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년 5월 20일, 조선의 문신•성리학자 윤휴 (尹鑴, 1617 ~ 1680) 별세
윤휴 (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종부시 지평 등을 거쳐 공조판서 겸 이조판서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 (南原). 자 (字)는 두괴 (斗魁), 희중 (希仲), 호는 백호 (白湖), 하헌 (夏軒), 야보 (冶父)이다. 이름 휴 (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 (尹鑴), 윤전 (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 (澗西齋) 김덕민의 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이원익의 문인이다. 학행 (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 윤휴 (尹鑴)
.출생: 1617년 10월 14일
.사망: 1680년 5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부모: 윤효전
.친인척: 윤희손(친조부); 김덕민(외조부); 이원익(사돈); 이순신(사돈); 허목(사돈)
.본관: 남원(南原)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갱(尹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이조참판 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김덕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남인 학자인 이원익,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에 피신하였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보은 삼산 (三山)의 외가에 은신했으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3년 (효종 3년) 우의정 심지원, 병조판서 원두표의 천거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사퇴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 뒤 민정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시,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 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형을 선고받고 법살당했다.
사후 1689년(숙종 15년) 3월 신원되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고, 여러 번의 추탈과 복작을 반복하다가 1908년(융희 2년) 4월 이완용의 상주로 최종 복권되고, 죄안에서 삭제되었다. 그의 학문은 이서우를 거쳐 성호 이익과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송시열, 윤선거 등과는 광해군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으나 그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예송 논쟁의 과정에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는 윤선도, 허목 등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송시열과는 타협할 수 없는 원수가 된다.

○ 생애 및 활동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의 관사에서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난 뒤에는 한 때 선영이 있는 공주 유천(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장년에는 서울 쌍계동(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윤휴의 집안은 선비 가문으로서, 고조부인 윤자관(尹子寬)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으로 벼슬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고, 할아버지는 이중호(李仲虎)를 사사하였다.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고, 1617년(광해군 9)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의 계열인 소북이 자멸하자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宋時烈)과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儁) 그리고 이유(李유)·장충함(張沖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啓)·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1636년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해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으로,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해 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마침 현종이 죽자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재직 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 중에 군권(軍權)의 통합을 기한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사서 경신환국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생의 대부분을 포의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았다. 1638년 「사단칠정인심도심설 (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 (理氣)· 심성 (心性)의 문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다. 그 뒤 『중용』· 『대학』· 『효경』· 『상서』· 『주례』· 『예기』· 『춘추』 등 여러 경서들에 대한 자신의 분장 (分章)· 분구 (分句)·해석을 가한 『독서기 (讀書記)』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은 20대 유천 시절에 「홍범설 (洪範說)」· 「주례설 (周禮說)」· 「중용설 (中庸說)」 등에서부터 시작해, 서울 하헌 시절에 「효경장구고이 (孝經章句攷異)」· 「대학설 (大學說)」· 「중용장구보록서 (中庸章句補錄序)」· 「중용대학후설 (中庸大學後說)」 등을 지어 마무리한 일생의 역저로서, 조선의 유학사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는 업적이다.
주자 (朱子)가 성학 (聖學) 발전에 최대의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성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학인 (學人)의 자세로 일관해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유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새로운 분장·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윤휴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해 칭양받았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 (斯文亂賊)으로 규탄받았다.
이 밖에 「현종대왕행장 (顯宗大王行狀)」· 「가어주수설해 (家語舟水說解)」· 「어제주수도설후지 (御製舟水圖說後識)」· 「전례사의 (典禮私儀)」· 「제진공고직장도설 (製進公孤職掌圖說)」· 「만필 (漫筆)」· 「통제사이충무공유사 (統制使李忠武公遺事)」· 「중간화담집서 (重刊花潭集序)」 등의 글들이 중요시된다.
윤휴의 저술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윤하제(尹夏濟)·윤경제 (尹景濟) 두 아들이 이미 정리했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 세력인 서인과 노론 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1927년에야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 (白湖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은 중요 저술인 『독서기』가 빠진 것을 비롯해 결함이 많았다. 그러다가 1974년에 직계손 윤용진 (尹容鎭)이 비밀히 전해오던 원고들을 모두 망라해 『백호전서 (白湖全書)』를 출판하였다.

