “sick Bacchus”, Bacchus, Annunciation, Judith Beheading Holofernes
.작품 전시 장소: 루브르 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우피치 미술관, 카피톨리노 박물관, 디트로이트 미술관 등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듬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 (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

○ 생애 및 활동
이탈리아의 화가로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고, 카라바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즉 ‘카라바조의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알려졌다.
본명보다는 이 출신지에서 따 온 카라바조라는 이명으로 주로 알려졌다.
유로화 도입 이전의 이탈리아 100,000리라에 삽화되기도 하였다.
카라바조는 1571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이 카라바조가 된 것은 양친이 베르가메 지방의 소도시였던 카라바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의 직업은 건축가 또는 석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얼마간 밀라노에서 살았으나 1576년 페스트가 밀라노를 덮치자 고향인 카라바조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 때 카라바조의 부친과 형제중 일부는 결국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페스트가 가라앉은 후 밀라노로 돌아온 카라바조는 미술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13살이었던 1584년에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간다.
페테르차노의 공방에는 1588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후 로마로 이주하는 1592년까지 4년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카라바조의 회화 실력은 로마에서 점점 유명해졌으며 16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로마의 많은 유력자들이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고 거액의 그림 주문을 받았다.
특히 로마의 고위 성직자들이 카라바조를 매우 아꼈는데, 당시 종교개혁으로 인한 세력 약화로 고전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의 인상적인 그림이 카톨릭의 세력 회복에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 새 시대를 연 예술가
일반적으로 화가 미켈란젤로로 통용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는 동명이인이며 1세기 후 태어났으니 그 이름을 땄을 확률이 높다.
인지도에서는 뒤지지만, 사실 카라바조 역시도 부오나로티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카라바조는 다채롭고 화려한 르네상스 회화들과 달리,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기법을 개척자였으며 그의 회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그의 회화 기법은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의 바로크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메두사, 유디트 등이 있다.
이처럼 엄청난 전환점을 마련한 거장임에도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 악행으로 점철된 사생활과 죽음
그의 생애는 가히 한 파란만장했다.
그는 비록 미술 측면에서는 인정을 받았으나, 한편으로 성격이 매우 불안정했던 탓에 가는 곳마다 시비에 휘말렸다.
이 때문에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하여 사형을 선고 받고 현상금이 내걸린 채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물론 도망 다니면서도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이 그를 폭행과 살해 혐의에서 사면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수습해주기 힘들 정도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나폴리로 도주한 이후, 몰타으로 건너가 몰타 기사단에서 수도자가 되려 했다고 한다.
로마 교황에게 사면을 받기 위해 몰타 기사단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성 세례자 요한의 순교 장면을 그린 성화로 몰타 기사단에게 인정 받게되나, 결국 또 사고를 친다.
몰타 기사단의 일원과 싸움을 벌여서 중상을 입힌 것이다.
카라바조는 몰타섬에서 도주해서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의 과거 친구 집으로 갔다.
하지만 몰타 기사단의 자객에게 쫒기는 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자객에게 습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는데,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도 사면을 포기하지 않은 카라바조는 배를 타고 그의 사면을 추진했던 당시 교황의 조카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만든 작품과 로마로 건너가려 했으나 잠시 정박한 곳에서 카라바조가 사면되었다는 걸 몰랐던 지방 경비대장이 체포하는 바람에 그림만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된다.
곧 풀려난 카라바조는 허망하게 떠나가는 배를 쫒아가려 하지만 결국 힘이 다해 쓰러지고 향년 3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 영향
카라바조에서 받은 영향은 그가 로마를 떠난 1607년경에서 1620년경까지, 그 고장에 있으면서 강한 명암의 대비 때문에 테니브러스 (tenebrous=暗黑派)라고 불리던 화가들에게 그 자취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중 독일인 엘스하이머, 프랑스인 발랭탱, 네덜란드인 테르브르흐 · 혼토르스트 등이 1620년 전후까지 알프스 북쪽에 이 화풍을 이식하였다.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로마에 있던 만프레디 (1580∼1620), 사라체니 (1585∼1652) 특히,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1565∼1638) 등이 직접 이 화풍을 계승하였다.
○ 주요 작품
Supper at Emmaus
Amor Vincit Omnia
Medusa
Basket of Fruit
The Fortune Teller
The Seven Works of Mercy
Young Sick Bacchus
Bacchus
Annunciation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