○ 평가와 비판
정적이기도 했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 (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 (今古)를 관천 (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하면서 상찬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군역을 양반에게도 부과하려 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남인 온건파였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점을 여러번 지적하여 충고하기도 했다. 뒤에 자신의 충고가 먹혀들지 않자 권대운은 허적 등이 모인 자리에서 윤휴는 병과 화를 부르는 인물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후대의 사학자 이이화에 의하면 ‘윤휴는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였고 경전 해석을 두고도 심한 이견을 보였다. 그런데도 유독 북벌론만은 그 명분론이나 현실적 대응이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친 북벌 논의를 두고 명나라를 위한 대의나 민족의 치욕을 씻으려는 복수심보다는 체제 유지를 위한 위장 논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시말해 존명배청 (尊明排淸)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립해 나가면서 북벌론을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 가족 관계
이순신, 이원익, 허목 등과 인척관계였다. 아버지 윤효전의 첩은 덕수 이씨로 이순신의 서녀였다. 또한 서형수 전주 이씨는 오리 이원익의 서녀로,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는 미수 허목이었다.
고조부 : 윤자관(尹子寬, 1490년 – 1550년)
증조부 : 윤호(尹虎)
할아버지 : 윤희손(尹喜孫)
할머니 : 이씨(李氏, ? – 1629년, 이수(李琇)의 딸)
서조모 : 이름 미상
서숙 : 윤효종(尹孝宗)
서숙 : 윤효증(尹孝曾)
서숙 : 윤효광(尹孝光)
아버지 : 윤효전(尹孝全, 1563년 ∼ 1619년)
어머니 : 파평윤씨, 윤담휴의 딸, 아버지 윤효전의 본처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 – 1656년 6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
서모 : 덕수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첩의 딸
이복 형(서형) : 윤영(尹鍈, 1611년 – 1691년)
이복 형수(서형수) : 전주 이씨, 오리 이원익의 첩의 딸
부인 : 정경부인 안동권씨, 권첩(權怗)의 딸
아들 : 윤의제(尹義濟, 1640년 – ?)
며느리 : 안동권씨, 탄옹 권시의 딸
손자 : 윤상정
손녀사위 : 송진룡(宋震龍)
손녀사위 : 이한제(李漢濟)
손녀사위 : 이주우(李柱宇)
아들 : 윤하제(尹夏濟)
손자 : 윤상흥
손녀사위 : 신필해(申弼海)
손녀사위 : 이한덕(李漢德)
아들 : 윤은제(尹殷濟, 자는 경숙, 1649년 – ?)
손자 : 윤상태
손자 : 윤상정, 백부 윤의제의 양자로 출계
손자 : 윤상리(尹相履)
손자 : 윤상항(尹相恒)
아들 : 윤륭제(尹隆濟)
손자 : 윤상선(尹相宣)
아들 : 윤경제(尹景濟)
손자 : 윤상정(尹相靖)
손자 : 윤상덕(尹相悳)
딸 : 윤씨
사위 : 임수(林滫)
첩 : 이름 미상
서자 : 윤만제(尹晚濟)
첩 : 이름 미상
처남 : 권준(權雋), 처 안동권씨의 남형제
외증조부 : 김가기(金可幾, 1537년 ~ 1597년)
외할아버지 : 김덕민(金德民, 1570년 ~ 1651년 12월 10일, 호는 간서재, 학자.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외삼촌 : 김옥(金鈺, 1603년 ~ ?)
외삼촌 : 김용(金鎔, 1605년 ~ ?)
외삼촌 : 김상(金金+尙)
외삼촌 : 김경(金鏡)
외삼촌 : 김석(金錫)
진외증조부 : 이수(李琇)
장인 : 권첩(權怗)
처남 : 권준
처남댁 : 파평 윤씨, 윤황의 딸, 성혼의 외손녀, 윤선거의 누이
사돈 : 권시(權諰, 호는 탄옹, 1604년 – 1672년)
사돈 : 이순신(李舜臣, 1545년 – 1598년)
사돈 : 허목(許穆, 1595년 – 1682년, 호는 미수, 오리 이원익의 정실부인의 손녀 사위)

○ 저서 및 작품
– 저서
《백호전서》 (白湖全書)
《독서기》
《주례설》
《중용대학후설》
《중용설》
《백호집》
– 작품
〈현종대왕행장 顯宗大王行狀〉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
○ 어록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사색한 것은 글로 기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색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다보면 깨닫고 알게 되어 언행이 두루 통하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